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78화
“세이드.”
“……응?”
“듀얼-레전드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뭔지 알아?”
“그, 글쎄…… 그게 뭐지?”
“후훗, 세이드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배트는 웃었다.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어깨가 멈추었다. 배트의 두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악취미적 요소를 가상현실에 넣어 뒀을까?”
“아, 악취미라니…….”
“그리고 그걸 알 수 있게 만든 것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런 것을 생각할 미친 녀석은 단 한 명뿐이겠지만 말이야.”
배트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그의 그 특유의 표정에 세이드는 전율을 느꼈다.
“시, 싫어!!”
“하지만 난 이 악취미가 너무 좋단 말이야.”
“아, 아, 아……!!”
“현실 세계에서 머리 좀 식히고 들어와, 세이드. 다시 한번 이따위로 일을 처리한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배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이드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배, 배트…….”
세이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버리는 세이드의 머리. 게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역겨운 뇌수가 잘린 그녀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다.
“흐응~.”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배트는 그저 나직이 콧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악취미적이야.”
“…….”
루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아주 얇은 자신의 레이피어를 닦아 냈다. 손수건에 묻은 그녀의 피를 보며 그 역시 무덤덤하게 말했다.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마스터.”
“앞으로 세 번 정도로군. 그녀는.”
“네. 그 뒤론 ‘정말로’ 죽어 버릴 겁니다.”
“그래, 이번 일로 세이드도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마스터의 뜻을 충실히 따르겠지요. 그녀는 그런 여자니까.”
“응, 맞아.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녀를 거두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루드의 눈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믿으니까.”
루드의 말에 배트는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 다시 와인 잔을 들었다.
“부활이란 거. 사실 웃기지.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인간의 룰이란 게 있는데 말이야. 게임이라고 해서 부활이란 제도를 만들어 놓다니. 이건 삶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일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듀얼-레전드라는 녀석은 더 웃기지. 부활 시스템이란 것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불안정해.”
“네.”
“팔다리가 부서지고 어딘가에 찔려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활을 할 수 있잖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로 여기 말이야.”
배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바로 이 머리만은 달라. 한두 번의 죽음으론 멍청한 유저들은 모를 거야. 머리가 깨어져 죽어 버리는 그 순간부터 진짜 죽음의 카운트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야.”
죽음의 카운트라니? 배트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지만 게임 속에서 진짜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뜻일까?
“물론 제한 조건은 엄청나게 많아. 몬스터가 아닌 플레이어에게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떠한 것보다 정확하게 머리를 겨냥해서 뇌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 귀찮지. 귀찮은 일이야. 하지만 한 번 한 번 죽을 때마다 부활이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지. 그리고…… 마지막이 되면 완전히 죽어 버리지. 바로 이 게임상의 자신이. 크크크…….”
배트는 와인을 마시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 웃기지 않아, 루드?”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스터.”
“게임이란 것 말이야. 아니, 가상현실이라고 말해야 더 옳겠지. 사람들이 어째서 가상현실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래, 여기선 약자도 강자도 현실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잖아. 그렇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크크, 죽으면 끝이잖아. 그건 현실과 같아.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죽어 버리면 끝이지.”
“…….”
다 마셔 버린 빈 잔을 내려놓으며 배트는 웃었다.
“그래서 가상현실에 빠지는 거야, 사람들은. 달라지고 싶어서, 지긋지긋한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데…….”
배트는 조금 전 세이드가 죽은 그 자리를 가리켰다.
“이 게임은 게임에서마저 진짜 죽음을 만들어 놓았어.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
“어째서 운영진은 이런 것을 만들어 놓았을까?”
“글쎄요…….”
“그리고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선 그 작자밖에 없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말이야. 언제부턴가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는데…… ·. 이런 미친 게임을 만들어 놓고 사라질 줄이야.”
배트는 와인 잔을 굴리며 말하였다. 그의 손에서 움직이는 와인잔이 어두운 방의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크크, 하지만 난 싫지 않아. 이런 미친 게임도 한 번쯤은 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안 그래?”
“…….”
루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배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2장. 홍련의 치츠카
“아스테온, 들를 데가 있어요.”
“음? 어디?”
“이쪽으로 가다 보면 붉은머리 부족의 마을이 있어요. 그곳에 좀 들를 수 있을까요?”
“응, 상관없지.”
“퀘스트 실패 보고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실패를 했을 때에도 다시 한번 그곳에 들르라고 했었거든요.”
“으음, 그래? 알았어. 그럼 그쪽으로 가지.”
뜨거운 사막을 지나면서 두꺼운 천으로 된 지붕이 덮인 마차 안에서 슈가비와 스완은 지친 듯 잠들어 있었고 나와 바실리아, 그리고 루르시아만이 말을 몰고 있었다.
