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41화
“그…… 루르시아라고 했었나? 그 사람이 이 나라 왕자라면서? 왕자를 만나려면 왕궁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냐?”
“그건…….”
“하긴, 이곳에 온 것까지 숨겼으니까. 그렇게 당당히 왕궁으로 들어갈 순 없겠지.”
유피아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따로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는 거야?”
“갈 곳이 한 곳 있긴 한데요…….”
“어디지? 말해주면 그곳까지 태워줄 테니까.”
“저기 언덕이요! 거기로 마차를 몰아주세요.”
“으음, 그래.”
조심스럽게 생각하던 유피아가 가리킨 곳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이었다.
“흐음, 저 집인가?”
북적거리던 광장을 벗어나 한적한 언덕 위에 당도하자, 그곳엔 커다란 저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면 되겠어?”
“네,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보답은 무슨. 어차피 우리도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건데. 그보다 왕자를 만나러 왔다면서 여기는…….”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저택은 멀리서 보았을 땐 무척이나 근사해 보였다. 그러나 점차 가까워질수록 그곳은 저택이라기보다 오히려 흉가에 가까워 보였다.
“손질을 하면 꽤 멋있을 것 같은 집이지만, 여기에 누가 살고는 있는 거야?”
“그, 그럼요.”
녹음이 푸르른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벽을 타고 자란 덩굴들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유피아, 네가 만나려는 왕자와 관련된 집이니?”
“너, 너무 많이 묻지 마세요!”
우리의 질문에 그녀는 괜히 화를 내버렸다. 뭔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건가?
“루루…… 루르시아 왕자님의 어머님 댁이니까요.”
“음?”
“여기가?”
“설마…….”
우리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유피아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언젠가 틴타겔에 오시면 꼭 보답해 드릴게요. 지금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네요.”
“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유피아. 그럼 우린 가볼 테니까.”
“감사했어요.”
한 나라의 왕녀라기보다는 우리의 눈엔 그저 어린 소녀로만 보였다. 그런 소녀가 국경을 넘어 다른 왕국까지 왔다니……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 이상 우리가 관여할 일은 없었다.
“어머, 누구시죠?”
저택에 덩그러니 서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새하얀 은빛의 머리카락. 그것이 본래의 색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온화하지만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어머님!!”
“음? 유피아?”
한 아름 꽃을 따서 걸어오던 그녀는 유피아를 보며 놀란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서 네가?”
“보고 싶어서요.”
“하지만…….”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그 어떠한 나라의 왕녀가 이렇게 단신으로 타국에 올 수 있겠는가. 그녀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분들은? 일행이시니?”
“아, 제가 위험할 때 도와주신 분들이세요. 그리고 절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고요.”
“고마우신 분들이시군요.”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꽃을 정리하고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 역시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어린 유피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행동에 오히려 우리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 들어가시지 않겠습니까?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옳을 것 같네요.”
“아뇨, 그러실 것까지야.”
“마침 좋은 허브를 따 왔답니다. 차를 끓이면 향긋할 거예요.”
싱긋 웃는 그녀를 거부할 도리가 없어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집사는요?”
“날씨도 덥고 해서 며칠 휴가를 주었단다. 유피아도 알다시피 그는 꽤 오랫동안 우리를 보살펴 주었잖니.”
“그래서 정원이 이 모양이었군요.”
“호호, 미안. 돌봐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지저분해 보였구나.”
“아, 아니에요!”
미안한 듯 웃는 그녀 때문에 유피아는 도리어 미안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맛있는 차를 끓여 올게요.”
저택 안은 바깥의 휑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늑한 분위기였다. 깔끔하게 정돈도 잘 되어 있었고 말이다. 물론 조금 아니, 많이 낡았다는 점만 뺀다면.
“저…….”
“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이곳의 주인이시긴 하신 겁니까?”
“형!”
“아스테온.”
내 물음에 스완과 슈가비가 깜짝 놀란 듯 나를 불렀다.
“꽤 넓은 저택인데…….”
“부끄럽지만 제가 이곳의 주인이랍니다. 그리고 그렇다 할 시종도 시녀도 없지요. 그저 오랜 집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 뿐이랍니다.”
“유피아 공주님과의 관계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이곳 카마틴 왕국 제 5황태자 루르시아 왕자의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어, 어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예의 있게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뒤를 유피아가 따랐다.
“왕자의 어머니란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요.”
뒤돌아선 그녀에게 조용히 나의 말을 전했다.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는 듯싶었지만, 이내 곧 그녀는 부엌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 왜 괜한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맞아, 아스테온.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잖아.”
“그냥 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바로 들어오는 구박이었지만, 난 소파의 팔걸이에 살짝 기대며 생각했다.
“이상하지 않아?”
“네?”
“왕자의 엄마라면 왕비일 거 아냐. 물론, 한 나라의 왕비가 한 사람이 아닐 순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왕비란 사람이 왕궁이 아닌 이런 외딴곳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으음…….”
“듣고 보니 또 그러네요.”
