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93화 (93/100)

로아도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제목      최종장 퍼스트       3

아르시엘 공주는 앉아 있었다. 무투회에 앞서 황족들을 위해 마련된 개인 별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가 모든 이들을 물린 까닭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모든 일정 또한 뒤로 물리고. 그저 테이블에 조용히 홀로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일은 없다.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말릴 정도로 힘껏 살아온 그녀다. 그런 그녀가, 힘없이 앉아 있다. 그녀는 하얀 장갑을 벗고, 자신의 손 을 매만진다. 벌써   10여년이나 된 오랜 습관이다.

“로아도르. 반.바이파.”

너무나 오랜만에 입에 담아 보는 이름이다. 아무런 감흥이 일지도 않 는다. 이미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저 현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그 사람과 같은 장소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그저, 너무 오랜만이기에, 그리고 추억의 사람이 나타났기에 한순간 감정적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설 령 그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그리 큰 일이란 말인가? 그가 돌아온다고 크게 변하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딘가 공허한 마음이 들면서도, 또 반대로 그 공허한 마음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별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신은 여전히 들지 않는 다.

“무슨 일이 있니?”

걱정스럽게 물어 오는 낯익은 목소리. 그녀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언니의 목소리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루리아 공주를 바라 본다.

“혹시, 어딘가 몸이 아픈 거라면...

“그런 거 아니야.”

어딘지 모르게 쉰 목소리가 나온다. 아르시엘은 여전히 아름다운 언 니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언니와 혼약이 오가던 사이였다. 형부가 없 었더라면. 아니지. 그는 마나 부적응자. 지금쯤이면 언니는 미망인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떻게 살아 있는 것 일까?

생각에 생각이 연신 이어진다. 그녀는 루리아 공주에게 묻는다.

“언니. 에틴경, 기억하고 있어?”

루리아 공주는 너무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에 순간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이윽고. 에틴이라는 이름에 언제나 자신을 꾸짖는 눈길 로 바라보던 한 소년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르시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그 사람. 살아 있었어.”

“그,그게 정말이니?”

“응.

그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바이파 공작가에서 그의 죽음을 선포했을 때,루리아 공주조차 그토록 귀족다운 이가 사라졌음에 안타까움을 느 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는 것과 아르시엘이 이러고 있는 것과 무슨 연 관이 있는 것일까?

“나,어떻게 하면 좋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데 그 사람, 10년 전 과 마찬가지로, 가르안, 형부의 등을 바라보면서 달리고 있었어. 정말 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동안, 아르시엘은 많은 것을 보고 겪었다. 늙은 귀족을 향해 웃음 을 판 적도 있고, 자신의 공주라는 지위와 미모로 젊은 귀족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던 적도 있다. 그래왔던 아르시엘이다. 재기발랄했던 소녀는 이미 없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실을 이끌어 나가려던 공주로 변해있다. 철이 없다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그 한마디에 루리아 공주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이미, 한참이나 적령기를 지난 동생이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설마 이런 것이었나. 본선에 오르는 네 명의 자리까지, 이제 마지막 한 시합. 수많은 관중 들이 모여 있다. 괴력의 검사로서 알려진 로아도르. 그 어마어마한 힘 으로 모든 시합을 일격에 끝낸 자. 소문이 돌아 그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상대 또한 보통의 전사는 아니었 다.

“바르혼이다.

눈가에 큼직한 상처가 나 있는 용병이 무뚝뚝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 힌다. 잘 단련된 커다란 덩치에 비해 차고 있는 롱소드가 외소하게 느 껴질 정도다.

바르혼. 로아도르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한의 정보에 의하면 용병계 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실력자라 한다. 대마왕과의 전쟁에서도 수많 은 데몬을 벤 자. 로아도르가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기백이 느껴진다.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로아도르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대와 데이드리함경의 시합을 봤다. 무척 강한 남자더군. 어째서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에게도 그런 모욕이 통하리라고 생각지 않는 게 좋다”

그의 말에 로아도르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아마, 바르혼은 자신이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자신을 높게 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는데.

“시작!

