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42화
“당신, NPC가 아니었어?”
“물론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바실리아를 바라보았다.
“NPC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지나갈 수는 없었거든요.”
“하아…… 뭐야? 그럼 시작부터 황태자로 시작했단 말이야?”
“약소국의 왕자이긴 하지만요.”
이거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인걸. 누구는 돈 한 푼이 아쉬워서 죽고 죽이는 판국에 말이야. 가만히 있어도 돈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니.
“누군 누더기 옷으로 시작하는데, 누군 시작할 때부터 비싼 옷이라니.”
바실리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루르시아가 말하고자 하고 싶은 말보다 오히려 부러움에 그를 보는 듯싶었다.
“왕자라고 해서 게임이 쉽다거나 편하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약소국의 다섯 번째 왕자라면 말이에요.”
물론 어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루르시아 역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좋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눈을 뜨고 잠이 들 때까지 제가 보는 것은 NPC들뿐입니다. 제가 플레이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저택을 지날 때 광장에서 보는 유저들뿐이지요. 하지만 안면도 없는 그들은 그저 그림 속의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흐음…….”
“NPC들이 싫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놀랄 정도로 인간다우니까요. 그저…….”
“그저?”
“왕궁에서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인형극 속에 제가 있는 기분일까요?”
“하긴…… 아무리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NPC라고 하더라도 진짜 인간이 가진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을 테니까.”
이렇게 듣고 있으니 루르시아 그의 게임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기기 위해 하는 게임에서 그는 오히려 경쟁하고 싸워야 할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왕비인 당신의 어머니는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거지?”
“맞아. 아무리 다섯 번째 왕자라고는 하지만, 어머니는 왕비시잖아요? 왕궁에 계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슈가비의 물음에 루르시아의 얼굴빛이 변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었죠? 다섯 번째 왕자로 태어난 것이 좋지만은 않다고요.”
“왕자들 간의 싸움을 말하는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전 이 나라의 마지막 왕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네 명의 왕비를 데리고 있었지만…….”
뒷말을 흐리는 그였지만, 난 충분히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이 아니셨군, 당신의 어머니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 게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가상현실이란 것은 결국 현실에서 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한 것이잖아?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도 있지. 답답하면 벗어 던져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럴 순 없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나의 물음에 루르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사과라도 하듯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말하셨죠? 현실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가상현실이라고요.”
“그렇지.”
“그래서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
“눈을 떴을 때 이미 각본처럼 짜여 있었던 삶이지만, 전 그저 18세의 루르시아로 시작했지만 그들은 이미 제가 모르는 18년간의 저와의 삶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잠시 숨을 돌리던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처음이거든요. 비록 현실이 아닌 가상이지만, 진짜 사람이 아닌 NPC지만…….”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 그리고 미묘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현실에서 가져 보지 못한 부모님이니까요.”
“아…….”
미안한 마음에 그만 조용히 듣고 있던 슈가비가 입을 가리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우습지만 연극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저 그들이 알고 있는 과거에 맞추어 대답하고 웃어 주는…….”
루르시아는 조금 전 유피아가 들어간 복도의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가식적이라 말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인연도 없지만, 저기 저 사람은 그저 한결같이 절 바라봐 주셨거든요. NPC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릴 수 없어요.”
“꽤나 힘들게 게임을 하고 있군.”
“아앗!”
난 그런 루르시아의 머리를 세차게 헝클어뜨려 버렸다. 스완과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게임을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 남들보다 좋지 못한 출발 선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전 단 한번도 공평하게 시작해 본 적 없어요.”
“그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법이니까.”
물론 나와 루르시아가 바라보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의 입장은 서로 달랐었지만 말이다.
“다섯 명의 왕자가 있지만 경쟁자는 단 한 명이에요. 제 1황태자 임페노스. 그 사람만 물리친다면 왕위도 어렵진 않죠.”
“세력은?”
“6대 4일까요…… 7대 3일 수도 있겠죠.”
“능력보단 혈통이란 말인가.”
내 말에 루르시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인 아닌 여성이 품어 태어난 아들, 진부한 귀족들이 그런 왕자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역시 아직 방법은 있답니다.”
“음?”
“카마틴 왕국에 전해 오는 전설이 있거든요.”
“그게 뭔데?”
“카마틴, 틴타겔, 카라일. 이 세 나라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구가 있다고 해요.”
“호오?”
“세 나라는 분명 약소국이지만, 그 세 개의 무구로 힘을 합쳐 연합이란 형식으로 지금까지 자신들의 나라를 지켰다고 합니다.”
루르시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마틴 왕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왕의 검 역시 왕궁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진짜 왕만이 그 검을 차지할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죠.”
“그렇다면 지금 그 검은 현재 루르시아의 아버지이신 안토르 왕이 가지고 있겠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얼레?”
“이 왕국을 세웠던 위대한 개척자라 불리던 건국 왕으로부터 내려오던 그 검이 언제부터였는지 잠들어 버렸다고 해요. 지금은 그저 왕실을 대표하는 명예로서의 검으로 잠들어 있지만 말이죠.”