“별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저택을 가꿀 일꾼들과 저택을 지킬 병사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럼 어떤 이유일까요? 이런 곳에서 사는 건…….”
난 여전히 턱을 기댄 채 슈가비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뭐,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왕과 왕비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왕과 왕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 이래저래 피해를 보는 것도 그것을 감수해 내는 것도 어머니란 존재니까.”
“으음…….”
“훗, 아닐 수도 있고 말이야.”
“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말하고도 조금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이 어머니란 존재라니…… 바로 나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저 보편화된 진실을 말한 것뿐이니까.’
내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피해자는 아버지였으니까 말이다.
“늦었네요. 자, 드셔 보세요. 향긋할 거예요”
찻잔 가득 피어오르는 향기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끼이익…….
차를 한 모금 입안 가득 품고 향을 느끼고 있을 때, 조용했던 저택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음?”
“누구?”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짧은 검은색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수수하지만 푸른색의 문양이 그려진 제복과도 같은 옷은 무언가 절도 있어 보였다.
“누구십니까, 이분들은?”
“루루!!”
“으악!”
순간 총알처럼 튀어 나간 유피아가 그대로 그 소년을 와락 껴안았다!
“유, 유피아?”
“흐아아앙! 루루!”
유피아의 급습에 소년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자신에게 달려든 그녀를 보며 놀란 듯 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왜?”
“보고 싶어서 왔지! 아버지도 오빠도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하고…….”
“하지만…….”
그녀를 달래며 일어선 소년은 어림잡아 열여덟 정도로 보였다.
“아! 그리고 이분들은 절 도와주신 분들이세요.”
“아스테온이라고 합니다. 오는 길에 유피에 왕녀님께서 습격을 당하셔서…… 본의 아니게 이곳에 모시고 왔습니다.”
“네? 습격이라고요?”
“정체 모를 사람들이 와서는…… 위험했어. 루루.”
“그러게 왜 몰래 여기에 온 거야!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흐앙……!”
화를 내는 루르시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는 바지만, 유피아는 그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훌쩍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울지 마요. 유피아.”
슈가비가 그녀를 다독이며 루르시아를 쏘아보며 말했다.
“심한 것 아니에요? 당신을 보러 이렇게 힘들게 온 거잖아요.”
“제 3자는 빠져 주시죠.”
“뭐, 뭐라고요?”
“이건 우리 일입니다. 유피아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돈을 받자고 도와준 줄 아세요!”
그의 설전에 슈가비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왕가의 일에 그렇게 간섭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네?”
“이건 국가 간의 일. 카마틴 왕국과 틴타겔 왕국 간의 문제입니다. 왕실의 인원이라면 모를까, 여행자 분들에게까지 관섭을 받을 정도로 저희 왕가는 허술하지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맞아, 슈가비. 이건 루르시아 왕자와 유피아 왕녀의 문제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스테온!”
“그보다 사례는 톡톡히 한다고 했는데, 황태자님이라면 능력도 대단하시겠지?”
루르시아가 날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이 어울리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긴, 어머니를 이런 곳에 방치해 둔 왕자라면 별 볼 일 없으려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지나가는 여행자의 헛소리였으니까요.”
“꽤나 무례하시군요. 유피아를 도와준 것은 감사하나 정확히 따지면 그 보답은 틴타겔 왕국에서 받아야 할 것. 카마틴 왕국은 아무런 은혜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죠.”
“틴타겔 왕국의 유피아 공주가 무사히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카마틴 왕국으로서는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세상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법이니까요.”
“…….”
NPC치고는 꽤나 험한 말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난 그의 말에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약혼자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유피아, 당신도 꽤나 힘든 사랑을 하고 있을 것 같군.”
“네?”
“그리고 당신네 어머니도 말이야.”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왠지 가만히 있으려니 화가 나는 바람에 난 괜히 스완을 끄집어내면서 말했다.
“가자, 스완.”
“네?”
“더 이상 있어 봐야 할 것도 없잖아. 우린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네, 네!”
그렇게 한산하고 조용했던 저택에 소란을 남긴 채 우리가 돌아가려 했다.
“어려 보이는데 뭐 저리 사나워 보이냐. 우리 어릴 땐…….”
“쉿! 듣겠어요!”
“들어 봐야 뭐 어때. NPC잖아.”
눈치 없는 바실리아의 한마디에 슈가비가 핀잔을 주듯 검지를 펴 입에 붙이며 눈치를 주었다.
“잠깐!”
“…….”
“유피아, 어머니를 데리고 잠시 방에 가 있어.”
“네?”
“어서.”
“네, 네! 어머니.”
유피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불안한 얼굴로 영접실을 나서자, 루르시아가 나를 보며 손짓했다.
“뭐라 따지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으음.”
“그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
“처음이거든요. 이렇게 플레이어와 이야기하는 것은. 뭐, 좋은 상황에서 만난 것은 아니지만 굳이 화를 낼 필요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에?”
루르시아의 말에 나 역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