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3장 귀환자 2
따라라라라 ~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흐른다. 그에 맞춰 춤을 추는 아름다운 사람 들.그들 사이에 유난히 돋보이는 한 여성이 있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 이 그녀와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위해 눈을 번뜩이고 있다. 단순히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 파티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자리에 서 가장 높은 여성이기 때문이리라.
마지막 댄스가 끝나자, 그녀와 함께 춤을 추던 장년의 남성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이 자리에 와 주셔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는다. 다소 오만해 보이지 만 그 모습이 너무나 어울리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남모를 기품 이 서려 있다.
사실, 정말로 이런 자리에 올 여성이 아니기는 하다. 그녀는 다름 아 닌 아스톤 제국의 후계자 2위.
아르시엘 엘 아스토이라 불리는 공주였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공주가 황실의 밖으로 나올 이유도 없고, 또 나온다 하 더라도 다른 귀족의 댄스파티에 참가해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 지금 같은 시기가 아니라면.
대마왕의 강림 이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그만큼 많은 지도층 귀족들이 죽어 나갔다는 뜻이다. 그리고 큰 전쟁이 있었다라는 건, 그 만큼 공을 새운 신흥의 귀족들이 많이 들어섰다는 것. 현재 아스톤 제 국은 황실을 중심으로 신흥 대표의 가르안 반 카이자 대공. 그리고 구 귀족의 대표로는 바이파 가문의 엘리엇. 둘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갈 등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나마, 카이자 대공은 아스톤 제국의 제 1후계자인 루리아 공주의 남편이오, 바이파는 수백년 동안이나 제국에 충성을 다해온 가문이니 둘 다 황실에 반하는 존재는 되지 않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남은 그 두 세력의 조율자는 아르시엘 공주 뿐이다. 그리 고 총명한 아르시엘 공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황궁 밖 으로 나와서 까지 구귀족의 기를 살려주고 있었다. 두 사이의 대립, 이라고는 하지만 가르안 카이자의 이름이 훨씬 드 높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긴 했으니까.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앞으로도 이런 즐거운 자리가 이어 졌으면 좋겠군 요.”
초대한 귀족과 초대 받은 공주는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헤어진다. 많 은 젋은 귀족들이 그녀와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고자 노력하지만 그녀 는 도도하게 돌아선다.
점차 사람들은 줄어간다.
그녀의 화려한 6두 마차가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는 그녀가 신뢰하 는 사람들 밖에 없다. 한순간에 그녀의 표정이 지독한 피로가 몰려온 다.
“수고 하셨어요 공주님.”
“응.
시녀의 진심 어린 말에도 제대로 반응해줄 기력조차 없다. 그저, 빨 리 마차에 올라타 푹신한 곳에 앉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후우.
아무도 없는 공간이 되자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쉰다. 지친다. 힘들 다. 그런데도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친언니인 루리아 공주조차 남 편이 가르안 대공이니,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아버지는 딸인 그녀의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썩 뛰어난 인물 은 아니다. 물론 완전히 무능한 인물도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것을 털 어 놓을 사람은 되지 않는다.
대마왕 강림 전에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엘리엇 역시 한 일파의 수장 이 되었으니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정확히 그녀뿐인 것이다. 중립의 입장에 서 있고,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사람은.
하다 못해, 구귀족 사이에도 그럴 듯한 인물이 있었다면 모를까, 가 르안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크다. 바이파 가문의 데릴 사위이지만, 차기 가주로서 인정받고 있는 엘리엇 반 바이파. 비록 그가 참전한 소드 마 스터로서 인정 받고 있지만 대마왕을 물리치고 검의 신의 후계자, 아니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저 위대한 형부에게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을 까?
물론 가르안의 공적은 크다. 그는 인정해줘야 하고 제국에서 평생을 보장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공적이 있다고 걷어 들이는 세금을 줄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니까.
달칵.
그녀는 파티 내내 벗고 있던 외눈 안경을 꺼내 걸치고는 준비되어 있 는 서류들을 살핀다. 곰곰이 살펴보고 다음 스케줄을 정해놔야 했다. 황실의 공주. 너무 싸게 보여도 곤란하니까. 황궁에 이르자, 하얀 망토를 두른 건장한 사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다 가온다. 그리고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늦게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힘겹게 싱긋 웃는다.
“천만의 말씀을, 제르타 후작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카시레타 반 제르타 후작.
역시 신흥 귀족 중 한명으로 가르안 대공과는 아카데미 시절부터의 절친한 친구. 그리고 옛날,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는 로아도르 반 바이 파에게 작은 차이로 져버린 검사.
이제는 제국을 대표하는 강한 기사 중 한명으로서 황실의 근위기사 단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르시엘에게 열렬히 구애하고 있는 한 남자이기도 하다. 일부러 마중 나온 것이 분명한 그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르시엘은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도 그의 모습을 똑똑히 새긴다. 카시레타에게 이성적으로는 큰 관심은 없건만, 지금은 가장 먼저 떠 올리는 자신의 남편감이기도 하다.
그의 청혼을 받았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세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전부 아스톤 제국의 황실을 위해 서다. 그래서 중립적으로 두 세력이 유지되어 주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 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구 귀족가문과 혼인을 할 생각 까지 품고 있 었다. 루리아와 그녀. 그게 공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지만, 아예 가르안이라는 이름을 업고 신흥 귀족 쪽에 힘을 실어 주어 버리는 것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도중에 많은 문 제가 발생하겠지만 아예 그 편이 장기적인 안목으로는 좋을지도 모르 는 것이다. 속단은 금물이니, 아직 확답은 내지 않고 있지만.
“씻으시겠습니까?”
“나중에. 나 좀 혼자 있게 해줘”
아르시엘의 시녀들은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이다.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방에서 물러난다.
슥슥.
그녀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멍히 앉아 있 다.벌써 10여년 가까이 된 습관이다.
두통이 날 정도로 많은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시엘. 그녀는 무심코 자신이 손을 매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는다. 웃긴 얘기다. 이제 그녀도 25세.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혼기도 지나 치게 지나버린 여자다. 그 동안 대마왕이네 뭐네 하면서 미루고 미뤄온 혼인. 이제는 그 핑계조차 사라져 버리고. 이미 죽었다 생각되는 남자를 기다릴 핑계조차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번 자조 어린 웃음이 나온다.
고작해야 10대에 한 풋내 나는 첫사랑 얘기 따위, 코웃음으로 지워버 리고 현실적으로 바라봐야 할 나이다. 또 그녀의 직위가 실로 그러하 다.
그런데.
-언제고,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 푸른 눈으로, 그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리 맹세하고 간 청년이 그리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그러고 보면, 저 가르안을, 이미 인간이 아니요, 신이 되어 버린 형부 를 이기겠다고, 이겨야겠다고 선언한 남자도 그 뿐이었다.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형부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의 기백을 보여주 는 남자가 있다면, 그녀는 다시 사랑을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이미, 로아도르 반 바이파라는 인물은 세 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아직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다.
어렸지만 단 한번 진심이었던.
그 사랑을 버려야 하는데.
“참 힘드네요”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 것인지. 그녀는 달을 두 눈에 가득 담으며 힘없이 말한다.
그동안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