시합의 개시를 외치자 바르혼은 검을 뽑아 로아도르에게 겨눈다. 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자는 데이드리함과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차분히, 바르혼은 자신의 롱소드를 습관처럼 손목으로 돌리며 로아도 르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

로아도르 역시 그를 향해 거검을 들어 올리며 경계한다. 먼저 일격을 가한 것은 바르혼.

“핫!

짧은 기합과 함께 그는 빠른 속도로 천변기가 둘러져 있는 로아도르 의 어깨를 향해 찔러나간다.

마나를 다루는 것은 데이드리함보다 뒤쳐질지 모르나, 바르혼의 실 력이 훨씬 더 실전적이다. 마치 에스토크같이 날카로운 마나다. 부우웅!

로아도르는 손목을 돌려 그를 향해 검을 내려친다. 거검이라는 병기 는 느릴지언정, 그 반경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로아도르의 속 도는 결코 느리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는 예측했다는 듯, 바르혼은 찔러 들어가던 자세를 옆 으로 바꾸어, 재빨리 로아도르의 검을 발판 삼아 발을 내딛어 하늘로 뛰어 오른다.

콰앙!

멈추지 못한 거검은 땅을 향해 내려쳐지고, 연무장의 돌바닥이 분수 처럼 깨져 오른다. 좀 전에 보긴 했지만 직접 격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로아도르의 그 엄청난 힘에 바르혼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 낀다.

하지만 그는 전장에서 단련된 오히려 기회라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로아도르의 어깨를 향해 찔러간다. 공중에서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 큼 날카로운 일격이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겠지만 바르혼도 로아도르에게 한대를 뽑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만약, 로아도르가 순수한 검사였다면.

파라락!

로아도르는 한손을 검에서 놓고 천변기를 휘둘러 그의 공격을 막는 다. 뭔가 싶으면서도, 확실히 이겼다는 느낌에 바르혼은 히죽 웃는 다.

고작해야 망토 따위!

파악!

그러나, 그 망토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바르혼은 믿기지 않는 다 는 듯 눈을 크게 뜬다. 분명 천의 느낌인데, 어째서 저 천을 가르지 못하는 것인가?

-뭔가 이건    -

마찬가지로 천변기의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로아도르의 뇌리에 울 린다. 그러나 로아도르는 대꾸해줄 세가 없다. 그의 절대 예지가 이미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변기로 그의 검을 걷어내자 흉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그때까지도 바르혼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 르고 있었다.

파악!

그리고 로아도르는 몸을 꺾어, 팔꿈치로 그의 흉부를 쳐내기 전, 그 제서야 지금 자신이 어떤 공격을 하고 있는지                 ‘머리  로 깨닫는다. 그러 나,그런 순간임에도 로아도르는 당황하지 않는다. 절대 예지의 컨트롤까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 단계인 것이다.

“쿠허헉!!”

일격을 당한 바르혼은 침을 토하며 연무장의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다.

로아도르의 힘이라면 단번에 그의 가슴을 터져나가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마 생명까지 뺏을 수는 없기에 마지막에 힘을 뺐다. 그래도 아마 뼈가 서너 군대는 부러져 나갔을 터. 제대로 일어나기 힘들 것이 다.

로아도르는 천변기를 단정히 정리하고는, 그를 향해 예를 표하고 빙 글 돌아선다.

마지막 예선조차 순식간에 통과해버린 로아도르. 그를 보기 위해 온 관중들의 환호성이 인다.

“와아아아!

“이번에도 일격이다”

“최고다!”

실은 이격에 가깝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일격이었을 터. 그들의 환호에 보통이라면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주었겠지만 로아도르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곧 있으면, 저들의 환호는 야유와 비탄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누구보 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저들의 영웅을 이기기 위해 온 자이기 때문이다.

“잠깐!

무대를 내려가려는 찰나, 바르혼이 부르는 소리에 로아도르는 걸음 을 멈춘다. 진행하는 이의 부축을 받으며 상체를 일으킨 바르혼은 그를 향해 비통한 목소리로 외친다.

“어째서,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나!내가, 이 바르혼이 그렇게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우습다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훌륭했다.

“사람을 잘못 본 건 바르혼. 그대인 것 같군. 짤막하게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로아도르. 그저,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분명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르혼에게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그에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 크으윽.”

로아도르는 뒤에서 들리는 바르혼의 분한 듯 한 신음소리가, 자신의 등에 매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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