29화
‘어라? 테일 형!’
레이첼을 따라 정원을 산책(배회)하던 딕스는 고급스런 마차에서 내리는 자신의 큰형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금쯤 고된 학업에 지쳐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을 큰 형이 왜 이곳에 나타났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질 사이도 없이 딕스는 곧이어 내리는 자를 보곤 인상을 와락 구겼다.
캐넌 드 보리치와 테일 형과는 일면식도 없을 텐데. 어찌 저 놈이 형과 함께 마차를 타고 왔지.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론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
“뭘 그리 넋을 놓고 보는 것이냐?”
레이첼이 곁에서 말을 걸지 않았다면 딕스는 여전히 의문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을 터였다.
“저기.....응?”
방금까지 키 작은 관상목 너머에 있던 형과 캐넌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은 그의 반응을 이상히 여긴 듯 입구에 멈추었다가 서서히 움직이는 캐넌의 마차 뒤꽁무니를 보며 덤덤하게 말하였다.
“보리치 자작가문의 마차구나.”
귀족이라면 필히 배우는 것이 있다. 그건 각 귀족가문의 가계와 그들이 사용하는 문장이다.
‘보리치면 캐넌 그 재수탱이의 집안이잖아. 그런데 왜 형이 그 작자와 함께 있는 거지?’
아랫배 깊은 곳에서 찜찜함이 빠르게 솟구친다.
경직된 소년의 얼굴을 옆에서 들여다본 레이첼은 이 일에 흥미가 동한 듯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보리치 가문의 캐넌 공자도 왕실마법부 소속이라고 알고 있는 데. 너와 안면이 있겠구나.”
딕스는 그녀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캐넌과는 얼마 전 뜻하지 않은 일로 얼굴을 붉힌바 있다. 그런 자가 갑자기 큰 형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는 분명 노림수가 있음이다.
점점 심각해지는 소년의 표정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구나.”
그제야 옆에 레이첼이 있음을 깨달은 딕스는 표정을 급히 풀었다. 여기서 죽상을 하며 머리를 굴려 봐도 해답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직접 부딪쳐야 한다. 문제는 캐넌이 획책하려는 일인데.
“글쎄요.”
아리송한 소년의 대답에 레이첼의 두 눈이 순간 번뜩였다. 이는 불성실한 그의 답변에 대한 불쾌감보단 짙은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내가 경고하나 해줄까?”
“경고요?”
“캐넌 드 보리치는 굉장히 난폭한 남자다. 될 수 있는 한 그와 엮이지 마라.”
딕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을 난똥(난쟁이 똥자루)이라 부르며 인격적인 모욕을 가열 차게 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의 외조모와 어머니 앞에서도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천사모드로 전향하다니.
“갑자기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가씨.”
“저 녀석. 마음에 안 들거든.”
이런, 이런. 싹수없던 계집애가 눈은 참 똑바로 박혔구나! 라는 감탄이 튀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는 딕스다. 그렇다고 개망나니 데일의 핏줄을 어찌 믿고 맞장구를 치겠는가.
“그런가요?”
시침을 뗄 뿐이다.
“연회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우리도 들어가자.”
“함께요?”
그녀와 함께 다니는 내내 불편했다. 한데, 그런 그녀와 동시에 연회장에 입장을 해. 절대 아니 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의 발동.
몰래 캐넌의 행동을 지켜본다.
딕스의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만 꽉꽉 들어차 있을 뿐이다.
레이첼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확연히 피어올랐다.
“무례하군.”
깐깐하기로 유명한 궁전예절관의 교육코스를 단기간에 마스터한 자신에게 어찌 저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역시, 잠시잠깐 그녀의 제대로 박힌 눈을 칭찬한 게 실수란 생각이 벼락처럼 든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제가 볼일이 있어서......흠음.”
이리 말하며 하체를 살짝 꼬아 보여준 딕스다.
레이첼은 이를 대번에 눈치 챘으나 숙녀의 교육을 받은 그녀가 이를 대놓고 알아보았다는 표현은 할 수 없었다.
성격과 별개로 몸에 쌓인 교육은 습관처럼 행동에 따라붙기 마련이다.
“길은 알고 있겠지?”
“예.”
“알았다. 늦......아니다.”
레이첼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딕스는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으며 발걸음을 연회장 쪽으로 재촉했다.
