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2장. 제 7의 마왕. 5
어수선하지만 활기가 가득한 세계. 거대한 공포감이 사라진 지금, 사 람들은 그 동안 잃어버린 것들에 슬퍼하면서도 그들을 누르던 압박감 은 사라져 있기에 후련한 얼굴들이었다. 그 사이를 로아도르와 사부가 지나가고 있다. 로아도르의 모습은 지 금까지와는 다르게 겉보기에는 이상하지 않다. 온 몸에 바위를 들고 다 니지도 않고, 쇳덩어리를 온 몸에 달아 두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여행가들.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검을 신기하게 바 라보는 이는 있었지만 장식용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특별히 시비를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가르안 동상에 쓰일 거냐고 묻 기도 해서 로아도르에게 씁쓸한 표정을 짓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그 누구도, 저걸 사람이 쓰는 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는 뜻이다.
사부는 어째서인지, 가장 서둘러야 할 길임에도 서두르지 않는다. 오 히려,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나 더 느긋하게 길을 가는 것이다. 다른 이는 알지 못하는 위기. 숨겨진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 사부와 자신의 역할일 터인데. 그 점이 로아도르에게는 의문이었지만 사부는 여전히 느긋하게 나아갈 뿐이다.
처음에는 초조하기도 했지만 그런 길이 보름쯤 이어지니, 로아도르 로서도 조금쯤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는 수련을 위함이었다. 로아도르는 사부와 함께, 그저 세상 을 보기 위한 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지평선 가득히 늘어선 밭을 지나가며, 그 안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며 사부가 묻는다.
“로아돌. 저 농부를 보면 어떻게 생각 하냐?”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로아도르는 솔직하게 말했다. 여태까지도 수많은 농부를 봐왔거늘 이제와서 무슨 특별한 감정이 들 리가 없다. 그러나, 사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러냐. 난 가끔 이런 생각한다.”
-저기, 저 길가는 농부도 사실은 마스터가 아닐까?“마스터.
로아도르에게는 둘도 없이 고귀하며, 무엇보다도 바랐던 칭호다. 그 러나 사부는 그것이 마음이 들지 않는 듯. 투덜거리듯 말한다.
“그 호칭은 도대체 뭐냐. 도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만든 거지? 마 스터란 틀림없이 통달한 자를 뜻하는 것일 터인데. 그 앞에 소드 하나 가 붙어 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단어가 되어 버렸다. 혹,다른 곳에서도 쓰이기는 하겠지만, 마스터란 칭호는 강함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 지.
그런데 말이다.
사실, 저 농부도 손만 대면 5년째 가뭄인 땅에서도 싹이 돋는다는 전 설의 마스터 같은 거 아닐까?그런 거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냐?“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사부가 말한다. 농담으로 하 는 말인지, 진담으로 하는 말인 것인지. 로아도르로써는 알 도리가 없 다.곤란해 하는 제자를 보며 사부는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그 동안은 여유가 없었지? 사람들을 봐라. 그들을 보고, 무엇이든지 생각해내려무나. 저 자는 어떻게? 뭐가? 뭐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기본적인 생각들을 말이다.
그러면 아마, 너도 나중에는 알게 될 거다. “ 사부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말이지.
“마스터나 그랜드 마스터 따윈,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는 것을 말이 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산에서 로아도르가 한껏 잡아온 멧돼지를 뜯어 먹고 있을 무렵이었 다.사부는 또 불쑥 말을 꺼낸다.
“너,여자는 있었냐?”
“여자..입니까?”
장난으로 물어온 적은 있었지만 진지하게 물어온 적은 한번도 없다. 또 장난인가 하고 넘어가기에는 사부의 눈에 장난기가 너무 없다.
“너도 귀족 나부랭이잖냐. 한번쯤 혼담이 오갔다거나, 눈길이 맞았다 거나, 파티에서 댄스라도 추었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을 텐데? 한번도 없냐?”
머릿속의 한 구석에서, 그제서야 한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굉장히 귀엽고 발랄하고 총명하던 여인이다.
“있..”
그러나.
