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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얼 레전드-44화 (44/122)

듀얼 레전드 44화

“아스테온.”

“음?”

슈가비의 힘없는 목소리에 난 불타 버린 저택 안에서 루르시아의 어머니를 발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은 것 같아.”

“아……!”

새까맣게 그을려 버린 시체는 그 모습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어야 할까 나는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비켜 주시겠어요?”

“루르시아…….”

그러나 그 불타 버린 저택에서 그는 너무나도 조용히 시체를 안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차갑게 보였던 이 소년에게 저렇게도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두 번이나 당신을 떠나보내게 하다니……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꽉 안으며 그는 사죄를 했다. 그것이 비단 이곳의 어머니에게 하는 말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진짜 어머니 역시 그렇게 그를 떠나갔었으니까.

치지직……!! 치직!! 콰앙!!

순간 루르시아의 주위가 폭발하듯 타 버린 재들이 하늘 위로 솟구쳐 바람에 뿌려졌다.

“이렇게 당신을 묻어 드리지도 못했었는데. 이번엔 당신을 제 손으로 묻어 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커다란 구덩이 안에 루르시아는 그녀를 묻었다. 쭈뼛쭈뼛해질 정도로 그의 몸이 마치 검이 된 것처럼 따가운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퀘스트? 그것이 필요한 걸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그런 목적이 필요한 거야?”

스스로의 자문. 그러나 그의 그 물음에 난 곡해의 동굴 속에서 카린의 말과 나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딴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저……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인데.”

루르시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나 역시 그 삶을 보여 주리라. 정해진 그 길이 내가 가야 되기에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이라면!!”

루르시아의 주변에 마치 뇌전처럼 번쩍거리는 전격이 뿜어져 나왔다.

“저건…….”

“듣고 있습니까! 보고 있는 것입니까!! 왕궁에서 잠들어 있는 검이여!! 이제 내가 그대를 찾아 가리라! 진짜 나의 길을 걷기 위해!!”

꽉 쥔 루르시아의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야 알겠어요. 내가 이 세상에 눈을 떴을 때. 그때부터 당신은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시련이 올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이제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쿠르릉!!

야수의 울음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천둥이 일었다. 우울한 밤하늘을 갈라 버릴 듯 루르시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심검(心劍), 블리츠 브링거(Blitz blinger)!!”

【퀘스트: 운명(運命)】

“우리의 아이랍니다. 폐하.”

“으음…….”

“귀엽지요? 당신의 검은 눈동자와 저의 검은머리를 가진 아이랍니다.”

“돌아가게.”

“네?”

“프란체, 내 비록 당신을 사랑하나 그대는 나의 왕비들과는 다른 미천한 신분. 분명 이곳에 있어도 살아가기 힘들 걸세. 오히려 더 마음의 병을 얻겠지.”

“하지만…….”

“이 아이는 내가 거두어 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살 집도 마련해 주겠네. 하지만 더 이상 왕궁으로 오지 말게.”

단호한 그의 말에 여자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힘이 곧 법이다. 강맹한 카마틴 왕국의 왕으로서 자네는 허물이네.”

“죄송합니다. 폐하. 폐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그저 가끔씩 이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게만 해 주시면…….”

“이 아이를 가끔 보내도록 하지. 허나 왕궁에서 보는 것은 안 되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슬픔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취기 어린 행동이 만들어 낸 잘못된 실수. 허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봤느냐? 네 처지가 바로 이거다.]

‘여긴……?’

[힘이 곧 법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렇게 힘을 숭상하는 녀석이 고작 영토 하나 넓히지 못하고 이렇게 숨어서 살아?]

‘누, 누구세요?’

[나의 첫 주인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그릇이었지. 두 번째 나의 주인은 온건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인덕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인은 그저 한 평생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능력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는? 고작 3대가 지나고 난 뒤에 녀석들은 나를 쥘 자격조차 없는 왕이었지!!]

목소리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 어둠뿐.

‘무, 무슨 게임이 이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그리고 아까 그 영상은 도대체 뭐지?’

[멋대로 남의 인생을 정해 버리는 멍청한 녀석들. 건국 왕 이후로 잠들어 버린 검이라고? 우습지도 않은 바보들. 그들의 손에 들리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워 스스로 잠들었다는 것을 모르다니!]

‘로그아웃도 되지 않잖아? 그리고 이 목소리는 누구지? 거기 누구 있는 건가요?’

[이봐, 꼬마야. 왕들의 왕이 되어 보지 않겠나?]

‘네?’

[이 대륙은 썩어 가고 있어. 멍청한 우두머리들 때문에 말이지! 그 옛날의 열정도 패기도 이제는 다 사라졌어. 네 인생도 그렇지. 멋대로 남의 인생을 정해 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왕 때문에 넌 분명 큰 시련과 슬픔을 겪게 될 거야.]

격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에게 말했다.

[검을 들지 않겠나? 멍청한 왕들의 위에 군림하는 진짜 왕이 되기 위해서!!]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하나의 문구가 솟아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넌 이미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수락해도 좋고 안 해도 좋지만 네 삶은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그게 네 운명(運命)이다.]

소년은 마른침을 삼키며 ‘YES’ 버튼을 눌렀다.

‘흡!!’

우우웅!!

