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109화
“네가 레이에게, 아니, 레이카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맡기는 거야. 너만큼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서버를 내리는 것을 거부했군요.”
“그녀의 의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라니요?”
“정한…… 그 친구가 듀얼-레전드의 개발에 참여했었더구나.”
“정한?! 그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레이카를 그의 손에 쥐어 주셨다는 겁니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실수가, 단순히 일을 쉽게 풀어 나가려고 했던 안일한 행동이 얼마나 큰 위험을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를 테니까!
“나 역시 모르던 일이었다. 산이가 나에게 레이카의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한국에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알았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 방면에 있던 사람이라면 공공연히 입소문은 났을 테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
“정한, 그 작자가 무슨 꿍꿍이로 듀얼-레전드를 만든 것이죠?”
“글쎄…… 적어도 그는 연이 너만큼이나 레이카에게 애착이 심했으니까. 어쩌면 그녀를 다시 살리기라도 하려고 이런 일을 꾸민 것일지도 모르지.”
“얼토당토않은 일이에요. 그녀를 살려요? 그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저…… 환상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래. 그러나 정한 그 친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겠지…….”
아버지의 말에 나의 머리가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수십, 수천 개의 정보가 머릿속을 뒤죽박죽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듀얼-레전드를 관리하는 것이 레이카라면……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두 번째 서버인 벨제뷔트를 그녀와 교체하려면 결국 메인 시나리오인 벨제뷔트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악신을 부활시키는 데 앞장서라니…… 크크, 정말 제대로 된 악당 역할이네요.”
“미안하구나.”
“아니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정말 듀얼-레전드 속에 레이카가 살아 있는 거라면 이 역할은 제가 맡아야겠죠. 5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 많은 유저들이 벨제뷔트의 부활에 대해서 눈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웅이 되려면 마지막 순간에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아니, 그 이상을 견뎌 내야 하는 역할로 바뀌어 버리다니. 정말 짓궂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착한 놈도 아니었는걸요. 전.”
그딴 것 5년 전에 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이 손으로 그녀를 죽였을 때.
“아스테온,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마케니안으로 향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되어 갔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저 거대한 산이 바로 마케니안이었고 이제 곧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이 제물들을 저 뜨거운 화산에 집어 던질 것이다.
“배트 일행의 발뭉 기사단도 이미 출발하여 마케니안으로 향한다더군.”
“내일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겠지만…… 아마 그들은 오늘 저녁이면 도착할 것 같더군요.”
“흐음…….”
“그들이 오늘 바로 마케니안을 잡으러 간다거나 하진 않을 테니 선수를 빼앗길 걱정은 없겠지만.”
“과연 배트 녀석이 우리가 먼저 이 제물들을 파기하고 난 뒤 마케니안을 잡겠다고 해줄까요?”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니까…… 확신을 할 순 없지.”
마케니안으로 향하는 일행 중에 제노 클레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라이라 왕국에서 그가 따로 움직이겠다고 했을 때 의외로 치츠카는 그를 믿는 듯 쉽사리 허락을 해 주었다.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려고 한다면 우리들이 막아야지. 그가 어떻게 유저들을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우리가 대륙을 위한 일을 한 것임이 밝혀지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으흠…….”
치츠카의 말에 난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대륙을 위한 일이라……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은 대륙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악신이 부활해서 최악의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은 듀얼-레전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벨제뷔트가 부활하지 않게 된다면 정말로 이 세상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니까.’
도무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레이카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듀얼-레전드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 될지언정 말이다.
‘그가 부활을 하려면 세 개의 제물이 필요하다. 두 개는 제노 클레이트가 가지고 있으니…… 결국은 마케니안에 도착해서 그와 합류를 해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군.’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제노클레이트의 실력 역시 상위 랭커에 견주어 보아도 결코 밀리지 않았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지?”
“네? 아, 아닙니다.”
“흐음…….”
나의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난 것일까? 치츠카마저도 넌지시 나의 안색에 대해서 물었다.
“설령 배트를 만난다 하더라도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알고 있어요.”
“그의 평판을 떠나서 그의 발뭉 기사단은 하나하나가 다 뛰어난 플레이어들이니까.”
“그래도 건방 떨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치츠카의 경고도 카린의 드센 성격을 막을 순 없는 것 같았다.
“저기 앞에 무슨 일이지?”
“음?”
눈이 좋은 바실리아가 걸음을 멈추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바실리아?”
“저기 앞에 먼지가 가득한데…… 보이지 않아?”
“글쎄요.”
드루이드이자 자연의 전사인 파나케이아가 된 바실리아의 시력은 우리들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백여 미터를 더 걸어가고 나서야 우리들도 그가 본 먼지 구름을 볼 수 있었다.
“사막도 아니고 웬 모래 바람이지?”
“그러게요. 이상하네…….”
저 멀리서 보이는 황색의 먼지바람을 보며 우리들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저 바람 어쩐지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으음…….”
잠깐의 침묵. 그러나 그 침묵 동안 서로를 바라본 우리들은 한꺼번에 소리 질렀다.
