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88화 (88/100)

제목      제  13장 귀환자     7

쏴아아아아아!!!

“음.비가 오는가”

제법 운치가 있군. 홀로 그렇게 생각하며 가르안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름다운 아내들과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것.매우 좋다. 행복에 겨워서 과분할 정도다. 그러나, 어딘가 가슴속 작은 곳에서 가르안인지, 엘 카이자인지, 검 의 신인지,

그도 아니면 강성훈인지.

누군가가 묻고 있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하고 묻고 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지금의 상황 은 너무나 좋고 행복하다.

문제는.

그래, 만족감이랄까?그런 쪽인 듯 하다. 대마왕을 이기기 전까지는 충실하게 살아온 것 같다. 그런데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 아무것도 남 지 않았다. 아니, 불안하지 않은 행복은 얻었지. 이대로 행복하게 지내 는 것도 좋다. 아니, 반드시 이 상태로 행복하게 지낼 테다. 이것은 세 상 누구에게도 양보 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그 어떤 목표가 손 안에서 사라져 버린 느 낌이었다. 무언가를 바라보며 힘껏 달려가던 그 느낌이 없다. 그것은 무언가, 지금의 행복과는 방향이 다른 것 같은데. 사락.

등 뒤에서 기분 좋은 향기와 흘러나오며, 루리아 공주가 남편의 등에 가볍게 매달린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나 행복해서 이런 생각도 드나보군.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루리아를 살포시 안는 가르안. 마치 마약과도 같은 행복함이 그를 가득 채운다.

쏴아아아아아.

로아도르는 차분히 걸어가고 있다. 옷이 빗물로 가득 젖고, 가죽의 부츠는 물로 가득 차서 질퍽거리고 있지만 상관없다. 이런 일 따위는 오래전에 익숙해 졌다. 그런 것보다는,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느라 바 빴다.

“아!갑자기 웬 비야!”

“빨리!빨리!”

사람들이 하나 둘씩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가게들들 역시 진열 해 둔 물건들을 안으로 들이기 바쁘다. 어수선하면서도 거리는 서서히, 서서히 인적이 드물어지고 있다.

쏴아아아아아.

이 거리는 너무나 낯이 익다. 지나가는 곳마다, 로아도르의 머릿속에 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공작저에서 이어지는 길은 이 곳 뿐이었 으니. 생각이 나지 않을 라야 않을 수가 없다. 쏴아아아아아.

저 곳에는 평민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저 쯤인가?그래, 저곳에는 주점이 있었을 터이다. 마차를 타고 갈 때 시끄러운 노래 소리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내다보았던 기억이 있 다.

저기에는 제법 커다란 우물가가 있어서, 머리에 물을 긴 여인들이 많 던 곳이었다.

그렇다. 자신은 이 길을 지나 아카데미에 갔었고. 그곳에서 가르안을 만났다.

그리고 이 곳을 지난다면.

“아.......

로아도르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온다. 어떻게, 어떻게 저리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지. 그가 살던 곳은 아직도 이리 웅장하단 말인지. 덩 굴로 정성스럽게 감싸인 벽을 바라보며 로아도르는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철창으로 이루어진 문 앞에 서서. 공작가를 올려다본다.

저기서, 그 어렸던 소년은 나무 검을 들고 시종의 아이들과 함께 용 사놀이를 했었고. 저기 저 나무 아래에서는 자신의 아리따운 누이, 에 리지에가 차를 마시며 자신을 응원했었고. 저택이 저 쪽에서는 어머니 가 인자하게 웃고 있었고. 저 위의 서재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 고 있었지.

그러고 저 쪽의 저 방. 로아도르가 쓰던 저 방에는. 한 남자가 꼴사납게 벽을 타고 넘어 들어 왔었다. 아아. 비가 와서 다행이다.

세상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으니.

“어이 거기!무슨 일이냐?!”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로아도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 다.바이파 가문의 사병인 듯. 한 병사가 창을 비스듬히 내리며 경계하 듯 로아도르를 노려보고 있다.

아버지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엘리엇이 대신 가주로서 움직이고 있 다고 들었다. 게다가 비가 오고 있음에도 저택을 지키는 이들의 기도는 날카롭다.

괜찮구나. 바이파의 이름은 아직 지켜지고 있구나. 벅차오름을 힘껏 누르며, 로아도르는 간신히 대답한다.

“잠깐만. 잠깐만 보고 가겠다.”

“흠?”

공작가의 사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아도르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굉장히 수상한 복장이긴 한데, 너무 수상해서 오히려 의심이 가지 않는 다.