“괜히 그곳에 갔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래 부족의 사람들은 말이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자들이 많거든. 붉은머리 부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글쎄요. 처음 보았을 땐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위험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게다가 퀘스트이기도 하구요.”
“그래. 뭐든 일을 했으면 완료를 해야 하는 법이니까.”
“네.”
“단단히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래요, 바실리아.”
“으응.”
바실리아와 나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기, 저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돼요.”
“응, 그래?”
사막으로 나 있는 길과는 반대 방향의 길이었다.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 길이 부족의 마을로 향하는 길이라니, 그들을 향한 코노트 왕국의 적대감이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었다.
“붉은머리 부족하고 코노트 왕국은 어째서 그렇게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것일까?”
“글쎄요. 왕국에서만 있어서 알 수는 없지만…… 코노트 왕국의 사람들은 붉은머리 부족에게만은 유독 적대감을 뿜어내던데요.”
“응, 맞아. 심할 정도로 싫어하더군.”
“사람의 문제는 양쪽 모두 들어 봐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붉은머리 부족 사람들의 이야기만 보자면 수백 년간 코노트 왕국에서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지?”
루르시아는 내 물음에 살짝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화염의 문장이요. 불꽃을 다루는 힘. 그게 부족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해 준 붉은머리 부족의 원천이기도 하구요.”
“코노트 왕국은 그 화염의 힘을 시기하고 있다는 것일까?”
“일방적인 욕심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코노트 왕국이 건국되었을 당시의 왕비, 즉 건국왕의 부인 부족이 바로 붉은머리 부족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버림받은 거죠. 붉은머리 부족은 일종의 집시 부족. 불꽃을 다루는 그 힘은 나라를 세우는 데엔 분명 큰 힘이 되었지만, 그 이후엔 그저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혹은 마녀의 힘으로 간주되어 버렸거든요.”
“그리고 왕비가 왕국을 떠남과 동시에 코노트 왕국도 화염의 힘을 잃어버린 것이로군.”
“네, 뭐 대충 그런 이야기예요.”
루르시아가 이야기해 준 사막의 왕국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비운의 왕비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야.”
“네?”
“응, 아무것도. 그보다 다 온 것 같은데?”
“아! 저기예요.”
모래로 덮인 사막이기에 울퉁불퉁한 길은 없었지만, 대신 마차의 바퀴를 파고드는 모래 덕에 힘겹게 말을 몰아 도착한 마을이었다.
“바실리아.”
“응.”
“조심해야겠는걸요. 정말.”
“그렇지? 내가 뭐랬어.”
“왜 그러세요?”
저 멀리 보이는 부족의 마을을 보며 나와 바실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붉은머리 부족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저기 보이는 연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밥 짓는 연기로 보이지 않아서 말이지.”
“네?”
“응, 저렇게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는 것은 딱 하나뿐이지.”
“루르시아, 가서 슈가비와 스완을 깨워. 단단히 준비하라고 일러.”
“알겠어요.”
루르시아도 나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듯 마차 안으로 들어가 슈가비와 스완을 깨우기 시작했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말이죠.”
“응.”
덜컹거리는 바퀴만큼이나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마차는 유유히 연기를 내뿜는 마을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타닥타닥.
모두 타 버린 나무들은 희미한 불씨를 휘날리고 부러지는 소리를 내뿜으며 그 마지막 생명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우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응, 참담하군요.”
“그러게.”
“코노트 왕국의 짓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워낙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이니까.”
“흐음…….”
루르시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붉은머리 부족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남은 것은 오로지 불타고 무너진 집과 시체들뿐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짓을……!!”
루르시아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스테온.”
“응?”
“설마 저 때문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퀘스트를 실패해서…… 실패한 결과가 이것일지도 모르잖아요. 이 많은 사람들이…… 저 때문에 죽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루르시아의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찔렀다. 현실만큼이나 이곳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감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 모든 것은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게 비록 네가 관여된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네 탓이 될 수는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보다 찾아보자. 생존자가 있는지.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게 네 맘도 편하겠지?”
“네.”
내 말에 루르시아가 나직이 대답했다. 위험한 일은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겠지만 이대로 가버린다면 루르시아의 마음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우웅…… 여기가 어디야? 아무리 봐도 마법 왕국은 아닌 것 같은데?”
“슈가비, 일어났어?”
“우…… 허리야. 이래서 마차에서 잠들면 안 되는데.”
“형, 여기가 어디예요?”
슈가비와 스완이 잠이 아직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마차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응, 붉은머리 부족의 마을이야. 잠깐 들렀는데…… 아무래도 늦은 것 같아.”
“우악! 시체다!!”
스완의 두 눈이 커졌다. 덩달아 우렁찬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즐비한 시체들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