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76화
1장. 혈전의 마지막
휘이…….
바람이 한 차례 몰고 지나갔다. 부서진 잔해들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릴 정도였으니, 지금 이 상황이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들…….”
수천의 관객들 중 한 사람의 작은 중얼거림마저도 콜로세움에서는 너무나도 크게 들려왔다. 거대한 연무장에 남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오로지 마음을 가진 심검을 든 검은 눈동자의 검사와 차가운 빙결의 검을 든 붉은 눈동자의 검사만이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조금 지쳐 보이는데, 괜찮아?”
“그건 아스테온도 마찬가지잖아요.”
“설마? 난 이렇게 멀쩡한데?”
“거짓말.”
“응?”
루르시아는 블리츠 브링거를 나의 다리를 향해 가리켰다.
“무릎이 떨리고 있는데요.”
“하, 하하.”
그의 말처럼 정말로 내 두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체력이 바닥이 나 검을 드는 힘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루르시아 네 쪽이 더 심해 보이는데. 응?”
“전 충분해요. 아직.”
심호흡을 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신 루르시아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가르나 글레어…… 재미있는 기술이야.”
“아스테온도요.”
루르시아의 화염은 정말로 매서웠다. 여기저기 그슬린 흔적들에 내 옷은 이미 누더기로 변해 있었다.
“이거 꽤나 마음에 들던 옷인데…… 이 정도면 수선도 못하겠군.”
“죄송해요.”
“훗, 아니야.”
어깨가 보일 정도로 너덜해진 옷을 잡아뜯으며 나는 루르시아를 향해 웃었다.
“결판은 지어야겠지?”
“물론이죠.”
“아직 이 정도론 네 욕심을 멈추게 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빙결의 검을 들었다. 여전히 검은 그칠 줄 모르는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저한테 당하실 거예요, 아스테온.”
“크큭, 과연 그럴까?”
슬쩍 웃으며 나는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
“…….”
더 이상 우리에게 대화는 필요 없었다. 루르시아의 검이, 그리고 나의 검이 불꽃을 튕기며 부딪쳤다.
“너나 나나 마지막 공격이 되겠지?”
“그렇겠죠……!”
“후회를 남기지 마. 그게 마지막으로 쓰게 될 가르나 글레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저 역시…… 그러길 바라요.”
루르시아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는 내 머리 위로 블리츠 브링거를 휘둘렀다.
콰앙!!
내 검의 두 배는 될 거대한 검이었기에 가뜩이나 체력이 빠져 있던 나의 무릎은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크윽……!!”
“가르나……!!”
불안정한 자세에서 루르시아가 화염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 위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직은 아니야!”
그러나 나는 루르시아의 검을 비틀어 미끄러뜨리며 공중에 올라가 있는 그를 떨어뜨렸다.
“후우!”
중심을 잃었지만 루르시아는 자세를 낮추며 착지했다.
“흐아압!”
왕실 검술을 배운 그의 검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거대한 검의 무게 중심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나의 빙결의 검과도 비슷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블리츠 브링거!!”
그의 외침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 블리츠 브링거의 검신에서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
그것은 에고 소드인 블리츠 브링거 자체의 힘인 듯싶었다.
콰앙!!
“아스테온……!!”
그러나 루르시아의 검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블리츠 브링거의 검날은 내 왼손에 잡힌 채 나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프로즌 피스트…….”
“미안. 이것도 내 능력이라서 말이지.”
차가운 얼음으로 둘러싸인 두꺼운 내 손이 블리츠 브링거를 잡았다. 프리이너의 불꽃이 감싸고 있는 상태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끝을 내 주지, 루르시아.”
“흐아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프로즌 피스트의 얼음이 부서지듯 떨어지며 블리츠 브링거가 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블링크!”
나 역시 마지막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을 펼쳤다. 지쳐 있는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 루르시아의 반응보다 그의 뒤에서 나타난 내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었다.
“라그나 인페르노(Ragna-Inferno)!!”
루르시아의 블리츠 브링거에서 솟아나는 화염보다 나의 차가운 냉기의 화염이 그를 먼저 엄습했다.
콰앙!!
“루르시아!”
객석에서 슈가비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 역시 그의 마음에 상응하는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기에 혼신을 다한 공격을 할 뿐이었다.
“후우…….”
약간의 한숨 섞인 숨을 몰아쉬며 나는 검을 늘어뜨렸다. 더 이상 검을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치이이……!!
연무장을 가득 덮고 있던 한기가 사막의 바람에 씻기듯 흩날리며 사라졌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
“하, 하하…….”
연무장 한가운데는 루르시아가 블리츠 브링거에 의지하며 힘겹게 서 있었다.
“번쩍 드네요. 정신이.”
“쿠쿡, 그렇지?”
아마도 루르시아는 그의 남아 있는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 나의 라그나 인페르노를 막았을 것이다. 누가 먼저 공격에 성공하느냐, 그것이 승패의 관건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루르시아의 팔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화르륵!
그것은 루르시아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작은 불꽃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쉽네요, 이거.”
“도구에 의존하는 건 진짜 네 힘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나였지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순 없었다.
“하지만 이걸 바라고 있었어요, 아스테온. 이 힘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지만 이것을 얻기 위해 힘겹게 얻은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막아 주길 바랐을 거예요.”
“훗, 그래. 못난 동생은 형이 이끌어 줘야 하는 법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루르시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심판, 승부는 난 것 같은데?”
