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 마력문장!’
로버트는 마력문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마법사로 발전할 자질을 가진 재능자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각국은 기본형 마력문장 24개를 지방 행정관청과 영지마다 비치하여 백성들이 이를 알도록 권장해왔다.
발견된 재능자는 무조건 왕실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재능자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데, 첫째는 왕실에 들어가는 것과 영주의 밑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발견된 재능자를 수중에 넣으려고 힘을 쓰곤 하지만, 보물을 지킬 힘이 없는 영주들은 왕실. 혹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영주에게 재능자를 보내기도 했다.
살아있는 보물.
이것이 바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를 재능자의 위상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던 로버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그 노화가 가라앉았다.
딕스는 아버지의 화난 얼굴이 순식간에 풀려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길이 자신의 미간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마력문장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이 이를 보고 담담할 수는 없다. 이 문장을 가진 자의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딕스는 자신의 삶이 앞으로 백팔십도 변할 것이란 것을 아버지의 표정을 통해 새삼 자각했다.
‘이제부터다!’
운명을 바꿀 것이다.
미래를 변화시키리라.
예지몽이후 마음속에 늘 찬바람만 불던 딕스의 마음에 오랜만에 훈풍이 불고 있었다.
페논 남작영지는 카페니스 제국의 황제로부터 공(公)의 칭호를 받은 공왕 알리힐 폰 뮬이 다스리는 나라다.
제국으로부터 공의 칭호를 받고 공왕이 되었기에 공국의 역사와 문물은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뮬 공국은 북쪽으로 싱그로아 왕국, 리안부족연합국, 동쪽으론 아리온스 왕국, 서쪽으론 헥센 왕국과 국경을 면하고 있으며, 남쪽으론 카페니스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강대국들 사이에 낀 조그만 공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큰 강대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강대국은 역시 제국밖에 없다.
오만한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은 뮬 공국을 자국의 영지쯤으로 생각하며 매년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대신 공국이 타국의 침입을 받으면 군사를 보내 도움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때문에 뮬 공국은 늘 제국의 눈치를 보곤 했다.
페논 남작영지의 기사 로버트는 딕스의 일을 주군인 토르네 남작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로버트는 페논 남작영지의 일곱 기사 중 하나로 영주에겐 꽤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로버트,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토르네 남작은 제후로서는 큰 결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요한 일이 닥칠 때면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유난히 너그러웠다. 영지의 문제아인 데일 소공자가 망나니가 된 것은 남작의 이러한 성품이 크게 작용했음이다.
“주군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로버트의 사람 됨됨이는 진중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그는 맡은바 임무는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토르네 남작은 이런 로버트를 크게 신임하여 내심 차기 영지의 수석기사로 내정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네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은 것으로 보아 꽤나 큰일인 것 같군. 무슨 일인가? 충실한 나의 기사여.”
로버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토르네 남작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능자를 발견했습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다, 다시 한 번 말해보게? 재능자라고 했는가? 그게, 사실인가?”
토르네 남작의 반응에 로버트는 그를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도 밤새 잠을 설치며 몇 번이고 아들의 마력문장을 확인하며 놀라움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재능자를 발견했습니다. 주군.”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로버트는 보고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마저 이처럼 냉정한 것은 아니다.
재능자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기에.
“하하하하, 누군가? 내 영지에서 나온 재능자가?”
흥분한 남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능자는 1만 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하다. 또한 이렇게 등장한 재능자는 10에 9는 평생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러나 단 1의 확률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그들의 유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이었다.
“제 아들, 딕스입니다. 주군.”
“자네 아들이라고?”
“그렇습니다.”
“오! 이런 경사가 있나. 다른 이도 아닌 로버트 자네의 아들이 재능자라니. 이는 유일신 아르온 님의 가호가 자네 가문에 내렸음이야. 축하하네. 로버트. 진정을 축하하네. 하하하하.”
“황송합니다. 주군.”
“내 당장 이 사실을 공왕전하께 상신해야겠어. 내 영지에 재능자가 출현하다니! 로버트 자네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딕스를 만나봐야겠네. 참, 자네가 식별했다면 마력문장을 본 것이겠지?”
로버트 기쁨을 감추며 최대한 담담히 대답했다.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좋군. 좋아! 아주 좋아. 로버트 자네는 당장 딕스를 내게 데려오게.”
토르네 남작이 기뻐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재능자의 발견. 그것도 가신의 아들이라면 훗날 영지에 든든한 조력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재능을 꽃피워 마법사가 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지만 일단은 크게 축하할 일인 것은 분명했다.
“참! 자네 아들의 재능이 무엇인가?”
“물의 눈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 내 자네의 아들을 빨리 보고 싶군. 어서 다녀오게.”
