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지금의 딕스에겐 아름다운 여자란 내면의 비명처럼 시련일 뿐이다.
하녀가 물을 갖다 주자 딕스는 그 자리에서 잔을 비워버렸다. 그럼에도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저, 패트릭 기사님은 어디 계신가요?”
패트릭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 위해 딕스는 노력했다. 그러자 불끈한 아랫도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딕스는 하녀들이 자신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라 여기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불었다.
자신의 분신은 남자구실을 하기엔 속상할 만큼 너무 작다. 이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자존심을 박살내는 일이다.
“복도 세 번째 방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한데, 이름이 어찌 되세요?”
“나나입니다. 공자님.”
“좋은 이름이네요. 옆에 분은?”
“리에입니다.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흰 공자님을 모시는 하녀랍니다.”
아름다운 두 쌍의 눈길에 딕스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지 말아야지, 이러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 해봐도 남자의 본성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두 하녀가 빙긋 웃으며 앞장섰다.
그 뒤를 졸래졸래 쫓아가는 딕스는 눈길을 어디에 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무 짧은 그녀들의 치마 밖으로 드러난 가늘고 새하얀 각선미는 늪처럼 그를 잡아당겼다.
‘하녀들도 하인처럼 바지를 입히면 안 되나?’
쓸데없는 생각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패트릭은 저택요소요소마다 병력을 배치한 뒤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했다. 케이네 백작이 병사들을 붙여준 뒤로 이렇다 할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위기는 언제나 방심할 때 닥치기 마련이다.
자신의 임무에 철두철미한 패트릭은 그래서 조금의 소홀함도 없이 경계에 만전을 다했다.
이 모든 일을 끝마치고 간단히 샤워한 그는 하녀의 수발을 받으며 차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하녀의 아름다움에 한눈을 팔법도 한데, 패트릭의 마음과 눈길은 바윗덩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총각 땐 제법 이름을 날린 바람둥이였지만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딸을 낳은 후로는 건실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똑똑.
“패트릭 기사님, 저 딕스입니다.”
패트릭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직접 문을 열었다.
소년을 바라보는 패트릭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난다.
“어디 아픈가? 얼굴이 빨갛군.”
“아, 아니요. 전, 괜찮아요.”
“그래? 헌데, 무슨 일인가?”
패트릭은 깊어진 눈빛으로 딕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이 소년은 아주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위험을 감지하는 육감. 아니, 초감각의 소유자다.
케이네 백작의 자택에서의 일 이후 패트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소년의 행동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딕스는 막상 패트릭을 찾아왔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정원 연못위에 지어진 정자가 떠올랐다.
“정자에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패트릭은 소년이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 일단 안도했다. 그러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하녀들을 보자 사방이 꽉 막힌 방안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충실한 가장이지만 그 역시 수컷의 본능이 살아 숨 쉬는 사내다.
“험, 같이 가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 나도 심심하던 차였네. 오면서 보니 정차가 참으로 멋스럽더군.”
이리해서 딕스와 패트릭은 아름다운 하녀 셋을 피할 요량으로 정자로 향했다. 문제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하녀들이 두 사람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아름다운 하녀를 거느린 이들을 본 병사들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세상은 특별한 소수에겐 너무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그 소수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안 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부러움만 가슴에 쌓을 뿐이다.
그날 저녁 헤라의 시장이 저택을 방문했다.
시장은 딕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딕스는 시장의 질문공세에 한참을 시달렸다. 영양가 없는 만남이랄까? 시장이 중간에 하나의 선물을 내놓지 않았다면 그는 피곤을 핑계로 일찌감치 방으로 가버렸을 것이다.
“왜 제게 이걸......?”
“자네가 아들 같아서 말이야. 하하.”
시장은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용돈이라며 소년에게 내밀었다.
딕스는 시장과 돈주머니를 번갈아보다가 패트릭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속으론 이 돈이 무지 갖고 싶었지만 준다고 냉큼 받아먹기에는 주변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갖고 싶다. 갖고 싶어!’
가난하게 살았던 터라 금전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딕스였다. 세상은 권력과 돈으로 움직인다. 권력이야 현재로선 딴 세상 이야기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금전은 현실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식탁아래 그의 손이 연방 꼼지락거렸다.
“받아도 될는지......”
딕스는 여운을 남기며 좌중의 눈치를 살폈다.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패트릭이 받아도 좋다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
“어른이 좋은 마음으로 주신 것일세. 거절한다면 시장님의 체면이 서지 않을 걸세.”