그 순간 버튼의 새하얀 빛이 그의 두 눈을 찌르듯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새롭게 눈을 떴을 때 넌 18살의 소년이겠지. 소년이여, 나를 찾아라. 네가 울부짖고 슬퍼하기 전에 나를 찾아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부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함께 돌지 않기를. 그 전에 나를 찾기를!!]

그 목소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노여움에 차 있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간절함이 묻어나 있는 것 같은 것은 소년의 착각일까?

[나의 이름은 블리츠 브링거. 심검(心劍), 블리츠 브링거(Blitz blinger)다!!]

【메인 라이프 퀘스트】

【왕들의 왕(Kings OF king) 수락하였습니다.】

삶 전체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퀘스트.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의 그 선택은 그의 운명을 짓는 퀘스트였다. 그리고 그렇게 새하얀 빛을 뚫고 눈을 떴을 때, 소년의 앞엔 한 여인이 있었다. 슬프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 여인…….

“루르시아, 18번째 생일을 축하한단다. 이것을 받아 주렴.”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는 여인.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작은 상자를 받아 들고 서 있던 루르시아는 이제야 이곳이 엘라시온 대륙임을 알 수 있었다.

“18번째 생일…….”

그렇게 영문을 모른 채 시작한 게임 속의 삶이었지만, 이제 그는 누구보다도 더 절실해졌다.

“왕들이여…… 그대들의 위에 군림하겠다. 그것이 나의 삶이라면! 내가 받은 진정한 삶의 퀘스트라면!”

어두웠던 밤하늘에 뒤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불씨를 다시 한번 적시며 대지를 촉촉하게 만드는 비였지만, 그 안에 있던 우리에겐 마치 프란체, 그녀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10장. 심검(心劍), 블리츠 브링거(Blitz blinger)

“괜찮겠어?”

“가지마요, 루르시아.”

“그래,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가는 거잖아.”

우리 모두가 그를 말렸다. 그렇게 프란체를 묻고 난 뒤 동이 트는 새벽, 루르시아는 왕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걱정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하지만 루르시아의 얼굴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겪어야 하는 일인 걸요.”

루르시아는 땅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검을 다시 잡아 허리에 멨다.

“정말이에요. 정말…….”

그는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빗물에 얼굴을 씻고, 비록 지저분하지만 옷매무새도 단정히 정리했다.

“가겠어요.”

“어떡하지?”

바실리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보았다. 그러자 슈가비가 소리쳤다.

“어떡하긴요? 같이 가야죠!”

“엥? 정말?”

“그럼, 그냥 보고 있을 거예요? 근위 기사까지 자신의 편으로 데리고 있는 자에게 혈혈단신으로 가서 어떻게 하게요? 왕이 있다곤 하지만 임페노스 그 작자라면 그의 눈을 속여 루르시아를 해할 거예요!”

“슈가비 말이 맞아.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그는 죽겠지.”

난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찍 가려고 했는데…… 하루 정도 이곳에 더 머물러도 괜찮겠죠?”

“네!”

“응!!”

“끄응, 할 수 없지!”

거의 동시에 나온 그들의 대답에 난 웃으며 루르시아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콰앙!!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는 분명 장군감이라도 될 정도로 대단했지만, 소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을 곱지 않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냐.”

“무슨 일이라니요!”

“조용히 해라. 이곳은 신성한 회의가 진행되는 원탁의 홀(Hall of Round). 어린 네가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리기 이전에 이 나라의 왕자입니다.”

“너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가 있지.”

왕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소년에게 악취가 난다는 듯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말했다.

“그 지저분한 꼴은 도대체 뭐냐! 그리고 저 무뢰한들은 또 누구란 말이냐. 귀족도 아닌 자를 들여보낸 이가 누구냐!”

그렇게 말하며 왕이 옥좌에서 일어나 루르시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루르시아 킹 더 안토르! 너의 신분을 아느냐!”

“카마틴 왕국의 제 5황태자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아는 자가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무례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소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의 목소리 안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건 비통한 슬픔이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나신지 모르십니까.”

“알고 있다.”

“알고 있는 분께서 이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사고였다.”

“사고?”

마치 겨우 겨우 연결되어 있던 마지막 실 같은 줄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카마틴 왕국의 왕자는 자신의 아버지인 안토르(Antor)Ⅰ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닥쳐!!”

“루르시아 왕자님, 고정하십시오.”

“폐하께 무슨 실례이십니까.”

홀에 있던 대신들이 루르시아 왕자의 언행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어젯밤 어마마마께서 살해당하셨단 말입니다!”

루르시아의 눈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모두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눈물이 다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사고였다.”

안토르왕은 마치 남의 일을 듣는 듯 말했다.

“사고? 어떻게 그게 사고가 되어 버릴 수 있는 거지?”

“왕위 싸움에 신경이 많이 쇠해진 듯하구나. 네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하지만, 임페노스를 몰아세우기 이전에 증거를 가지고 오너라. 그 아이는 화재가 났을 때 내가 그곳의 정리를 위해 보낸 것이니라.”

“당신이…… 당신이 그러고도 이 나라의 왕인가? 어젯밤 죽은 사람은 거리의 이름 모를 거지가 아닌 바로 당신의 아내란 말이야!! 어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토록 태연할 수 있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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