게다가 들어가겠다고 깽판을 부리는 것도 아니오, 그저 저택의 밖에 서 잠시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것을 말릴 권한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 다. 바이파 저택은 황궁을 제외하고는 수도에서 가장 큰 저택 중의 하 나.바깥에서나마 구경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은 안 그래도 많다. 그저, 그 들 중 하나라고 여긴 사병은 피식 웃으며 창을 거둔다.

“핫.수도에는 처음 오나 보지?그래, 이곳이 바로 그 바이파 가문이 저택이라구. 멋지지?”

“그렇군.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왜 하필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날에 온 건가? 맑을 때 다시 오라고. 가끔 저택 내부를 공개할 때도 있으니까. 타이밍만 잘 맞추면 안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순박하게 웃는 사병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로아도르는 고개를 끄 덕이고는 다시 저택을 올려다본다. 사병은 무언가 말을 걸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감격에 겨워하는 로아도르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난다.

그때.

끼익.

저택의 정문 옆의, 작은 쪽문에서 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쏟아지는 비에 투덜투덜 거리며 두터운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자 사병은 히 죽 웃으며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어이구. 집사님. 이제 퇴근 하시는 겁니까?이거 새신랑은 바쁘겠어 요!”

“하하. 그렇지.”

그렇게 웃으며 나오는 남자. 이제   20대 중반 쯤 되었을런지, 병사가 존칭을 쓰며 대우해주는 것과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아서 저택 내에서도 꽤 직위가 있는 듯 하다. 웃으며 나오는 그 남자. 그는 이윽고 로아도르와 마주친다. 저토록 눈에 띠게 서 있으니 보기 싫어도 보였으리라. 처음에는 갸웃거리며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곧 그 남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는 로아도르의 앞으로 다가간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남자가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로아도르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편이 옳으리라. 나이대로 봐서는 새로 온 집사일 테니, 사병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도..도련님?”

그러나 그 한마디에.

남자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로아도르. 차림이 굉장히 깔끔하고 정중함이 몸에 베인 남자.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도련님. 차 드시겠습니까?-

“너는....”

로아도르도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서 그 소 년이, 이렇게 어엿한 집사로 성장해 있다니. 소년, 아니 집사는 얼굴을 붉히며 안으로 뛰어 들어 가려 했다.

“도련님!세상에!빨리 안에 연락을 드..”

“그만둬라.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말투가 나온다. 그에 집사는 본능적으로 움직 임을 멈춘다.

“어,어째서?

“지금의 나에게. 저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집사도 행동을 우뚝 멈추고 그 도련님을 바라본다. 그렇다.

바이파 가문에서의 로아도르 반 바이파는 이미 죽은 자이다.

“하,하지만.”

“그만두라 했다”

이 고집쟁이 도련님은 여전하군. 그리 생각하며 집사는 피식 웃는다.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누구 하나 이겨보겠다 고 무식하게 무거운 갑옷을 풀로 입고 뛰어다니던 그 도련님은 전혀 변 하지 않았다.

“어디 가실 곳이라도?

그런 것 정해두었을 리가 없다. 로아도르가 대답 없이 서 있자, 그 집 사는 품위 있게 손을 사선으로 그어 내리며 허리를 숙인다.

“그렇다면 부족하나마, 제가 모시지요.

“흠?”

사병은 갸웃거리며 사라져가는 두 남자를 바라본다. 대 바이파 가문 의 제   3 집사라면 어지간한 귀족조차도 함부로 못하는 입장인데 저렇 게 정중한 태도라니.

“뭔가, 바이파 가문이랑 관계있는 사람이었나?”

“야,무슨 일이야?”

한 남자가 귀찮다는 듯, 투구 아래로 손을 넣어 북북 긁으며 나온다.

“아,형님, 이 집에 무슨 도련님 있수?”

도련님이라는 말에 고참으로 보이는 사병은 인상을 찌푸리며 오래전 의 기억을 꺼내 올린다.

“도련님이라, 있기야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 그거 근 10년 가까이 된 일인데 무슨 일이지?그리고 그걸 저번 달에 막 들어온 네가 어떻게 알아?”

“아 거, 제  3집사님이 한 남자를 보면서 도련님 도련님 하던데. 제  3 집사님이 전에 모시던 사람인가?”

“뭔 소리야. 그 녀석은 태어났을 때부터 바이파 가문에 있..”

그리고 고참 사병은 퍼득 깨닫는다.

녀석이 도련님이라 부를 사람은 한명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도련님은 그들의 눈앞에서 확실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저 사라졌고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을 뿐이다.

“서,설마? 야 잠깐만 더 있어라”

“에엑?!

뒤에서 그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고참 사병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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