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87화 (87/100)

제목      제  13장 귀환자     6

“흠.

자신의 구렛나릇을 만지작거리며 가르안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 린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제국의 재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이 루어지고 있다. 가르안 자신도 놀라울 정도다. 아마 그는 정치에도 재 능이 있었던 것 같다. 옛날의 귀족 세력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자신은 신이다. 주신을 뵙고 신들의 무력의 대변자, 검의 신으로 인 정받은 가르안인 것이다. 그 정도는 가벼이 넘겨 줄 수 있다. 게다가 옛 날 귀족들의 대표자는 생각만큼 무능한 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 신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상당히 이름을 날렸을 실력자이다.

“엘리엇 반 바이파라 했던가. 흠.바이파....”

나름대로 공명정대하고, 대마왕과 싸울 때의 공도 크다. 이런 상태로 두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가르안은 자신도 모르게 바이파라는 이름을 한 번 더 되뇐 것은 잊어버렸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커다란 검을 들어 올리던 한 소년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자신의 간담을 서늘 하게 했던 소년. 생명의 위협 같은 것이 아닌, 존재성 자체를 위협하던 그 적을 잊어버렸다.

강성훈이라 불리던 존재를 떠올리게 했던 자는 잊어버렸다. 용언의 힘은 절대적. 그를 이기고 잊겠다고 한 것은 잊은 것이다. 가 르안의 머릿속에서 로아도르 반 바이파라는 인물은 이미 오래전에 사 라졌다.

가르안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보던 서류를 훑어본다. 이번에 열 릴 무투회에 관한 것이다. 그가 무투회를 연 것은 자신을 뽐내겠다는 사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마왕과의 싸움으로 지친 대륙을 위로하는 동시에 제국의 국고와 관련된 큰 행사이다. 그때였다. 가르안의 뒤에서, 한 여성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린 다.

“가르아안    ~ 함께 차 마실까요      ~?”

자신의 둘째 부인. 엘라이라가 티 세트를 들고 그를 향해 오고 있다.

“오 엘라이라!그래”

조금 전까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 간다. 언제나 보는 얼굴인데 언제 봐도 반갑다.

“어,어머!”

가르안을 향해 다가오던 그녀. 순간적으로 발을 잘못 내디뎠는지, 그 녀의 몸이 앞으로 기운다.

가르안은 순식간에 엘라이라 앞에 나타나 그녀를 부드럽게 안는다. 가르안에게 미안한 시선을 보낸 그녀. 잠시 후 소매에 물든 찻물을 보 며 울상을 짓는다.

“비싼 드레슨데....”.

비싼 드레스라 아깝다기보다는, 그 옷에 대한 미안함에 한가득 느껴 진다. 게다가 자신의 옷이 아닌, 아스톤 제국의 황실의 옷이다. 그러자. 가르안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튀긴다.

“뭘.그런 걸 가지고. 자”

딱!

물의 정령이 나타나 그녀의 드레스를 세탁하고, 화염의 정령과 바람 의 정령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말린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 이라 엘라이라는 하이 엘프임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남편이 또 마법을 썼구나 했을 뿐.

“와.깨끗해 졌군요”

“그럼.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가르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하자 엘라이라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가르안과 엘라이라는 그렇게, 서로 행복한 웃음을 떠올리며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 괜찮겠소?

우물가에서 물을 길던 아낙내들은 한 덩치 커다란 사내가 다가와 말 을 걸자 히겁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정중한 말투와 행동 가짐으 로 보아 부랑배는 아닌 듯싶었기 때문이다. 아낙내들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자 로아도르는 묵묵히 쟉셀을 우물가 로 데리고 와 그의 옷을 벗긴다. 쟉셀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육체가 안 쓰럽게 느껴지는지 로아도르의 눈가가 가늘게 변한다. 북북.

우물에서 물을 기어 올린 로아도르는 묵묵히 오물로 뒤덮인 쟉셀의 몸을 닦는다. 한기가 느껴지는지, 이번에는 울상을 지으며 손발을 아웅 거리는 쟉셀이지만, 로아도르는 구석구석 쟉셀의 몸을 씻어낸다. 그리고 천변기를 자신의 어깨에서 내려, 쟉셀의 몸에 두른다. 자신에 게는 조금 모자란 듯한 천변기지만 쟉셀에게는 덮고도 남는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천변기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저 녀석에게 나를 주겠다는 것인가             -

“그런 것은 아니다. 잠시만, 몸의 한기만 막아다오. -누군가?-

“친우다.

설령 그 어떤 꼴로 있더라도.

