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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전기-12화 (12/194)

12화

딕스는 방에 불을 끈 뒤 복도 끝에 위치한 패트릭의 방문을 조용히 노크했다.

패트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딕스를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잠이 안 와서요.”

근거 없는 불안감을 패트릭에게 얘기할 순 없었다.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 어둠속에 불청객들이 숨어 있다면 문제의 소지가 없겠지만, 이를 조사한 뒤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게 밝혀지면 소심하고 겁 많은 녀석으로 평생 찍힐 터였다. 이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또한, 저녁식사 내내 자랑한 큰 형보다 못한 동생이란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오게. 나도 잠이 좀 안 오는군.”

패트릭은 딕스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소년의 행동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가 살핀 소년의 두 눈은 분명 두려움을 내포했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원인은 모르지만 이런 소년을 보자 집에 두고 온 딸아이가 문득 생각났다.

더욱이 여자아이도 아닌, 남자아이라면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는 일을 매우 싫어하리라.

패트릭은 딕스가 도적떼의 주검을 보고도 멀쩡했던 게 실은 속으로 삭힌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나를 배려한 것인가?’

패트릭은 이러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오해로 인해 패트릭은 딕스란 소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몸은 튼튼하지 못할지언정 마음만은 사내답다. 이러한 인식이 그에게 박힌 것이다.

딕스와 패트릭은 두어 시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딕스는 잠이 들었다.

소파에 몸을 묻고 자는 딕스를 자신의 침대로 옮겨준 패트릭은 긴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이런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늦게 잠을 잔 덕분에 딕스는 9시쯤 일어났다.

이 방의 주인인 패트릭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딕스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비틀어 돌린 뒤 방안으로 소리 없이 스며든 딕스는 테라스로 나가는 출입구 창문을 보았다.

분명, 어젯밤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쳐놓았던 커튼이 살짝 벌려져 있었다.

하녀가 와서 손댔을 수도 있는 일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한 딕스는 커튼을 일단 젖혔다.

멈칫!

‘이건?’

쇠고리가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커튼은 하녀가 손댈 수 있다. 창문을 열어놓는 행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쇠고리를 하녀가 잘랐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딕스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뒤통수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황급히 몸을 돌려세운 딕스는 방안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두근두근.

불길한 상상이 뭉게구름처럼 그의 내면에서 솟구쳤고, 심장은 마치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어떤 개자식이야!’

두려움이 욕설로 나왔다. 딕스는 창문을 밀었다.

절 단난 쇠고리가 대리석바닥을 때렸다. 이 소리에 그는 크게 놀라 움찔했다.

꽉 쥔 주먹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어젯밤에 보았던 곳으로 소년은 시선을 주었다.

그곳은 키 높은 정원수로 빽빽했다. 한낮이라도 사람이 몸을 숨긴다면 잘 찾아낼 수 없을 듯했다.

“딕스 군. 여기 있었군.”

바짝 긴장한 채 정원수들이 밀집한 곳을 바라보는 그를 누군가 불렀다.

딕스를 부른 이는 패트릭이었다. 자신의 방에 소년이 없자 혹시나 하고 이 방에 온 것이다. 소년을 향해 걸어오던 패트릭은 발밑에서 반짝이는 쇠붙이를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쇠붙이를 집었다.

패트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패트릭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딕스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긴 뒤 전방을 예리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테라스아래엔 교대하는 병사들과 하녀와 하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아닌 이곳의 일상이다.

패트릭은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젯밤 소년이 자신을 찾아 온 것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알아채고 피한 것이다.

심증이 아닌 확신이 들었다.

‘대체, 이 아이는?’

재능자가 어디 딕스 한 사람뿐이랴. 하지만 그 어떤 재능자도 소년과 같은 위기감지 능력은 없었다.

소년은 마치 항구에 정박한 배가 침몰할 것을 알고 미리 대피하는 생쥐처럼 앞날의 위험을 간파하고 이를 피해냈다.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한 걸까? 자신의 해석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등등.

패트릭의 머릿속은 딕스로 인해 크게 혼잡해졌다.

놀라움은 딕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패트릭 보다 오히려 더했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어!’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뼛 선다.

핑크빛 아름다운 세상이 갑자기 칙칙하게 변하더니 온몸에 달라붙었다. 두려움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맹렬하게 솟구친다. 그래서일까? 패트릭이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수천마리의 벌이 날갯짓하는 것처럼 들렸다.

딕스 일행은 케이네 백작이 지원한 병력의 호위 속에 움직였다.

쇠고리의 파손은 딕스, 패트릭, 케이네 백작만 알고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딕스는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누굴까? 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의문은 패트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소년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하고 가슴 한편이 몹시 서늘했다.

현재의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패트릭과 병사들의 보호가 없다면 언제 죽을지 모를 위험한 처지.

‘뭔가 일이 단단히 꼬여만 가는 것 같아. 이일이 설마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패트릭과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니 경솔한 짓만 하지 않으면 안전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고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고 패트릭에게 그들을 보호해달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힘센 부하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부하들을 두려면 그들을 책임질 수단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소년이 가진 것이라곤 재능자라는 지위뿐이다.

‘나만 강해서 될 일이 아니야.’

새로운 인식이 소년의 머릿속에 새롭게 각인된다.

함블요새를 떠나 한참을 이동한 딕스 일행은 작은 강변에 도착했다.