“제길, 조심해!!”
저 멀리서 보이던 먼지바람은 순식간에 우리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히이이잉……!!
거친 말소리가 조용했던 숲속을 울렸다.
“워워워…….”
거대한 백마가 우리들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거친 호흡을 내뿜는 말을 진정시키며 멈추었다.
“…….”
“오랜만이군, 치츠카.”
“그렇군.”
“그동안 잘 지냈나?”
선두에 서 있던 사람은 왜소한 몸집의 남자였다. 마치 왕자님인 양 백마를 타고 있던 그는 싱긋 웃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배트.”
그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안겨 주었던 그 녀석.
“낯익은 얼굴들이 많은걸? 단체로 다들 어딜 가는지 모르겠군.”
“흥, 네가 모를 리가 없겠지. 우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루트를 바꾼 것 같은데 말이야.”
“후후…… 그저 지나가다가 만났을 뿐이란 말이지.”
배트는 웃었지만 그의 웃음마저도 나에겐 가식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치츠카, 이쪽 길을 따라서 가면 나오는 곳은 활화산 마케니안인데. 설마 그곳에 가는 길인가?”
“네가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이런. 나 역시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서 말이야. 혹시나 같은 방향이라면 동행이나 할까 해서 말이지. 여행이란 것은 함께할수록 더 즐거운 법이잖아?”
“글쎄. 그 동행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훗, 딱딱한 건 여전하군.”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냉철한 치츠카였음에도 불구하고 배트의 앞에 서자 그 역시 그 특유의 화염처럼 불타오르듯 배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빙결의 아스테온과 카린 경, 그리고 전투마법사 레릭 님까지 뵐 줄이야. 정말 호화로운 멤버인걸?”
“……배트.”
“네?”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말을 타고 있던 배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그에게 물었다.
“글쎄요…… 한때 혈투의 전장으로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빙결의 아스테온과 제가 안면이라도 있었나요? 이거 영광이로군요.”
그는 무척이나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이 오히려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너에겐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라는 거로군.”
굳이 나의 좋지 않은 과거를 나 스스로 말할 이유는 없었다.
“배트, 마케니안을 잡으러 가는 거겠지?”
“아……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긴 할 거야.”
“있긴 할 거라니?”
“사실 마음이 바뀌었거든.”
“……?”
“마케니안을 잡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것 같거든.”
“마케니안을 잡지 않는다니, 그럼 어째서 이 정도의 인원을 데리고 마케니안을 향하는 거지?”
“활화산에 살고 있는 마케니안을 잡으러 다른 이들이 올 거거든. 그리고 난 그들을 막을 거다.”
생각지 못한 배트의 말에 우리들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마케니안을 잡으러 다른 이들이 온다니. 누구를 말하는 거지?”
“훗…… 치츠카, 이래서 넌 언제나 2위였던 거야. 난 이미 네가 벨제뷔트의 부활을 막기 위해 마케니안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나 역시 그 메인 시나리오를 하고 있는 유저지.”
“그렇다면…….”
“내가 마케니안을 잡겠다고 소문을 낸 것은 이 시나리오를 하고 있는 유저들을 빠르게 모으고 싶었기 때문이야.”
“흥, 머리를 썼군.”
“지혜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군. 어쨌든! 나의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군. 멤버들을 보니까 말이야. 곧 있으면 마케니안을 죽이기 위해 벨제뷔트들의 수하들이 나타날 거야. 그들을 막는 것이 우리의 임무. 어때, 치츠카. 이번만큼은 같이 공동전선을 만들어야 할 거 같은데?”
“……네 녀석과 함꼐 사울 줄은 생각도 못 했군.”
“크크크, 나 역시.”
치츠카의 씰룩거리는 얼굴을 보며 배트는 특유의 가벼운 미소로 응답했다.
“어쨌든 동료가 된 거잖아? 안 그래?”
“누가 동료라는 거지? 그저 목적이 같을 뿐이야.”
“크크, 그게 동료인 거지.”
달갑게 맞이하는 배트는 마치 우리를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치츠카는 그런 그의 행동에 고고한 척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내심 그가 우리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는 것 같았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게. 어쨌든 이렇게 되면 골칫거리 하나가 해결된 셈인가?”
“으흠, 일이 잘 풀리는데?”
동료들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배트의 변심에 기뻐하는 눈초리였다.
“아스테온?”
“응?”
“왠지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아. 아까부터 그러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슈가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난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배트마저 마케니안을 죽이지 않는다면…… 적이 없어진 꼴이 되어 버린 건가?’
나로서는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실수를 가장하여 배트가 마케니안을 잡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마저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루드.”
“네.”
“이분들을 위해 말을 내어 줘. 몇 명이 올지 몰라서 마차를 가지고 온 것이 잘한 일이로군. 숙녀분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배트의 뒤에 있던 금발의 미청년인 루드가 그의 명령에 손을 들어 흔들자 그의 기사단은 아주 호화로운 마차 한 대를 가지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