나의 물음에 심판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한들 아마도 나의 승리를 기뻐해 주는 것은 오로지 카멜롯의 아더와 카린뿐일 것이다.
“아쉬워?”
“글쎄요…….”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루르시아는 바닥에 바스러진 화염 문장의 재를 보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 승자는 아스테온!!”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루르시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돌아가자, 루르시아.”
“네.”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더 이상 누구의 원망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것이 동료라는 우리의 관계였으니까.
“이제 모두 끝난 거죠?”
“……훗,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날 것이라곤 생각 못했었는데. 사막의 축제에서 사막의 전사들이 모두 빠진 승리라니 말이야.”
콜로세움 중앙으로 걸어 나온 보호트 왕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사막의 전사들만큼 사막 너머의 전사들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얻는 게 있겠죠.”
“후훗, 그렇군…….”
나의 말에 보호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혈투의 전장을 위해 다른 이의 피를 제물 삼으려는 당신의 생각이 틀린 것일지도 몰라요, 보호트.”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보호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작은 무언가를 건네어 주었다.
“검투사의 명예를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메달이다. 사막의 전사 이외의 사람이 이것을 가져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1년 뒤 다시 이곳에서 보길 바라겠다.”
“1년 뒤요?”
“그래. 다시 혈투의 전장이 열렸을 때 검투사는 자신의 메달을 걸고 다시 한번 이 전장에 참여해야 하지. 부디 그대는 그때까지 살아 있기를.”
“훗, 걱정 마세요. 1년이라…… 그래요. 그때는 이 메달을 가져갈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군요.”
나는 주먹으로 메달을 꽉 쥐며 말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그래, 혈투의 전장의 승자는 바로 아스테온이다! 그가 이 전장의 진정한 승자임을 나 보호트가 인정하노라!!”
보호트 왕의 외침이 콜로세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짧은 외침은 우리의 전장이 끝났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신호가 되어 주었다.
“엄청났어!!”
“사막의 전사는 아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사막 너머에도 저런 전사들이 있다니!”
보호트의 외침이 있어서일까? 승자가 발표되던 순간에도 조용했던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했다.
“그들도 진짜 강자를 알아보는 것이겠죠.”
루르시아가 콜로세움 주위를 한 바퀴 훑어보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훗, 그런가?”
수많은 관객들 속에서 아더와 카린의 박수는 나에게 있어 왠지 모를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 같았다.
타악!
“후훗…….”
그저 기분 좋게 마주 잡은 루르시아의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정리 다 했어?”
“네, 이제 출발만 하면 돼요.”
“후우…… 어쨌든 이제 모두 돌아온 건가?”
“그러게요.”
화려한 오프닝일수록 마지막 엔딩은 조용한 것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일지 몰랐다. 루르시아와 나의 결투는 조금은 맥없이 끝나기도 했지만, 대신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유저들의 의문은 우리의 결투보다도 더 강렬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조심해야겠는걸.”
“왜요?”
“너무 눈에 많이 띄었어. 물론 우리가 모르는 능력을 가진 유저들이야 많겠지만. 알테가르와 루르시아를 비롯해서 스완까지 평범하진 않으니까.”
“으음, 그렇죠.”
바실리아와 스완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뭐 상관있어요? 알려지든 안 알려지든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되죠.”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당찬 슈가비는 자신의 짐을 챙겨 왕성을 나서며 말했다.
“모두 나왔어?”
“네, 준비 끝났어요. 필요한 물건들도 모두 샀고요. 마차도 하나 샀어요.”
“응, 잘했어.”
사막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혈투의 전장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열기가 식어서일까, 아니면 우리의 몸이 적응되어서일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큼 덥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가는구나, 아스테온.”
“여, 몸은 괜찮아?”
“뭐, 병원 신세를 지긴 했지만 그곳에서 하루만 있어도 HP는 모두 회복되니까. 말짱해.”
“헤에, 그렇군.”
왕성의 문을 넘고 나왔을 때 그곳엔 나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미셀도 있었다. 도리언과의 혈전을 끝내고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 간 그였지만, 가상현실인 만큼 하루가 지나 완치가 된 듯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도리언은?”
“부활하고 나서 병원에서 있다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퇴원했다. 왜 죽었던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더라. 그래도 명색이 사막의 1인자인데……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을 거야.”
“그렇겠지. 누구한테 습격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으음,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코노트 왕국을 지나서 대륙의 가장 북쪽, 새벽의 고원으로 갈 거다.”
“새벽의 고원?”
“응, 그곳에 슈가비의 퀘스트도 있고 또 내가 해야 할 퀘스트도 있어서 말이야.”
“그래, 조심히 잘 다녀와라. 언젠가 다시 한번 코노트 왕국에 놀러 와라. 그때는 내가 1인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후훗, 그래.”
미셀이 나에게 건네는 손을 잡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는 내가 너에게 도전할 거야. 검투사의 명예를 걸고. 그 명예, 다시 사막의 것으로 되찾겠다.”
“후훗, 친구라고 쉽게 봐주지 않아.”
“언제는 봐준 적 있고?”
“여태까지?”
“……그게 봐준 거라면 할 말이 없구나.”
“하하하!!”
“크크…….”
대륙은 넓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강자 또한 많을 것이다.
“출발해 볼까?”
“네!”
“좋지!”
“으,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나고 싶어. 여긴 이제 지긋지긋하다니까.”
“하하하, 좋아! 모두 꽉 잡아! 출발해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는 슈가비의 모습에 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