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62화
“그녀를 만났나 보군.”
“…….”
“로지나는 꽤나 말괄량이라서 말이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어도 결국은 해버려서 뒤처리가 참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당신들 사랑 타령을 듣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하십시오.”
보호트의 말을 끊으며 난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겠군.”
“날 드레이크의 먹이로 던지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으니 우습군요. ‘네, 먹잇감이 되겠습니다’ 라는 대답이라도 기대하는 겁니까?”
“후훗, 설마.”
그는 마지막 남은 한 모금까지 모두 마시고 나서 나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먹잇감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자넬 데리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럼?”
“혈투의 전장은 진정한 전사를 뽑는 신성한 결투의 장. 내게는 드레이크와 처절히 싸울 수 있는 전사가 필요한 거야.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건 그저 저기 멍청한 붉은머리 부족 녀석들 중 아무나 잡아서 해도 되는 일이야.”
“반항이라…… 크큭, 그래. 자신의 부하를 쓰기엔 아깝고 말이지?”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죽을 목숨을 내가 구해준 것이니까.”
“그래? 그래서 은혜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주라는 말인가?”
“대신 자네 동료들은 무사히 구할 수 있지 않은가.”
보호트는 이보다 더 어떻게 좋게 해 주느냐는 듯 두 손바닥을 하늘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말하지만 로지나의 계획을 따를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그녀는 분명 뛰어난 전사이자 뛰어난 단장이지만 그래도 난 그의 남편이야. 날고 긴다고 해도 왕비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왕은 없어.”
보호트의 얼굴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뛰어난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할 일에 대해서 반대를 했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지만 왕국에 피해가 되는 일을 하게 할순 없지.”
“그래서 당신께 온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선 바실리아를 깨우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충분히 드레이크와 싸워줄 테니까. 우선…… 바실리아를 깨워.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어.”
“화가 많이 났나 보군.”
“간신히 참고 있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거야. 보호트!”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소드 오러가 두 주먹에서 흐릿하게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냉기의 검기가 바닥에 깔린 카펫을 덮었다.
“좋아. 조금 손해 보는 짓이지만 그를 깨워 주지. 하지만 더 이상 혈투의 전장이 있을 삼 일간 그 어디도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흥, 로지나의 도움이 없이도 도망가려 했다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어.”
“후훗, 그래.”
그는 웃으며 나에게 ‘작은 통’ 하나를 던졌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약을 먹이면 깨어날 거다. 독 같은 것은 아니니 깨어나면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야.”
그에게서 받아 든 약을 주머니에 넣으며 난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보호트, 혈투의 전장에선 아주 재미있을 거야.”
“크크…… 그래, 나도 그러면 좋겠군. 나 역시 이번 대회에 큰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왕으로서, 그리고 왕국으로서 이 전장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나 놀음의 한 가운데에, 아니 그저 들러리로서 내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잘 잤어?”
“왔어? 아스테온?”
“여어~!”
“오빠!!”
“동생!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슈가비가 접속을 했다. 보호트를 만나고 왔을 때 그녀마저 로그아웃을 한 뒤라서 난 바실리아에게 약을 먹인 뒤 그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보호트의 말이 틀리진 않았는지 그는 금방 깨어났고 난 조용히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동안 로그인이 안 됐던 거야?”
“하하,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좀 회복이 느렸나 보다.”
“하여간…… 드루이드라서 치유력만큼은 뛰어나다고 매번 말하더니 못 미덥다니까.”
“미안, 미안.”
덜렁거리는 성격이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바실리아는 무난하게 슈가비에게 말하며 웃었다.
“그보다 여기 엄청 좋은데? 코노트 왕국까지 오다니 말이야. 그래도 간단하게 대사막을 건넜는걸?”
“오빠가 누워 있는 바람에 오히려 시간은 더 걸렸잖아!”
“하하하. 그런가?”
바실리아가 깨어나자 그동안 침울해 있던 슈가비의 목소리에도 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혈투의 전장 건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확실히 잘한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그녀에게 그런 일을 또 말하면 분명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보호트 왕의 배려로 삼일 정도 더 여기 머물러도 될 것 같아. 바실리아도 깨어나긴 했지만 조금 더 쉬었다가 새벽의 고원으로 떠나자.”
“그래도 괜찮겠어? 벌써 여기서 많이 지체되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그럼, 그럼. 오늘 깨어났는데 코노트 왕국 구경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하여간! 민폐라니까!”
“하하하!”
확실히 분위기 메이커인 바실리아 덕에 우리들 모두의 분위기도 기분 좋게 변한 것 같았다.
“아직 한 번도 성 밖으로 안 가봤다면서? 아스테온, 어떻게 혼자만 돌아다니냐. 할 수 없지. 우리들도 구경이나 가볼까?”
“오빠!”
“하하, 그래요. 바실리아, 슈가비랑 스완을 데리고 가 주세요. 전 오늘은 조금 일이 있어서…….”
“일이라니?”
