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딕스는 고향을 떠난 지 20일 만에 공국의 주도 카라힐에 도착했다.
그가 처음 접한 수도의 풍경은 촌뜨기 소년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넓은 대로, 바쁘게 움직이는 마차, 깨끗한 복장을 한 많은 사람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형유리창을 전면에 내세운 커다란 상점들. 그리고 하나같이 높은 새하얀 건물들.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 공국의 심장이자 두뇌인 왕궁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왕궁이 들어선 터는 도시 중앙에 위치한 언덕이었다.
딕스가 탄 마차는 왕궁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오른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경사면은 없다. 대체 도로조성을 어떻게 하면 이럴까 싶다.
‘이것도 마도박사들이 힘을 보탰나?’
딕스는 수도에 도착한 내내 주변을 구경하느라 눈알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전형적인 촌놈의 행각이다.
“멈춰라!”
왕궁정문에 늘어선 경비병이 마차를 세웠다.
딕스는 이들 경비병이 모두 기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기사가 문지기를 한다? 페논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소년의 이러한 생각은 아버지가 갖고 계신 갑옷보다 저들 수문장의 갑옷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이들이 왕궁을 지키는 단순한 수문장이란 사실을 패트릭과 이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됐다.
간단한 검문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선 딕스는 시종들이 안내한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이 쫙 깔린 외궁 관사에 여장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몇 벌이 든 낡은 배낭이 전부다.
“이게 왕궁이라는 거구나?”
딕스는 감탄하며 관사를 구경했다.
이곳은 왕궁에 방문한 하급귀족들이 머무는 관사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고급 귀족들이 머무는 관사가 즐비하게 있었다. 딕스가 현재 머물고 있는 관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이 갖춰진 곳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딕스는 자신이 현재 머무는 관사보다 더 좋은 건물은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벽 만지는 것도 겁나네.”
딕스는 태어나 보석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보석이란 몹시 아름다운 빛을 내는 비싼 돌이라는 인식이 전부다. 이런 그에게 내부의 하얀 대리석은 보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감히 손도 대지 못한 채 넋 나간 표정으로 대리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은 소년이 알지 못하는 화려함과 웅장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나리.”
화들짝 놀란 딕스는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시녀가 수레를 잡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부른 호칭 때문에 소년은 어리둥절했다. 이 방엔 자신밖에 없음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라도 나리라 불릴만한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됐다.
남색의 셔츠와 긴 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시골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평범한 시골아이보단 피부가 깨끗하고 하얗다는 것만 빼면.
“저, 저기요. 나리는 없는데요?”
딕스는 눈앞의 시녀가 패트릭을 찾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패트릭은 좀전 임무보고를 위해 높은 사람을 만나러 갔다. 누굴 만나러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장을 고치고 간걸 보면 패트릭보다 훨씬 높은 지위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재능자라는 소년의 자부심은 수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니, 왕성에 들어오자 한없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관도에서 만난 클라우드의 영향이 지대했다.
시녀가 풋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딕스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몸은 열두 살이지만 마음만은 열아홉 청년이다.
이런 그에게 아름다운 시녀의 웃음이 어찌 가볍게 보일까? 더욱이 이 방엔 그녀와 자신 단 둘뿐이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어떤 흑심이 발동한 것은 아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부부지연을 맺지 않는 것처럼.
그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을 보며 웃어주자 기분이 달아오른 것뿐이다.
“저기요. 왜 웃나요?”
“죄, 죄송합니다. 나리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
딕스는 이 시녀가 자신을 나리라 부르며 꼬박꼬박 존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헤라시의 하녀인 리에와 나나도 자신을 높여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두 하녀와 달리 이 시녀는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 같은 소년을 높여줄리 없겠지! 라는 선입견이 매우 컸다.
뻘쭘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소년의 행동에 시녀는 웃음을 참기 위해 볼마저 부풀렸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딕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시녀를 보았다. 자신이 대체 저 시녀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녀는 자신을 이상하다는 걸까? 그리고 저 뚱뚱해진 볼 살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왕궁 안에 들어왔다는 중압감에 딕스의 내심은 풍랑을 만난 조각배마냥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어수룩한 모습은 바로 여기서 기인했다.
“제가 실언을 했다면 용서하세요.”
시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부 젊은 귀족들은 가끔 이런 식으로 시녀들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다. 시녀는 딕스가 그 같은 부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딕스의 복장을 보면 수도변두리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남루하다. 겉모습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년의 신분이 낮다면 어찌 관사에 떡 하니 머물겠는가.
시녀가 정색하며 사과하자 딕스는 괜히 미안해졌다.
“저 그런데 무슨 일이신데요?”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다과요?”
“네, 한데, 어디에 놓을까요?”