케이네 백작의 병사들이 호위로 따라와서 일행의 수는 50명에 이르렀다.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 저 만치 있는 마을은 너무 작았다. 그래서 패트릭의 명령으로 강변에 작은 군영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딕스 님, 여기 식사 가져왔습니다.”

기병 니코가 따뜻한 음식이 든 식판을 그에게 건네줬다.

식판은 군대에서 쓰는 사각형의 양철 판이다.

“고마워요. 니코 아저씨.”

“별말씀을요.”

“아저씨도 식사하셔야죠.”

패트릭은 수도에서부터 대동한 기병 니코, 델, 벅, 빅을 딕스의 지근거리에 머물게 했다.

케이네 백작이 붙여준 군사들이 있긴 했지만 소년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들을 고르다보니 이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니코는 순박한 웃음을 지어보인 뒤 자신의 식판을 갖고 소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니코, 아저씨. 카라힐은 어떤 곳인가요?”

우물우물. 꿀꺽.

음식을 삼킨 니코는 자신이 아는 카라힐에 대해서 설명했다.

촌놈이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그런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저씨, 수도에 하사관양성소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저도 하사관양성소출신입죠.”

“그래요?”

“한데, 하사관양성소는 왜 물으시는 건지?”

딕스는 작은형 마크에 대해 니코에게 말해주었다.

“제 작은 형이 하사관양성소에 입소한다고 했거든요.”

“아! 딕스 님의 작은 형님이 제 후배가 되겠군요. 이런 인연이. 하하. 제게 이름을 알려주시면 편의를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자랑은 아니지만 동기들이 그곳에 교관으로 있거든요. 헌데, 어느 병과인지?”

“병과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으로 딕스가 반문하자 니코가 웃으며 설명했다.

“하사관양성소엔 보병, 기병, 궁병, 공병, 행정병과 이렇게 다섯 학과가 있습니다. 전 기병학과출신입니다. 그렇다고 기병학과에만 제 동기 교관들이 있는 게 아니니, 어느 병과인지 말씀하시면 제가 딕스 님의 형님이 양성소에서 편히 생활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양성소생활이 신병교육대처럼 군기를 심하게 잡거든요. 그래서 중도탈락자가 많이 생기지요.”

신명나게 설명하는 니코의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래서 사람은 인맥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딕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코 역시 소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니코의 마음속엔 수도에 돌아간 뒤 동기들을 닦달해서라도 소년의 작은 형이 편히 양성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울 결심을 했다.

한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델, 벅, 빅, 역시도 딕스의 형 마크가 편히 양성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돕겠다며 자청했다.

마법사란 거물이 될 소년과 인연을 맺어두어 나쁠 건 없다. 또한, 그 가족과 인연을 맺어둔다면 후일 든든한 배경이 될 터였다.

세상살이란 다 이렇게 서로 돕고 돕는 과정 중에 그들만의 결속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딕스는 네 기병들이 자신에게 연줄을 대려고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마냥 기뻐하며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소년보다 더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네 기병들이었다.

이처럼 딕스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큰형 테일과 작은형 마크의 인생에 크게 관여하여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케이네 백작의 군사들이 일행에 합류한 뒤로 이렇다 할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긴, 정규군 수십 명이 이동하는 데 이를 막을 배포를 가진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덕분에 딕스는 신변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부를 벗어나 중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관문도시 헤라.

패트릭은 시청에 들러 일행이 모두 머물 수 있는 관사를 신청했다. 거처는 바로 배정됐다.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필요하신 것은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시청에서 나온 관료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패트릭에게 인사했다.

왕실근위기사대에 소속된 패트릭은 딕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공왕직영지에 한해서다.

근위기사대 자체가 공왕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자들이다 보니 이들의 말 한마디에 따라서 직영지 관료들의 출셋길이 닫힐 수도 있고, 열릴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은 공무를 수행중이지 않은가.

이러니 관료의 아부는 당연한 노릇이다.

관료가 딕스를 흘끔거리며 안면을 익히길 원했다. 하지만 소년은 관사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와! 이런 집도 있다니!’

시청에서 배정한 곳은 시청소유의 저택이었다.

이곳은 중앙의 고위귀족이나,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감찰관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이러니 건물과 정원이 웅장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딕스는 크고 아름다운 분수와 커다란 연못이 정원에 있는 게 신기했다. 특히, 연못중앙에 있는 정자와 이를 잇는 구름다리에 눈길이 쏠렸다.

구름다리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소년에겐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과 두 명의 젊고 아름다운 하녀가 배정됐다.

이들은 잠자리시중까지 드는 여자들이다.

딕스는 이 하녀들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고향에서도 이름난 예쁜 누나들도 눈앞의 하녀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저런 여자들을 엘프라고 하나?’

미의 화신인 숲의 종족 엘프.

딕스는 하녀들의 미모가 그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의 몸은 12살 소년이지만 마음만은 열아홉 청년이다.

바지에 텐트가 절로 쳐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남자의 욕망에 대해 환한 그녀들이다.

남자의 눈빛과 행동에 감춰진 욕구를 귀신처럼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다.

두 여자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욕정을 느끼는 거야?’

‘어린아인데? 헐.’

하녀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밤에 그의 침대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였다.

“저.....무, 물 좀 주실래요?”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어진 딕스는 떠듬거리며 하녀에게 부탁했다.

하녀 하나가 나가고 하나가 남았다.

딕스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의 요망한(?)눈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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