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얼 레전드 32화
4장. 곡해의 동굴 속에서
“여기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어두컴컴했던 동굴의 외길을 지나 우리는 겨우 곡해의 동굴 안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길, 끈적거려.”
하피의 여왕 데너레스를 무찌르고 난 뒤 동굴 안을 헤매며 우리는 숱한 몬스터들을 잡았다. 끝으로 몇 십 마리가 링크되어 떼로 움직이는 거대 거미를 잡고 난 뒤 온몸에 점액질을 가득 뒤집어쓰고서야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게 다행일지도 모르죠.”
“후훗, 그러게요.”
동굴의 끝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입구의 동굴과는 사뭇 다른 정돈된 제단과 보랏빛 등이 곳곳에 신비로운 불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조금 쉴까요?”
이미 체력도 마나도 고갈이 된 상태였다. 슈가비는 내 말에 주저앉다시피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아?”
“후우, 너무 힘들어요.”
스완이 사람들에게 포션을 나누어 주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포션은 주머니 속에 오랜 시간 들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차가웠다.
“크, 시원하다.”
차가운 포션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조금씩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저 아래에 보이는 게 뭘까요?”
곡해의 동굴의 지하 깊은 곳에 마련된 의문의 제단. 아마도 그것은 칙서에 적혀 있던 마쿰바교와 관련된 것일 것이다.
“무슨 의식을 위한 제단일까?”
“또 저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단단히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으음.”
제단의 입구는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한층 아래에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론 아무 인적이 없는 제단에 불과했지만, 내려갔을 때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난 뒤 난 다시 검을 뽑았다. 훈다르트의 빙결의 검은 수많은 몬스터를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스완과 바실리아, 슈가비는 각기 자신의 활과 보주 그리고 지팡이를 꽉 쥐었다.
쿵!
꽤 높은 높이였기에 떨어지는 순간 동굴을 울리는 큰 소리가 생겼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나도 조용한 그곳에서의 소리는 뭔가 이질적이었다.
“으악!”
뒤따라 내리던 스완이 헛디뎌 미끄러졌는지 굴러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던 스완이 제단의 앞에서 겨우 멈추었다.
“괜찮아?”
“아이고…… 네.”
아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스완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에?”
싱긋 웃던 스완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시선에 보이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서서히 이마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좀 내가 보이는가?”
“스완!!”
“으아아악!!”
고통에 신음하는 스완의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이마에서 서서히 내려온 그것은 커다란 다섯 개의 손가락.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거대한 손의 주인공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주인의 허락도 없는 집에 들어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하등한 너희들은 그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스완의 주위에 안개가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실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도르한은 어디 갔지?”
“도르한……?”
“나의 무덤을 관리하던 녀석 말이다.”
“그런 녀석은 보지도 못했어!”
“그 녀석이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울 때 스스로 꽤나 입지가 있는 존재라고 하던데…… 흥, 허풍이었나?”
그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 아니 오히려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수년간 나의 무덤을 지켜 온 녀석인지라 마땅한 보상은 해 주려 했거늘.”
그는 스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적어도 녀석의 심장만큼은 내가 손수 끄집어내어 먹어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 대신, 너희 불청객의 것이라도 먹어 줄까?”
“이 자식……!! 스완을 놔 줘!!”
그의 손은 스완의 머리를 모두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도대체 저런 녀석이 어디서 숨어 있었던 것이지?!
“이 친구의 이름이 스완인가?”
작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두 개의 뿔이 그의 이마에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보랏빛 피부는 요사스러움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가거라.”
“앗!”
그대로 집어던져 버린 스완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스완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구부렸다.
“스완!!”
“괜찮으세요?”
슈가비가 달려가 그에게 회복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고통으로도 아파하다니 연약하구나.”
그는 스완을 보며 실망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서서히 일어서는 그는 우리의 두 배는 될 정도의 거대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나 악마 아크라스의 단잠을 깨운 너희들에게 죽음을 선사해 주마. 500년 만의 첫 제물이 된 것을 기쁘게 여겨라.”
박쥐의 그것과 같은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펴졌다. 조용하기만 했던 제단은 그저 함정에 불과했던 것일까?
“위험해!!”
“악시아 프리즈 네메스!”
아크라스의 입에서 악마의 룬어가 흘러나왔다. 그의 두 손에 검은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슈가비!”
“디바인 실드(Diven Shield)!!”
“실드(Shield)!!”
신성 마법 디바인 실드와 4대 계통 마법인 실드의 이중 보호 마법이 펼쳐졌다.
“훗.”
그러나 그 단단해 보이던 두 개의 마법이 아크라스의 검은 갈퀴와 맞닿는 순간, 너무나도 쉽게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콰앙……!!
“크악!!”
“아아악!!”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그러한 고통이 우리를 엄습해 왔다. 슈가비는 그 충격에 쓰러진 듯 동굴의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클클…… 제아무리 신성 마법이라 해도 그 크기에 있어서 압도가 된다면 상성이란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법. 그래도 저 사제의 노력은 가상하구나. 분산되는 마법의 대미지를 자신 혼자 감당했으니 말이야.”
아크라스는 재미있다는 듯 우리를 향해 말했다. 나 역시 강한 고통에 몸이 저릴 지경인데, 우리를 위해 대미지를 모두 흡수한 슈가비는 얼마나 큰 아픔을 감당했다는 것일까?
“하지만 너희를 지켜 준 신의 방패는 그 한 번이 마지막이었다.”
“으아아!!”
비웃는 듯한 아크라스의 말에 난 두 손으로 빙결의 검을 쥐었다.
“호오?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구나.”
“죽여 버리겠어!!”