침대 옆에 작은 탁자와 접대용 긴 탁자가 있었고, 테라스 쪽에 간이탁자가 있었다.
딕스는 그제야 방안에 불필요한 탁자가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방이 워낙에 크다보니 이제까지 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딕스는 순간 세 곳의 탁자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디에 놓아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얼뜨기처럼 머뭇거리는 그를 보자 시녀는 테라스 쪽 간이탁자를 가리켰다.
“저곳에 놓아드릴까요?”
“네? 아, 네에, 그래주세요.”
갈피를 잡지 못했던 딕스는 시녀가 말하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지시하려고 했던 사람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녀가 테라스 쪽으로 가더니 탁자를 채우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색색의 쿠키가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술일까? 주면 마셔도 되는 건가? 등등의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저기요. 시녀님.”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관리라고 생각한 딕스는 자신의 어법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도 모른 채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원래부터 웃음이 많은 것인지 시녀는 작은 웃음을 또 터트렸다. 그러다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느끼곤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손님접대에 있어서 칼 같은 곳이 왕궁이다. 그래서 작은 실수도 상관의 귀에 들어갔다간 큰 곤혹을 치르게 된다. 딕스의 나이가 어리고 복장도 불량하고 볼품없었지만 관사의 손님인 이상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그녀의 본분이었다.
잠시 그 본분을 망각하고 연거푸 실수를 거듭하자 시녀는 긴장했다.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나리.”
“저기 저 빨간 액체는 뭔가요?”
“토마토 즙을 섞은 주스입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걸 내올까요?”
“아, 아뇨.”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시녀는 예의바른 모습으로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딕스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처럼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강가의 모래사장처럼 쫙 깔려있는 곳이다. 행동하나, 말투하나가 꼬투리가 될 수 있다. 최대한 몸을 낮춘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찍혀 좋을 건 없다. 왕궁에 대한 정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으니 이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소년은 자위했다.
‘존심상하네. 쳇!’
“뭐라? 자네도 습격을 받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각하. 한데, 그 말씀은 다른 이들도 습격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기사단에 복귀신고를 하지 않고 곧장 재상부를 찾아온 패트릭이었다.
“자네를 뺀 4명 모두 임무에 실패하였네. 그들은 현장에서 습격 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남아 있네.”
“하면, 그들이 호종하던 재능자들은?”
“납치됐네.”
“이런!”
마법사로 성장할 인재들이 무려 넷이나 납치됐다는 말에 패트릭은 공왕의 근심이 눈에 선했다.
마법사의 보유는 국가의 중요한 전력이다. 이처럼 중요한 인재들이 하나도 아닌 넷이나 납치됐다. 이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 한명이라도 장차 마법사가 된다면 더욱 배가 아픈 노릇이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기자 재상 벤자민이 말하였다.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오다가 클라우드 폰 야니스 공자를 보았습니다.”
“클라우드 공자를?”
재상 벤자민이 미간을 좁히며 큰 관심을 보였다.
패트릭은 클라우드 공자를 만나게 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재상의 노안에 점점 짙은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공왕 가는 제국 카페니스 제국에서 2백 년 전 분리됐으나 현재까지 공국은 많은 부분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호전적인 공국의 주변국들 때문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형국인 공국으로서는 모국이랄 수 있는 제국에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공국은 매년 막대한 조공을 제국에 바치고 있었다.
“알겠네. 그래, 자네가 데려온 재능자는 어떤 아인가?”
패트릭은 잠시 딕스에 대해 생각했다.
살인 장면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는 아이의 대담함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또한, 위기를 감지하는 초감각. 이 부분에 대해서 패트릭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소년이 감지한 건 단 한차례다 보니 확신이 서지 않은 탓이다.
이러한 점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었다. 아니, 재능자라는 것 자체가 특별하긴 하다. 하지만 딕스의 재능을 재상이 묻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재능을 꽃피울 자질이 있는가라는 질문일터.
“신중하고 똑똑한 아이 같았습니다.”
“신중하고 똑똑 하다라......”
재상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재능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큰 영지에서 이러한 재능자가 나오면 그곳의 영주는 대개 이를 감춘다. 이번처럼 다섯 명의 재능자가 한꺼번에 왕실에 보고되고 보내지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데, 이런 귀중한 인재 중 네 명이나 납치당했다. 진상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문제는 이 일에 클라우드 공자가 개입했다면......재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이었다.
“알겠네. 조만간 공왕전하께서 그 아이를 친견하실 것이네.”
“공왕전하께서요?”
패트릭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그 표정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원래는 재능자 다섯을 친견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네 명이 납치됐으니, 그 아이 하나로 대신할밖에. 그럼 그리 알고 돌아가게. 먼 길 오느라 자네도 고생했네.”
패트릭이 인사하고 나가자 재상은 비서를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이런 재상의 표정이 유독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