연회장에 도착한 이후 내내 캐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그의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교계에서 캐넌은 매너와 교양을 겸비한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다 그의 아비가 고위 공직자라는 점과 가문을 승계할 유일한 후계자라는 배경. 그리고 그 자신이 불의 재능자라는 점이 플러스 되어 최고의 신랑감으로 각광받았다.
이런 그가 폰트 가문의 연회에 참석하자 그의 등장 이후 귀족가의 아가씨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어머나! 캐넌 님. 반가워요. 잘 지내셨어요.”
“어머, 캐넌 님이 오실 줄 알았다면 좀더 신경 썼을 텐데. 호호호.”
캐넌의 가문보다 한수 처지는 가문의 아가씨들은 적극적인 교태를 부렸고, 이들 보다 윗줄의 신분을 가진 아가씨들은 자존심 때문인지 간접적인 방법으로 캐넌의 관심을 끌려고 하였다. 평소라면 이를 크게 즐겼을 캐넌이었지만, 지금은 내심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왔기에 여자들의 지나친 관심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기에 머릿속과 혀는 연방 따로 놀았다.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오크 같은 년.’
“영애의 미모가 지금도 이리 눈부신데 더 치장을 하신다면 이 눈이 멀어버릴까 두렵군요. 하하.”
“어머나! 정말요?”
“당연하죠. 하하하.”
여자들을 상대하는 한편 딕스를 찾는 그 눈길은 점점 짜증을 담고 있었다. 이런 그의 눈에 마침 레이첼이 띠었다.
연회를 개최하는 폰트 가문의 외손녀인 그녀라면 딕스에 대해 알까 싶어 그는 몰려든 아가씨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한 뒤 레이첼을 찾았다.
캐넌이 레이첼을 향해 곧장 걸어가자 그를 주시하고 있던 여자들의 눈이 질투로 쌜쭉해졌다.
“뭐야? 저 어린 촌년에게 캐넌 님이 간 거야?”
“어머, 어머, 우리 캐넌 님이 촌년에게 홀리셨나봐.”
“어린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선. 저래서 촌년은 안 된다니까. 흥.”
사실 이 연회장에 참석한 그 어떤 아가씨보다 레이첼의 미모가 출중했다. 현재는 꽃봉오리에 불과하지만 2, 3년만 지나도 그녀의 미모를 따라 잡을 여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레이첼은 캐넌이 자신을 향해 곧장 걸어오자 안 그래도 차가운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하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첼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캐넌 공자님.”
“여전히 똑 부러지는 성격이군요. 하하.”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계신가요.”
용건이 없으면 그냥 가라는 박대의 어조다.
꿈틀.
레이첼의 태도가 캐넌의 심기를 살짝 건드렸다.
‘이 계집애가 감히!’
캐넌의 눈에서 스산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흘러나왔다.
레이첼은 이를 직시하면서도 표정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캐넌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연회장의 여자들은 레이첼이 그에게 꼬리를 친다며 속으로 광분했다. 그녀의속도 모른 채.
“나비가 꽃을 찾는 데 꼭 용무가 있어야 하나요. 하하.”
“전 아무나 찾는 꽃이 아닙니다.”
꿈틀.
캐넌은 예의상 한 자신의 멘트에 말뚝을 박는 레이첼의 말투에 순간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이러한 쌍심지는 레이첼의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오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머나! 캐넌 공자아닌가요.”
공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신랑감이 자신의 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세리나 남작부인은 마치 훈장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크게 기뻐했다.
캐넌은 자신의 볼일을 보지도 못한 채 레이첼에게 상했던 자존심이 그녀의 어미가 끼어들면서 더더욱 멀어지자 속으로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있었다.
한편, 딕스는 연회장에 몰래 숨어든 뒤 캐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다가 그의 주위에 큰 형 테일이 보이지 않자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 캐넌 과의 자리가 불편했던 레이첼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화분 뒤에 숨어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딕스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쟤가 왜 저기 있는 거지? 수줍어서 숨어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레이첼은 캐넌에게 관심을 보이던 딕스의 얼굴을 생각해냈다.
그 표정은 유쾌함과 거리가 멀었다.