“명을 받듭니다.”
로버트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이런 그의 얼굴엔 커다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딕스, 그 아이의 장래를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로버트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던 딕스를 후일 행정관으로 만들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행정관서의 사람들과 자리를 자주 마련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아들이 재능자로서의 능력이 발견 된 이상 행정관으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자신이 행정관으로 키우고 싶더라도 자신의 주군과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집으로 향하는 로버트의 발길은 그래서 깃털처럼 가벼웠다.
딕스는 미래를 바꿀 계기를 얻었다.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신의 처우가 크게 달라질 터였다.
‘영지에 남을까? 아니면, 왕실로 갈까?’
꿈속에서 그는 영지의 수습 주사보로 3개월을 근무했다.
그 기간 동안 영주인 토르네 남작과 말을 섞은 것은 한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영주관으로 들어온 딕스는 영주의 집무실로 가고 있었다.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안내했지만 그는 영주의 집무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제치고 앞장설 수는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영주관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12살 꼬맹이니까.
“딕스, 영주님을 만나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귀족을 대하는 예법을 모르는 아들이 혹시라도 실수를 저지를까봐 로버트는 그 답지 않게 여러 차례 잔소리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귀족을 대하는 예의범절을 미리 가르쳤을 테지만 영주와의 만남이 갑작스레 이루어졌기에 그럴 틈이 없었다.
로버트는 자신이 너무 가볍게 행동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실수를 하더라도 영주가 이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후일, 마법사가 될지 모를 이와 척을 져봐야 남작에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다니! 로버트 정신 차려라. 그 분은 내 평생을 바쳐 모실 나의 주군이시다!’
새삼 마음을 다 잡는 로버트의 귀로 딕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예. 아버지.”
로버트는 딕스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충! 근무 중 이상무.”
“미켈, 자네가 오늘 당번인가?”
영주의 집무실 앞엔 수습 기사 미켈과 4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딕스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미켈을 유심히 살폈다.
‘누나와 미켈 형이 3년 후부터 사귀지 아마?’
영주관에서 하녀로 일하는 누나 미리아와 지금은 수습 기사인 미켈.
둘은 영주의 아들 데일로 인해 영지가 거덜 나는 다음해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중요한 몇 가지 가족사를 딕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에는 누나의 연인인 미켈도 포함된다.
“그렇습니다. 한데, 저 아이는?”
미켈의 갈색 눈이 딕스를 향했다.
딕스는 장래 매형이 될 미켈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미켈은 자신을 친근한 태도로 바라보는 딕스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지만 딱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로버트가 딕스를 소개했다.
“내 아들 딕스네. 영주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네. 안에 기별을 넣어 주겠는가?”
“아! 그렇습니까?”
미켈이 딕스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충성스럽고 꿋꿋한 로버트의 아들이니 몸수색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또한, 방문자는 아직 어린 아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맡은바 본분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고지식한 것은 미켈과 로버트의 닮은 점이었다.
로버트는 미켈의 이러한 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절차상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로버트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딕스는 미켈이 자신의 몸수색을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런 그의 머릿속엔 누나 미리아가 미켈을 흉보던 게 떠올랐다.
「미켈의 고지식함은 아버지보다 더 할 거야! 가끔은 그 성격에 너무 답답해.」이리 말하면서 오히려 수줍게 웃던 누나.
“손칼이구나.”
딕스의 호주머니에 있던 손칼을 발견한 미켈이 로버트를 잠시 쳐다보았다. 영주가 인정한 사람 이외엔 누구도 흉기를 소지할 수 없다. 손칼이 흉기에 들어가기에는 애매하다. 더욱이 칼의 주인은 12살 소년이며, 믿을 수 있는 자의 아들이다. 그렇다고 관례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딕스, 손칼을 미켈에게 맡겨라.”
“예.”
딕스는 손칼을 미켈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그의 눈은 여전히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저 아이는 왜 나를 보고 웃는 거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미켈은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미켈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딕스는 눈에 익은 복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들의 담담하고 의젓한 행동에 로버트는 내심 안심되는 한편, 의아했다.
보통 사람들은 영주관에 들어오면 백이면 백 주눅이 들었다. 더욱이 지금은 영주를 만나야 할 상황이 목전이다. 그럼에도 어린 아들의 태도는 담담해 보였다. 로버트는 막내아들에게서 사내다운 듬직한 면을 본 듯하여 기분이 흡족해졌다.
영주의 허락을 받은 미켈이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로버트는 상념을 털어버리곤 딕스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들이 사라지자 미켈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님이 그리 기뻐하며 서두르시는 모습은 처음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미켈은 자신이 본 아이가 재능자임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딕스의 앞 머리칼이 미간을 가린 탓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