딕스는 옳다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이를 덥석 받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그는 점잔을 빼며 아주 미약한 거절의 뜻을 보였다. 속으론 한 번 더 권하길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였다.
시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딕스가 좋아할 안성맞춤인 발언이었다.
“그럼, 그럼, 어른이 주는 걸세. 앞서도 말했듯이 자네가 내 아들 같은 느낌이 들어서 주는 거야. 많지도 않아. 딱 과자 값 정도네.”
사람 좋아 보이는 시장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권하는데 이를 마다하면 이는 미풍양속을 헤치는 파렴치한 어린놈이 되는 것이다.
딕스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내심이다.
그는 시장이 과자 값 정도라며 딱 잘라 말한 돈주머니를 챙겼다.
돈주머니는 보기처럼 상당히 묵직했다. 반면, 그의 마음은 한 없이 부풀어 올랐다. 흡사, 구름을 타고 하늘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시장님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뭘, 그렇게까지 말하나. 정말 별거 아닐세. 하하.”
시장은 매우 흡족한 듯 웃었다. 이 웃음이 얼마나 멋진지 딕스는 시장의 볼에 뽀뽀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딕스는 돈주머니를 식탁아래서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몹시 피곤한 척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가끔 비스듬히 고개를 꾸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봐도 나 엄청 피곤해요! 라는 행동이다.
“피곤한가 보구먼. 일찍 자게나.”
시장이 딕스의 가려운 마음을 매우 시원하게 긁어줬다.
시장에 대한 딕스의 호감이 급상승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딕스를 전담하던 하녀들이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딕스는 시장과 패트릭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특히, 시장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인 감정을 많이 내비쳤다. 자신에게 피해로 돌아오질 않을 작은 친절이야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다.
‘저런 사람은 많이 알아둬야지.’
딕스는 시장의 눈썹숫자까지 셀 기세로 그를 세세히 살폈다.
시장은 흡족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방으로 돌아온 딕스는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하녀들을 내보냈다. 그러곤 커튼을 치고, 문고리를 잠근 뒤 침대에 올라 돈주머니를 풀었다.
그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크게 반짝거렸다.
‘얼마나 들었을까? 이렇게 큰 도시의 시장님이면 씀씀이가 크겠지? 5실버......아님, 10실버?’
콩닥콩닥콩닥.
소년의 심장은 경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개방한 돈주머니!
“헉! 똥색이다!”
소년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금화를 본적이 없었다. 사실 실버단위의 돈도 그는 몇 번 만져보지 못했다.
패트릭을 따라 수도로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주신 3실버만 해도 심장이 떨릴 만큼 그에겐 거금이었다. 예지몽에서 영지의 수습 주사보로 근무했을 때 월급이야 받았겠지만 월급 받았을 때의 기억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용돈으로 주신 3실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손에 쥔 가장 큰 거금이었다.
한데, 지금 누런빛의 동전들이 수북하게 가죽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딕스는 몸과 영혼이 분리되었다.
그는 수전증환자처럼 덜덜 거리는 손으로 금화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열, 스물, 서른....백!
딕스는 이순간 자신이 숫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다 이런 엄청난 거금을 자신에게 대수롭지 않게 건네준 시장의 저의가 살짝 의심스러웠다.
어린아이 과자 값이라고 하기엔 100골드는 터무니없을 만큼 큰 거금이다. 도대체 시장의 금전감각이 어찌 되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거금을 선뜻 내준단 말인가? 자신이 재능자라서? 진짜 그 이유만일까? 즐거움이 반감되었다. 반감된 그 자리엔 두려움과 걱정이 들어찼다.
‘뇌물인가?’
과연, 이 돈을 받아도 될지 덜컥 겁이 났다. 더욱이 그 자리엔 패트릭이 있었다. 자신이 이 돈을 받고 입을 싹 닦아버리면 기사가 자신을 어찌 생각할지 염려스러웠다.
“나눌까?”
딕스의 두 눈은 금화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나눈다면 얼 만큼 나눠야 한단 말인가. 반? 아님, 반에 반?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머리는 다 가지라고 한다. 가슴은 절반씩 나누라 말한다.
딕스는 이 밤 생각지도 못한 과자 값으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우고 말았다.
‘젠장! 불로소득은 너무 힘들어!’
딕스의 절규였다.
다음날, 딕스는 퀭한 모습으로 패트릭의 방을 찾았다. 밤새 과자 값의 분할문제를 놓고 머리가 쪼개질 만큼 극심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패트릭과 절반씩 나누자는 것이다.
