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신년을 넘겨 올해 25세가 된 마법부임관 9년차 코론.
자신보다 1년을 먼저 임관한 바이트가 복도 끝에서 나오는 것을 본 코론, 그는 한달음에 선배를 향해 달려갔다.
“바이트 선배, 딕스 못 보셨어요?”
“꼬맹이? 못 봤는데. 실내 수련장에 있겠지.”
“없더라고요.”
“숙사엔?”
“당연히 거기도 찾아봤죠.”
딕스를 찾아 마법부 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코론.
점점 짜증이 치미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연회장에 먼저 간 거 아닐까?”
“그 녀석 왕궁지리도 어둡잖아요.”
“젤 있잖아.”
“그 시녀는 휴가 갔잖아요.”
“끙, 알아서 찾아오겠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참, 너 사신단 연회에 우리가 초대된 이유 아냐?”
얼마 전, 제국의 사신 단이 방문했다.
이 일로 인해 왕궁의 경비가 몹시 삼엄해졌다.
“낸들 알겠어요. 오늘 스케줄 잡혔는데 제국 사신단 놈들 때문에 취소됐어요. 통 큰 후퍼 자작 가 파틴데. 피해가 막심해요.”
“거기서 섭외 들어왔어? 자식 발 엄청 넓혔네.”
바이트는 코론의 스케줄이 취소되자 속으로 무척 고소해했다.
“선배만 하겠어요. 그나저나 이 꼬맹이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설마 야외 수련장에 있는 건....”
“이 날씨에 얼어 죽으려고 거길 갔겠냐? 그냥 가자. 늦겠다.”
“그렇겠죠. 에잇, 나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총총걸음으로 연회장을 향해 이동했다.
스스스스스.
완벽한 마력문장!
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많은 재능자들. 하지만 그들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행운과 만난다.
마법사의 상징이자 힘의 증표!
‘의식의 영역으로 마나를 끌어들인다. 의지발현!’
물의 마나가 딕스를 향해 몰려들었다.
소년의 정신에 자리 잡은 물의 핵을 통해 의식영역으로 무섭게 쇄도했다.
이미 닦아 놓은 길이라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도도하게 흐른다.
순환단계의 첫 번째 과정.
이를 통해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움찔!
맹추위에 얼어붙은 그의 몸뚱이.
반대로 그의 정신에 박힌 물의 핵은 맹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수련을 시작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초보자치곤 마나의 양이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다.
갓 13살이 된 소년의 정신력.
마나의 양은 수련자의 정신력과 비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마나 유입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계속된 딕스의 수련.
그는 점심도 거른 채 수련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유독 수련에 진척이 느껴졌다.
피로감도 없었다.
무아지경!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수련자들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현상이 지금 딕스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초보 수련자에 불과한 딕스에게 말이다.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끊임없이 만든다.
본인에게 맞지 않은 문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면의 마나 저수지는 고갈된다.
다른 날 같으면 마나 저수지를 채우는 데 상당시간 소모되는 데 오늘따라 금세 채워졌다.
쩌저저적! 파직!
호수를 덮은 두꺼운 얼음이 외부의 압력도 없는데도 금이 간다.
이 틈새로 물줄기가 솟구치더니 무아지경에 빠진 딕스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2단계의 완성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수년을 매일같이 전력으로 집중하여 수련해도 될까 말까한 기연이 지금 딕스의 주변에서 일어난다.
딕스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었기에.
사르르.
미동도 없던 그의 몸뚱이는 뇌의 명령도 없이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양 팔.
그의 전신을 감싸고돌던 물줄기가 팔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비롭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마법부임관 10년차 바이트, 2단계를 완성한 그조차도 지금 딕스가 무의식중에 시현하는 양의 물을 조절할 수 없다.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광경.
물은 긴 뱀처럼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2단계의 재능자는 속성의 마나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여 쓸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쓰는 자들을 견습마법사로 부른다.」
재능자에서 한 단계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실체를 보여주는 능력.
이런 자들에게 붙는 칭호.
견습마법사.
평생 한두 번 찾아오기 힘든 무아지경.
딕스는 전투골렘을 소환하는데 필요한 자신만의 마력문장완성은 이룰 수 없었으나, 재능자에서 견습마법사로 단숨에 도약해버렸다.
촤아아아악!
무아지경의 달콤함에서 벗어난 딕스는 눈을 떴다.
‘어라? 팔은 왜 들고 있지?’
양팔이 들려있자 이를 의아하게 느낀 딕스는 손을 내렸다.
그의 머리위에서 즐겁게 유영하던 기다란 물 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물벼락!
“우아아아아! 우풉. 콜록콜록. 퉷퉷! 뭐, 뭐야? 누가 장난하는 거야!”
갑자기 몰려오는 한기에 쏟아지는 물벼락.
단순 재능자에서 견습마법사로 올라선 그는 이날 엄청난 양의 물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에취!”
“우와~!”
딕스의 입에서 기쁨 가득한 커다란 탄성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보라 자신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는 저 신비로운 물 덩이의 움직임을. 어찌, 저것을 보고 탄성을 쏟아내지 않겠는가.
두근두근, 쿵쾅쿵쾅.
자신이 펼치는 신비로운 향연에 스스로 놀라고 감탄하는 소년은 목구멍 밖으로 자신의 심장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어 벅차오르는 감동을 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억제했다.
별빛처럼 영롱한 딕스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고, 몸은 구름이라도 된 듯 아랫배에 힘을 주지 않으면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릴 것 만 같다.
눈앞의 이 현상이 무엇이던가!