한 치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천변기는 말이 없다. 허락의 뜻으로 받아 들인 로아도르. 그는 우물가 근처에 쟉셀을 앉히고, 천변기로 쟉 셀의 몸을 단단히 둘러 바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물을 한 번 더 기어 올려 이번에는 쟉셀의 옷을 빨기 시작한 다.

이런 것을 그다지 배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10년 동안의 외지 생활은 헛되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이였다면 결코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친구니까.

휘이이잉.

서서히 싸늘해지는 날씨다. 여름을 지나, 가을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 지. 우물가에 로아도르와 쟉셀은 나란히 앉아 있다. 쟉셀은 다시 몸이 따뜻해졌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로아도르는 그 런 친우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제야 서서히 기억이 떠오른다.

-의무? 아니야 로아도르! 우리는 지도자의 핏줄!그것은 권리야      그렇게 외치며 자신과 결별했던 친구. 아니, 결별했던가? 물론 그와 대립했다. 하지만, 그걸로 그가 친구가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목숨보다도 귀중했던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버리고, 암살이라는 더러 운 행위를 하려 했던 친구. 자신과는 그리도 달랐으면서, 친구일 수밖 에 없던 친구.

“이렇게, 아직도. 아직도 네 죗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 쟉셀은 죄를 저질렀다. 로아도르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른 이가 듣는다면, 저렇게 되어도 싸다고 할 것임이 분명하다. 게다 가 그 대상이 저 영웅, 가르안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설령 세상의 모든 이들이 쟉셀의 욕을 한다 하더라도. 그를 탓한다 한다 하더라도.

“미안..하다....

로아도르는 쟉셀의 손을 꼭 잡는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마치 어린애 처럼 로아도르를 올려다 본다.

투둑투둑.

겹쳐진 두 손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미안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었어도, 네가 설령 그 어떤 잘못을 했어도. 네가 힘들 때, 내가 옆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그것이 친구라는 것일 텐데.

“미...안....하다”

한 없이 울며 사과하는 로아도르. 쟉셀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띠울 뿐이었다.

“큐엘경!!어디 계십니까!!큐엘겨어어엉!!”

어디선가 신경질 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큐엘. 쟉셀의 직위의 이름 이었지. 로아도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쟉셀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한 다.조금 덜 마른 것 같았지만 벗고 있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로아도르는 상의의 단추를 채우며 친구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기억나나, 쟉셀. 나는 기사. 너는 마법사가 되기로 했지. 그리고, 우 리 둘이서 힘껏 제국을 휘젓고 다니며 이름을 날리자고. 그렇게, 치기 이런 두 소년은 약속했었지.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나 자신의 일로만 머리가 가득 차, 너 에 대해 떠올리지도 못한 이 못난 친구를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겠 다.

하지만.

-쟉셀, 나는 육체, 재능은 평민들과 다를 것 없다. 나보다 뛰어난 인 물이 평민들 중에서도 나올 수 있다. -

그때 이후로, 아직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못난 친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귀족이기 때문에, 네 말대로 누구보다도 위대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보다 뛰어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야. 그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어?-

그래도 나아가려는 친구를 봐주지 않겠나. 쟉셀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손에는 깍지를 끼고 여전히, 웃으면 고양이처럼 변하는 눈으로 테이블 너머의 친우를 바라본다. 오만함과 기품이 동시에 서려 있다. 어쩐지, 뭔가를 비웃는 듯 한 얼굴이다. 로아도르는 차분히 앉아 있다. 그러나, 기사로서의 단정한 자세와 엄 격한 기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친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찻잔 을 들이킨다.

그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지식의 귀중함을 알고, 명예를 생명같이 여기던.....

“어이구, 여기 계셨습니까”

큐엘의 이름을 울부짖던 하인은, 우물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쟉셀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온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취급을 받으실 분은 아니건만...”

현재 크로스트 후작가의 명예는 크게 추락한 것이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장남인 시튼이 대적하던 상대는 다름 아 닌 가르안 대공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시튼은 자신의 동생을 눈에 안 띠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쟉셀이 가르안 대공의 눈에 띠면 곤란하다면서.

“어라, 오늘은 몸이 깨끗하시네요.”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인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깜짝깜 짝 놀라며 쟉셀을 일으킨다.

“어?

그리고 놀란다. 언제나 정신이 나간 상태인지라 잘 때조차도 헤실헤 실 웃는 쟉셀이건만.

얼굴에 표정이 없다. 게다가 어느 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하인이 그 시선을 쫓아가 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저 멀리 한쪽에서 검은 망토에, 무식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커다란 검을 들고 가는 사내가 보이지만 아무리 봐도 대 귀족인 쟉셀과 는 관계없어 보인다.

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큐엘 경. 왜 울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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