슈가비가 나의 말에 또다시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동안 너무나도 무거웠던 분위기에 활기찼던 그녀마저도 그 분위기에 전염이 되었나 보다.
“아니. 그냥 검을 좀 휘둘러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동안 너무 오래 쉬었잖아.”
“그런 거야?”
“형은 마법학교에 있을 때에도 검술을 연습했는 걸요.”
“스완, 너도 좀 활 연습을 해라.”
“헤헤, 전 윈드 포스를 믿으니까요.”
스완이 웃으며 자신의 등에 있는 윈드 포스를 꺼내자 마치 그의 말에 회답이라도 하듯 그의 활시위가 살짝 떨렸다.
“바실리아, 부탁해요.”
“응, 그래. 하지만 아스테온, 한 가지만 물어보자. 승산은 있는 거냐?”
“글쎄요. 싸워 보지 않았으니 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피한다면 제가 아니죠. 바실리아는 삼 일 뒤에 어제 말한 그들을 따라 피해 줘요.”
“그래. 알겠다.”
“아마 그곳에서 또 다른 퀘스트 아이템을 받게 될 거예요. 왕비인 로지나가 의뢰한 것이라 분명 평범한 아이템은 아닐 테니 제가 올 때까지 잘 간직해 주세요.”
“그래. 꼭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리마. 슈가비와 스완은 걱정 마.”
“네. 부탁해요.”
“오빠! 안 와?”
“어이쿠, 그래. 갈게, 기다려!”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간 슈가비와 스완에게 달려가는 바실리아의 모습을 보며 난 몸을 돌렸다.
“이거 이런 모습을 보니 내가 미안해지는군.”
“괜찮습니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보호트는 전의 그 모습처럼 예의바르게 나에게 와 말했다.
“연무장을 좀 쓸 수 있겠습니까?”
“물론. 라엔.”
“네, 폐하.”
“그를 연무장으로 안내해 주거라. 또한 그 어떠한 요구도 들어주도록.”
“알겠습니다.”
얇은 가죽 갑옷을 몸에 두르고 있지만 가녀린 몸을 가진 한 여인이 보호트의 명령에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으음…….”
그녀의 안내를 받아 나는 한적한 왕실의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라엔이 떠나고 나자 텅 빈 연무장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오랜만인걸. 이 기분.”
연무장에 와 본적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처음 빙루를 습득할 때 지겨우리만치 힘들었던 그때의 수련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후우…….”
눈을 감고 오랜만에 검에 힘을 주었다. 제대로 모든 힘을 끌어낸 본 적이 언제였을까? 곡해의 동굴에서 도르한과 싸웠을 때였을까?
“드레이크라…… 신과도 비등하다는 드래곤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은 무식하리만치 강력하고 자비심 없는 몬스터인 녀석을 상대로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섣부른 행동은 분명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아는 나는 부딪쳐 보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보호트는 로지나의 계획 전부를 알지는 못하고 있을 거야. 그녀가 자기 스스로 인질이 되려고 할 생각은 모를테지. 어쨌든 내가 혈투의 전장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나머지 세 명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일 테지.”
혈투의 전장의 개막을 알리는 그 시점에서 아마도 나머지 세 사람은 풀려나게 될 것이다. 콜로세움에 들어선 순간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을 테니까. 그녀를 인질로 잡지 않고서는 말이다.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눈을 뜬 순간 빙결의 검은 새하얀 얼음의 검으로 변해 있었다.
“간다.”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그 검을 다시금 쥐어 난 마법의 힘을 끄집어내었다.
화르륵!!
푸른 화염이 빙결의 검의 얼음을 감쌌다.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 화염이야말로 빙루의 모든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불꽃이었다.
“라그나 인페르노(Ragna-Inferno)!!”
나의 검이 바닥을 갈랐다. 그리고 갈라진 그 틈으로 거대하고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푸른 화염의 그 기둥의 주위로 냉기의 돌풍과 차가운 서리가 바닥을 감쌌다.
“후우…….”
보기에도 강렬한 힘이었다. 단단했던 연무장의 바닥은 차가운 얼음으로 갈라져 부서져 있었다.
“이 힘이 그 괴물에게도 먹힐지 모르겠군.”
나의 힘에 의문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것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길 수 있어…… 아니, 이겨야 해.”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청나군…… 생중계라도 할 생각인가?”
게시판의 열기는 엄청났다. 싱숭생숭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일어나자마자 듀얼-레전드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있던 참이었다.
[사막의 최강자를 가려라!]
[혈투의 전장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사막전갈(Dune Scorpion) 도리언! 그의 실력은 대륙의 다른 유저들과 비교하여 과연 어느 정도인가?]
[카멜롯 팀의 아더, 사를마뉴의 골든 나이트(Golden Knight) 아슈람, 마법사의 탑의 첫 번째 제자, 불꽃의 마도사 퍼스티까지. 대사막의 벽 너머 대륙의 강자들의 귀추도 주목!]
듀얼-레전드의 홈페이지는 이미 숱한 광고 팝업창으로 지저분할 정도로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