바로 책으로만 접했던 견습마법사의 단계가 아닌가. 대체, 자신이 언제 이러한 경지에 올랐을까? 하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딕스는 자신이 대견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닳아 없어질 만큼 자신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하다못해 벌거벗고 온 궁궐을 돌아다니며 외치고 싶었다.
‘나 견습마법사 먹었다!’라고 하지만 곡식은 익을수록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소년의 눈앞에 풍요로운 과실수가 보인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것은 소년이 그토록 흠모하고 경애하는 똥색 금화.
눈앞에 펼쳐진 그 환상에 손을 가져가자 금화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결코, 아쉽지 않다.
자신이 이룩한 이 놀라운 성취는 곧 환상이 실제가 될 테니까.
“나, 정말, 뭔가 크게 될 놈인가 봐. 크크, 하하, 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이 기쁨을 누구에게 먼저 알릴까?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눈을 감자 가족들이 웃으며 달려오는 듯했다.
아버지의 두툼한 손이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진다.
따뜻한 미소와 마음으로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이, 그 온기가 느껴진다.
이 벅찬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
‘아빠, 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흑.’
촤아악. 챠리리링.
수면과 부딪치는 마찰음, 대기를 타는 아름다운 멜로디.
기쁨을 억누른 딕스는 자신이 창조한 물의 형상에 더욱더 힘을 쓰며 깊이 빠져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무심코 고개를 든 딕스는 깜짝 놀랐다.
‘어라? 저 분은!’
마법부로 편입된 호수는 더 이상 외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금지구역.
이러한 곳에 마법부와 전혀 상관없는 고귀한 여자 분이 등장했다.
저 여성에게 궁궐에 존재하는 금지구역은 없으리라.
그녀는 뮬 공국의 계승자 엘리자베스 폰 뮬 공주! 그 고귀한 여성은 딕스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 될 순간의 관객이 되었다.
운명일까?
바람에 실린 그녀의 향기에 딕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왕족을 주시하다니! 이 무슨 대역무도한 짓이란 말인가.
급히 정신을 수습한 딕스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지면을 향한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그녀가 자신의 불경을 벌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콩닥콩닥.
“마법부의 딕스, 존귀하신 공주님을 뵈옵니다.”
“너, 방금 그거 뭐였니?”
엘리자베스 공주의 아름다운 두 눈은 딕스의 물의 마나가 춤을 추었던 허공에 못 박혀 있었다.
딕스는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이제는 빈 허공인 곳을 바라본 뒤 조심스럽게 공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에 크게 놀란 딕스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답지 않은 불경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정신이 반쯤 달아난 상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대답은 하지 않았을 딕스다.
“무, 물놀이인데요?”
딕스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녀가 자신의 대답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르르.
“물놀이? 너 언제 견습마법사에 올랐니? 그런 얘긴 듣질 못하였는데.”
공주는 딕스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이에 딕스는 유일신의 가호가 내렸다고 생각했다.
바짝 다가선 엘리자베스 공주의 그림자에 깜짝 놀란 딕스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왕족의 그림자를 밟아선 안 된다! 라는 깐깐한 인상의 궁전예절교육관의 추상같은 호통은 아직도 뇌리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자동반사, 조건반사 기타 등등.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순간이다.
“자고 일어나니깐. 이리 되었습니다. 공주님.”
또다시 이상한 대답이다. 하지만 이게 진실인데 어쩌란 말인가!
고열과 두통을 동반한 감기로 열흘을 침대에서 헤매다 오늘에서야 겨우 일어났다.
곧장 야외수련장에 왔는데 평소와 달리 물의 느낌이 이채로웠다.
그 느낌을 좇아 마나를 움직였더니 좀 전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자신이 하고도 납득하기 힘들었던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니 대답이 수수께끼 같을 수밖에 없다. 공주님이 이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고 딕스는 내심 바라였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딕스의 태도나 대답에 언짢아하지 않았다. 딕스는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을 후광으로 둔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
천사도 지금의 저와 같은 표정을 짓지 못하리라.
그래도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몸가짐을 최대한 조심해야한다.
그녀는 호한마마도 겁낸다는 유일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는 고귀한 왕족이지 않은가!
“자고 일어나니 그리 됐다고?”
“그, 그러니까요. 공주님, 제 말은....결코 공주님을 기만하려거나, 무시하려는 뜻이 있어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맹세도 할 수 있어요! 그냥, 감기한번 앓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딴 뜻이 있어서 그런 허접한 대답을 한 게 아닌 점만 꼭 알아주세요.”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했지만 역시, 왕족은 께름칙하고 무섭다.
횡설수설하는 딕스의 모습에 공주의 입가에 웃음이 매달렸다.
공주는 그를 귀여운 강아지 보듯 바라보았다.
딕스가 우려하고 두려워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저 웃음이 진심이라면.
“아팠었구나. 그래, 지금은 괜찮으냐?”
어라? 이 공주님이 지금 자신의 몸을 걱정해주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딕스는 폭풍 같은 감동을 맛보았다. 고귀한 왕족의 걱정을 받는 자! 과연 몇이나 될까.
딕스는 바보 같은 지난 행동과 태도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궁궐예절에 맞춰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님. 지금은 병마를 말끔히 털어냈사옵니다.”
“예절교육관이 엄청 잡았나보구나.”
“네?”
그 깐깐한 예절교육관이 자신만 빡세게 조련한 게 아닌가보다.
‘공주님도 그 할멈에게 엄청 당하셨나보네. 늙으면 두려움도 없어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