나의 검에 새하얀 서리가 맺혔다. 순식간에 몰려오는 피로감이 나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물러설 수 없었다.
“푸르디푸른 빙결의 화염이여!”
두 손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나의 검을 휘감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격류된 마나의 응집이 터질 듯 모이기 시작했다.
“라그나 인페르노(Ragna-Inferno)!!”
나의 궁극기(窮極技)인 푸른 불꽃의 기둥이 아크라스의 발밑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콰아앙!!
강렬한 폭발과 함께 동굴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힘이 아크라스를 덮쳤다.
“크아아!!”
그 여파를 이용한 난 그대로 아크라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두 손으로 거꾸로 검을 내리 잡은 나는 아크라스의 머리를 향해 검을 찍어 눌렀다.
치이잉!!
“으윽!”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다른 소리다.
무언가에 밀려 나의 검은 아크라스에게 다가가기 전에 멈추고 말았다.
“꽤나 재미있는 것을 쓰는군. 인간이여.”
“……!!”
“제아무리 강맹한 힘이라 할지라도 닿지 못하면 부질없는 것.”
아크라스는 지루한 듯 하품을 하는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너의 검은 나에게 닿지 않는구나.”
촤앙!!
아크라스의 다섯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갈퀴가 솟아나왔다.
“크아아!!”
“위험해!!”
바실리아의 외침을 들으며 난 검을 들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나를 압박해 오는 그의 검은 갈퀴가 빙결의 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 자식!!”
바실리아가 표범의 보주를 들었다. 검은 표범으로 변신한 그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으르렁거리며 아크라스에게 달려들었다.
“드루이드인가. 하긴, 하등한 인간이나 미천한 짐승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을…….”
마치 바람과 같은 빠르기로 사라진 바실리아였지만, 아크라스는 너무나도 쉽게 그를 붙잡아 버렸다.
“케엥!”
동물의 울음소리인지 신음 소린지 모를 괴상한 소리가 표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목을 사정없이 쥐어 짜내듯 잡은 아크라스는 바실리아를 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500년 만에 맞이하는 인간들이 고작 이런 녀석들이라니…… 지루했던 나의 흥을 오히려 더 사그라지게 만드는구나. 이제 끝이다!”
아크라스의 몸이 점점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불꽃처럼 그의 몸 전체에서 붉은 오라가 솟구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그의 손에서 거대한 화염의 구가 만들어졌다.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한 그의 화염이 나와 슈가비를 향해 쏘아졌다.
“흐아아!!”
그러나 나의 검이 그의 화염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차가운 서리가 지나가면서 나의 머리와 발 아래로 불꽃이 부서지듯 터졌다.
“잘난 척은 그만 해라.”
“호오! 잘난 척?”
아크라스가 웃으면서 나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목이 졸려 힘이 빠진 바실리아였다.
“오빠!”
슈가비가 그를 향해 뛰어갔지만, 바실리아는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군. 보잘것없는 너의 동류들은 고작 내 한 주먹감도 되지 않았어.”
아크라스가 나를 가리켰다.
“이것은 잘난 척도 그 어떠한 우월감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닌, 오로지 바른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차이라는 거대한 무언가를 말이야.”
“닥쳐!!”
네 녀석이 강하다는 것은 지금도 충분히 느끼고 있고 인정한단 말이야.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실실 비웃는 듯한 네 녀석의 얼굴…… 그 얼굴……!
“이제야 알겠군. 너를 보는 순간 울컥했던 기분 나쁜 이유가.”
“뭐?”
“네 녀석의 그 비웃는 얼굴…… 그 녀석들을 떠올리게 만들거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공포에 미쳐서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인가?”
아크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블링크!”
내 모습이 사라졌다. 처음 목표는 그의 등 뒤였다.
“흥!”
그러나 아크라스 역시 내 움직임을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은 그저 그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블링크!!”
두 번째 블링크가 시전되면서 나의 시야가 흐려졌다. 순간 공간과 나의 몸이 분리되는 것을 느끼며 나의 몸이 아크라스의 위, 허공에 떠 있음을 알았다.
“날파리 같은 녀석!!”
아크라스의 보랏빛 안광이 나를 바라보았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그의 눈빛.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녀석의 약점은 목 뒤에 있는 붉은 보석입니다!!”
누구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한번 마법을 시전했다.
“블링크!!”
공중에서 시전하는 것이라 완벽하다 할 수 없었지만, 나의 몸이 사라지는 순간 그 자리를 아크라스의 날카로운 갈퀴가 지나가며 바람을 만들어냈다.
“잡았다.”
들려오던 목소리의 말처럼 아크라스의 목 뒤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마치 척추와 같이 뻗어 나온 그것을 보며 나는 검을 돌려 쥐었다.
“흐아압!!”
나의 검이 아크라스의 뒷덜미에 박히려 하는 순간이었다.
“스타 써클(Star Circle)!!”
빙루(氷淚)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검술. 지면에 검을 박아 넣음으로서 그 파동으로 주변을 가격하는 범위 공격이었지만, 이것을 처음 시전하는 것이 악마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크아아아……!!”
“성공인가?!”
나의 검이 녀석의 보석을 깨뜨리는 순간, 아크라스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괴로워했다.
“네, 네, 네 녀석……!! 도르한……!!”
나에게 소리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겁을 먹은 듯 부르르 떨며 아크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악마!! 네 녀석을 죽이기 위해 수년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제야말로 널 죽일 수 있게 되는구나!!”
“도르한…… 네 녀석이 감히!”
“크하하하!!”
아크라스의 피부처럼 보랏빛의 로브를 입은 한 남성이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