로아도르는 차마, 있었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단 한번 손 을 잡아 보았던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소녀는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으니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을 터이다. 아니 그럴 리가. 벌 써 성혼을 하고 아이가 있을 나이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자라 있을 지, 상상이 안간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몇 살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신의 배에서 4년 정도 있었 다고 사부에게 들었다. 그리고 아마, 커그너스와 함께 지낸 세월이 2년 정도일 것이다. 그 전에도, 한 2년 정도 돌아다녔던 것인가? 그럼 벌써, 8년이나 지났단 말인가? 아니, 그것조차 확신하지 못하겠 다.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마음은 가르안에게 졌던 그대로인데, 나이만 이렇게 불쑥 늘어났단 말인가.
자신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여인에게 자신은, 뭔가 굉장히 숭고한 맹세를 했던 것 같은 기억 이 있는데.
그것이 뭐였는지? 자세히 생각이 나지도 않으면서, 왜 이리 마음만 아파지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오로지 검만 바라보며 살았던 로아도르의 머리 속에, 그 동안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터져 나온다.
“후후....”
사부가 묘한 웃음을 띠우며 로아도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중에는 손을 휘휘 저었다.
“뭐,생각 안 나면 됐다. 지금은 일단 먹고.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 해 줘라”
“예.알겠습니다.
사부의 말 한마디에 로아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멧 돼지 고기를 덥석 물었다. 그러나 그의 찌푸려진 표정은 풀리지 않았 다.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며 사부는 후후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나 지막히 중얼거린다.
“사람이란 참 오묘한 생물인지라, 잊지 말아야 할 기억조차 당장의 현실 앞에서 아스란히 사라져가곤 하지. 하지만 참 오묘한 생물인지라. 나중에 필요할 때에는 반드시 기억이 날게다.”
그 말을 들은 로아도르는 고기를 씹어 삼키고 말한다.
“굉장히 오래 산 노인 같은 말을 하십니다”
“호오? 웬일이냐. 이런 농담도 다 하고”
농담이 아니다. 그저 느낀 바를 말했을 뿐이다. 제자가 말이 없자 사 부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픽 돌린다.
“노인네 같다라. 몇 살이나 먹었을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대략으로라도 말해 봐라.”
“그렇다면....한.,백년 쯤입니까?
사부는 실망했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가, 이윽고 다시 비웃음으로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하늘을 그리고 있다.
“글쎄다. 그 열배쯤 더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후로도, 로아도르는 먼 길을 사부와 함께 갔다. 배를 타보았다. 처음 타는 배와 바다는 정말로 웅장해서, 그 강함에 로아도르조차 압도될 정도였다.
항구에 가보았다. 그들의 활기찬 모습은 로아도르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시장에 가보았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귀족에서부터 노 예까지.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왕군의 공격으로 무너진 성벽을 다시 만드는 공사를 하는 곳에 가 보았다. 그토록 웅장한 그 벽은. 이 작은 힘이 모여 만들어 지는 것이 다.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 가보았다. 고작해야 진흙더미에 불과한 것이, 예와 미를 간직한 어떤 것으로 재창조 되고 있었다. 무너진 왕궁에 가보았다.
거리에 가장 낮은 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 가보았다. 로아도르는 사부가 이끄는 대로.
모든 곳에 가보았다.
이 곳은 새 하얀 공간. 모든 것을 끌어 모아. 강철의 검을 만들었던 그곳.
장인이 그토록 믿고 있는 이 뿌리 깊은 나무는 그에게 무엇인가 말하 고 있다.
살랑 살랑 바람을 불면서.
이것을 보고.
그 어떤 것을 느끼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장인은 알지 못한다. 그저, 나무를 믿고. 검을 만들며 살아온 그가 다른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는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볼 뿐이지 만.그 곳에는 이미 시든 꽃들 뿐.
하지만, 가끔 드는 의문도 있다.
그 전에.
여기에는 무엇이 있었지?
그리고.....
“사부...저것은....”
한 건축물을 보며, 로아도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굉장히 웅장한 것도 아니오, 화려한 건축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건축물이 무엇인 지는 로아도르도 알고 있다.
‘실제 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는 언제고, 이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투둑투둑.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네 개의 날개는 맞서지 않고 유유히 넘기며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풍차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