“사실일지 거짓일지 모르는 전설에 기대어 왕위를 차지해 보겠다는 거야? 그건 꽤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전설에 기대는 것이 아니에요. 전설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도 자신의 약혼자도 분명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루르시아라는 바람을 막아 줄 병풍이 없다면 그들은 분명 쓰러지고 말 테니까.
“…….”
“……훗.”
그렇게 적막하고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난 살며시 웃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으니까.
“이만 갈까?”
“으응, 네.”
“남들보단 조금 다른 길을 걷고는 있겠지만 힘내. 그게 또 게임의 묘미니까.”
조금 전 그를 NPC라 잘못 보았던 바실리아는 미안한 듯 떠나기 전 루르시아에게 사과를 하였다.
“후후, 고마워요.”
어려 보이는 소년의 어깨엔 생각보다 많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것이 비록 게임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NPC의 사랑일지라도 말이다.
“하아…… 꽤나 머리 아프겠다.”
“그러게요.”
“나라면 저렇게 게임을 하라면 못할 거야.”
“으음.”
루르시아의 저택을 나서며 바실리아가 먼저 팔짱을 끼며 우리에게 말하였다.
“왕위 쟁탈이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선 우리가 더 즐겁게 게임을 하는 것 같죠?”
“그렇지. 적어도 우린 자유롭잖아.”
그렇게 속박되어 있는 루르시아가 단순히 힘들겠다는 것을 끝으로, 우린 루르시아와 유피아를 남기고 여독을 풀기 위해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시원한 맥주 넷!”
“아뇨. 맥주 셋하고 과일주 주세요.”
“에엑? 저도 맥주요!”
“어린애에겐 아직 맥주는 사치야. 게다가 어차피 마실 수도 없잖아. 신상 정보 인증이 끝났으면.”
“으으…… 너무해.”
“하하, 스완은 좀 더 크고 나서 마셔라.”
그렇게 기분 좋게 톡 쏘는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있을 때였다.
“요즘 분위기가 이상하지?”
“그러게.”
“뭔 일이라도 일어나려나.”
“……?”
주점의 한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묘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루르시아 왕자가 확실히 능력은 좋지만, 임페노스 왕자는 제 1황태자잖아? 그래도 왕위는 장남이 물려받아야 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루르시아 왕자의 능력도 대단하던걸? 어린 나이에 벌써 소드 오라를 뿜어낼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다면서?”
“헤?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지. 창녀인 제 어미가 어떻게 왕을 꼬여서 얻게 된 지휘인데.”
“허허, 자네. 누가 듣겠네.”
“뭐 어때. 어차피 왕위는 임페노스 왕자가 얻을 텐데. 그런 헤픈 여자의 아들에게 설마 안토르 왕이 왕위를 물려주겠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거의 대부분 임페노스와 루르시아에 대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요즘 임페노스 왕자가 벼르고 있다고 하던걸. 나머지 왕자들이야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니까. 분명 조만간에 뭔가 크게 터뜨릴 것 같단 말이야.”
“으흠…….”
주점 안의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실리아가 한 모금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루르시아 녀석, 꽤나 힘들겠는걸.”
“어려울수록 성취감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 녀석은 쉽게 포기할 사람은 아니었어요.”
“음?”
“적어도 그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리지만 다부지고 확고한 눈빛이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느낌이었기에 난 그렇게 믿었다.
“뭐, 우리야 하룻밤 자고 나면 떠날 사람들이니까요.”
“하긴, 그렇지.”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오오! 맛있어 보이는데?!”
타국에서 맞이하는 이국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 군침이 돌게 하는 음식들이 식탁 가득 채워지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식사를 했다. 정말 아무런 생각하지 않은 즐거운 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코…….
그날 밤, 우리는 카마틴 왕국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9장. 왕들의 왕(King Of Kings)
“불이다!! 불이야!!”
“마법사들은! 아직인가?”
“어서! 어서!! 불을!!”
“그만. 지금부터 이곳은 통제 구역으로 정해집니다.”
“에? 하, 하지만.”
광장 안까지 검은 연기가 뒤덮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출동한 사람은 컨스터블(Constable: 시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후작 잭슨 경이었다.
“임페노스 왕자님의 명입니다.”
“하오나 저곳은!”
“왕명에 거역하시는 것입니까?”
“……!!”
자신을 막은 근위병의 한마디에 잭슨 경의 두 눈이 커졌다.
“왕명이라 하셨소?”
“이제 곧 그리되실 것이니까요.”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대답. 그것은 이미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무얼 말이오?”
“현재 카마틴 수도에 상주하고 있는 상비군의 전력은 약 2천 명. 보병과 궁수로 되어 있는 군대는 꽤 강력한 전력임이 틀림없지요.”
“그렇소만?”
“현재 상비군의 사령관인 잭슨 경만이 여전히 중립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크음!”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근위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수도를 방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이오나 그 주인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요. 임페노스 왕자님께서는 조만간에 좋은 뜻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고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잭슨은 그의 말에 살짝 이를 갈며 말했다.
“조만간에 뜻을 전하지요. 모두 물러간다!”
“하, 하지만!”
부사령관으로 있는 자신의 부하가 잭슨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지만, 판단이 빠른 잭슨은 지금 더 이상 나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평온한 밤 되길 바랍니다.”
화염이 솟구쳐 오르는 이 밤이 과연 평온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불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사람 역시 이 밤에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