속이 쓰렸지만 혼자 날름하기엔 너무 거금이다.
돈도 좋지만 버거운 고민을 더 이상 머리에 이고 살순 없었다. 더욱이 이 기사는 자신의 큰형에게 좋은 뒷배가 되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절대, 홀대할 수 없다.
“안색이 좋지 않군.”
패트릭의 눈길이 쏟아지자 딕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들어가도 되요?”
“들어오게. 그래, 무슨 일인가? 출발하려면 2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음, 일단 들어오게.”
동이 막 튼 상태라 세상은 아직도 간밤의 어둠이 잔재로 남아있었다.
자신의 과자 값을 어찌 나누어야 할지 몰라 밤새 고민한 딕스는 너무 이른 시간에 패트릭을 방문했다. 당사자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패트릭으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운 노릇이다.
딕스는 패트릭이 권한 소파에 앉았다.
어제만 해도 소년에게 이 소파는 무척이나 푹신했으나 지금은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몸이 안 좋은가?”
패트릭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왔다.
딕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패트릭 기사님.”
“.........?”
“제가 어제 시장님께 받은 돈 있잖아요.”
“음.”
“보니깐 과자 값치곤 너무 많아서요.”
패트릭에 입가에 돌연 엷은 미소가 걸렸다.
딕스는 이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에게 과자 값의 절반을 상납(?)하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어찌 전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반반씩 나누죠! 이러면서 돈을 내밀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지 못하고 덜렁 온 것이 그제야 후회스러웠다.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딕스였다.
“그랬는가?”
딕스는 패트릭의 목소리가 상당히 담담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왜 웃지?’
패트릭의 얼굴엔 분명 웃음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딕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엉킨 살타래 같았다.
“저기, 그래서 이 돈을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 솔직히 밤새 고민했어요.”
일단 돈의 절반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어물쩍 뒤로 미루었다. 잘만하면 독식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기사의 얼굴에서 얼핏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고민 할 필요 없네.”
“무슨?”
“시장이 내게 돈을 줬다면 그건 뇌물이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아. 그러니 자네는 받아 챙겨도 그만이란 얘기지. 그리고 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그 돈을 내게 준다거나 하는 생각은 말게. 이래봬도 난 청렴한 공직자라네. 하하.”
패트릭의 말에 딕스의 머릿속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퀭했던 얼굴에 생기가 급속도록 감돌았다. 한편으론 자신의 시커먼 속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민망했다.
“그, 그렇겠죠. 패트릭 기사님은 공왕전하를 모시는 왕실근위기사대의 기사시니, 뇌물이 되겠죠. 그러니 부정한 일에 개입하시면 명예에 오점이 되겠죠. 하하,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어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자기변명과 최면을 거는 소년을 본 패트릭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사람은 자고로 생각을 길게 해야지. 그리고 내 한마디 하겠네.”
딕스는 패트릭이 여지를 남기는 듯하자 급히 정색했다.
“네.”
“공왕전하께 작위를 하사받은 후부터는 몸가짐을 조심하게나. 그때부터 자네의 소속은 왕실마법부에 적을 두게 되니 말일세. 내말 이해하는가?”
패트릭의 이 말은 그전까지는 돈을 받아도 된다는 의미로 소년의 머릿속에 입력됐다.
또한, 앞으로 일행의 동선이 어찌되는지도 크게 궁금해졌다.
헤라와 같은 도시. 특히, 헤라의 시장처럼 매우 훌륭하고 좋은 인품의 어른이 다스리는 도시를 개인적으로 몹시 경유하고 싶어졌다.
‘그럼, 금방 갑부소릴 들을 텐데!’
이런 그의 속내를 패트릭이 간파한 것일까?
“이동속도를 높여 카라힐에 갈 것이네. 때문에 헤라 시와 같은 경유지는 경로에 포함되지 않을 걸세.”
딕스는 속으로 좋다말았다. 하지만 100골드란 엄청난 거금을 손에 쥔 지금 더 욕심을 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고.
딕스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겼다. 욕심은 여기서 끝이다! 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워낙 없이 자란 환경적 요인이 소년의 잠재의식에 재물에 대한 욕구를 너무 키워놓았기 때문이다.
패트릭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딕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패트릭의 방을 나왔다.
‘그래도 한곳만 더 들름 안 되나?’
욕심을 버리는 게 어찌 쉬운 일일까? 그냥 주는 걸 받는 정도의 수고만하면 된다. 그것도 뒤탈이 없다.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