딕스는 자신의 위치가 레이첼에게 들킨 것도 모른 채 큰 형 테일을 다른 곳에서 찾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기회를 노려 빠져나갈 틈을 엿보았다. 근데, 하필 그때 딕스가 숨어 있는 화분 쪽으로 캐넌에게 노골적으로 아양을 떨었던 여자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딕스의 얼굴이 순간 난감해졌다.
마법부의 관복을 입은 자신을 저 수다쟁이 여자들이 모른 척 할리 없다. 그럼 자연 사람들의 관심이 잠시라도 이쪽으로 쏠릴 터였다.
‘저 여자들은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젠장.’
쨍그랑!
“어멋!”
레이첼이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이 바닥을 때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잔이 부서지면서 음료수가 캐넌의 바지에 튀었다.
캐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딕스가 숨어 있던 화분 쪽으로 오던 여자들의 발걸음과 눈길도 동시에 소란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딕스는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캐넌에게 사과하는 레이첼의 눈길이 쫓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퍽!
“어이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딕스는 하인 알랭과 부딪쳤다.
몸이 가벼운 딕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에 알랭의 얼굴이 그 순간 하얗게 변하여 떠듬거렸다.
확실히 귀족에 대한 대우와 태도가 수도와 산골오지가 다르긴 다르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와 하인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딕스로선 지금의 상황이 자칫 연회장의 캐넌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애써 숨어 살피던 일이 허사가 되는 일이기에 소란을 떨 수 없었다. 뭐, 이딴 일로 소란을 떨 성격도 아니지만.
“괜찮아요. 제가 앞을 보지 않아서 부딪친 걸요.”
알랭은 순간 유일신 아르온의 천사가 눈앞에 강림한 게 아닐까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충돌을 보며 내심 알랭의 처지를 걱정했던 하인과 하녀들은 소년의 너그러운 태도에 다들 제일처럼 고마워했다.
“가, 감사합니다요. 손님.”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미안하죠. 저기 알랭 씨.”
“예, 손님.”
“저 혹시 보리치 가문의 캐넌 공자를 수행하던 사람들 중에서 밝은 갈색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십대후반의 청년을 못 보셨나요?”
이 넓은 저택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니 이곳 지리에 훤한 이들에게 묻는 게 빠르다.
잠시 생각하던 알랭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이들의 추돌을 지켜보고 있던 하녀하나가 다가와 말해주었다.
“그분은 뒤뜰 연무장에 계세요.”
“연무장요?”
딕스는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하녀를 응시했다.
“예, 검술대련을 하시기로 한 분들이 그곳에서 몸을 풀고 계세요.”
귀족가의 연회는 초청된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중 으뜸은 견습 마법사들의 마법시연이고, 그 뒤를 이어 검객들의 검술대련과 이름난 음유시인을 초청한 공연 순이다.
귀족가의 행사에 자주 참여하는 선배들 덕분에 하녀의 말을 금방 이해한 딕스였다.
‘아카데미학생인 형이 왜 검술대련에 나온 거지?’
가난한 학생이나, 배경이 일천한 학생들의 경우 용돈벌이와 앞으로의 취업을 위한 포석의 일환으로 이런 자리에 나오길 자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러한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깊은 내막을 모르는 딕스로서는 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경고의 빨간 등만 뇌리에서 연방 깜빡이고 있었다.
“혀어-엉!”
“어, 딕스 아니냐?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형을 찾았다는 안도와 다급함이 딕스의 하얗고 작은 얼굴위로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형, 왜 여기 온 거야?”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냐? 그것도 이 늦은 시간에.”
송아지처럼 순진무구한 큰 형의 눈망울을 보니 캐넌의 행위가 괘심하다 못해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딕스였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자.”
검술대련에 참가하는 자들 중 한명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들 형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는 캐넌의 사주를 받고 오늘 테일과 검술대련을 펼치기로 한 자다.
딕스는 큰 형과 캐넌만 신경 쓰느라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온 이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
테일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딕스의 뒤를 따랐다. 이들 형제가 사라지자 이들을 예의주시했던 사내도 함께 자리를 비웠다. 사내가 향하는 곳은 캐넌이 있는 연회장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투척하신 분께 이 편을 바칩니다. 간만에 딕스를 이어나가다 보니 헷갈려서 한참 헤매다 겨우 한편 분량 작성했네요. ^^;
다음 연재는 기약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