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1장. 신을 이겼던 검. 1
후작의 지위를 받고. 정식적으로 제 1황녀의 약혼자가 된 가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일반적인 저녁 밤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의 하늘은, 무서울 정도로 핏빛으 로 물들어 있었다. 그저 괴현상으로 치부할 수 도 있지만 엘 카이자의 기억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드디어 강림하는 군. 대마왕!”
본 적도 없는 상대이건만 적의감이 피워 오른다. 아스톤 제국은 이미 그가 사랑하게 된 나라다. 사악한 드래곤을 물리치고 수많은 환호를 받 을 때.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 다른 의무. 즉, 자신이 이 곳에 있어야 하는 최대의 이유는 그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함으로 있다는 것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루리아와, 자신을 사랑하는 한 엘라이라를 위 해. 대마왕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기 위해 강림하는 절대 악인 것이다. 목숨을 걸고 물리칠 것이다.
그의 실력은 이미 그랜드 마스터.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엘 카이자의 기억이 조언하고 있다.
‘드래곤을 잡은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거군. 조금 더, 조금 더 실력을 키울만한 상대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수련 으로도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는 가르안이지만 역 시 생사를 넘나드는 승부만큼 그를 일깨워 주는 것은 없으리라. 어디의, 어떤 상대가 있을까?
가르안은 엘 카이자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상대를 찾아낸다.
악마라 불리지만 신 (神 )도,마 (魔 )도 아닌 자. 그저 파괴의 화신. 그가 풀려나는 날, 세상에는 파멸만이 남을 것이라 알려진 자. 아비스의 괴수 발라그.
“좋았어. 그렇다면 다음엔 그 녀석으로 정했다!대마왕. 올 테면 와보 라지!”
대마왕을 물리칠 자로서 내정된 자. 용사 가르안은 붉은 하늘을 올려 다보며 그리 맹세했다.
가르안이 있는 곳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방. 무척이나 호화스러운 방이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운기가 흐르고, 화장대와 가구는 모두 금 과 보석으로 테두리가 장식 되어 있다. 마치 일국의 공주가 있는 방. 그리고, 실재로 그 방의 테이블에는 한명의 공주가 앉아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다. 실로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과 절제가 담겨 있다. 이제 막 17, 1세쯤 되었을까?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에 앞서 총명하 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여인.
제국의 제 1후계자로는 단연 루리아 공주이지만, 그 뒤를 지탱하는 것은 제 2공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얘기를 듣는 아르시엘 공주였다. 그녀는 외눈 안경을 살짝 매만지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기사에게 묻 는다.
“무언가, 진척이 있나요?”
그 기사는 나지막이 대답한다. 그 기사는 다름 아닌 엘리엇. 로아도 르 반 바이파의 사망 (사실은 실종이지만 이미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에리지에 반 바이파의 남편으로써 바이파 가문의 차기 후 계자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예.이미 덜텐 후작을 필두로 여차 할 경우에는 군을 움직일 수 있도 록 약속을 받아 두었습니다.
“몇번이나 물었지만 다시 한번 묻겠어요. 확실한 것이겠죠?”
엘리엇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아르시엘은 안심한 듯 숨 을 폭 쉬고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 엘리엇은 이 공주에게 감사 의 눈빛을 띤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제 2 후계자가 군사 관계에 대해서 움직인다 면 어떤 오해가 따를지는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황족 만 큼 군사라는 움직임에 깊게 관여할 수 있는 위치도 없다. 게다가, 그 뒤 에 최대의 문벌 귀족인 바이파 공작가가 있다면야 더더욱 말이 필요 없 다.그러나, 이런 난처한 문제임에도
-혹 정말로 대마왕이 강림한다면, 그런 오해 정도야 사소한 것이지 요.-
라며 담담하게 승낙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오해를 받으면서도 여 차 할 경우에는 군대를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공주님도 혼기에 찬 나이시군요. 엘리엇은 화제도 돌릴 겸 슬쩍 다른 얘기를 꺼낸다. 그러자 아르시엘 도 안경 너머로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그렇죠. 안 그래도 얘기가 많아서 힘들답니다”
“흐음. 어디, 괜찮은 남자가 없나 보지요.”
“아직 제 눈에 차는 기사는 띠지 않네요”
“혼기를 놓치시면 더 힘들어 질지도 모르지요. 서둘러 선택을 하심이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해야겠죠”
웃으며 대화를 하는 두 사람. 그러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한 이름이 있었다. 다만,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이다. 엘리엇이 방에서 나가자, 아르시엘 공주는 천천히 일어나 발코니로 나간다. 대마왕이 쏘아 올린 신호탄으로 인해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 지만 평범한 육체를 지닌 그녀에게 그것이 보일 리 없다. 그저 평소와 도 같은 막 저녁놀조차 사라지는 하늘일 뿐이다.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하얀 레이스가 달린 손장 갑을 벗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을 천천히 매만진다. 벌써 몇 년이나 된 습관.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냉철한 자신이 속삭이고 있다. 잊어야 할 때라고. 실재로 한구석에는 황실에 도움이 될만한 남자들의 후보가 기억되어 있다. 그런데도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천천히, 하염없이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하늘을 보고 있었 다.
후욱후욱.
어김 없이 커그너스에게 쓰러져 마앙에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로아 도르. 사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로아도르를 약 올릴 생각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후후. 슬슬 가족이라거나, 숨겨둔 애인이라거나 보고 싶어지지 않 냐?”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반쯤 일으키는 로아도르. 그는 사부로써도 의외 의 반응을 보였다.
“가..족.?”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들어 본다는 식의 반응이다. 한참동안 멍한 눈 으로 사부를 주시하던 로아도르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군요.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의 반응이 아니다. 너무 아련해서 우수에 찬 눈도 아니다. 저건 그의 말대로, 정말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떠올 렸음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고 있다. ‘그,그럴 리가?’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는 사부. 로아도르가 그런 사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연하지. 이건 이상하다. 로아돌이라는 녀석은 바이파라는 이름의 명예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거늘. 장난으로 한 말의 제자의 정신 상태가 평범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사부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 가갔다.
“흐음. 잠깐 실례하지”
사부는 검지로 로아도르의 머리를 톡 두들겼다. 그리고. 사부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순백의 세계.
까앙!까앙!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장인이 검을 만들고 있다. 그 장인이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은 그토록 찬란한 빛의 검. 하지만, 장인은 빛 의 검을 만들 수 없다. 그런데도 부러워서 그저, 모 든 것을 끌어 모아서 거무튀튀한 강철의 검을 만들어 간다. 빛을 올려 다보며,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많은 정신세계를 봐온 그이건만.
‘이,이런 것은 처음 봤다 ’
흰백의 공간. 무수히 많은 가능성.
그것에는 아무것도 차있지 않다. 다른 이들이라면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겠지.
꿈과 희망. 혹은 좌절과 절망이라는 것들로. 하지만, 이 녀석은 그런 것이 없다.
오로지 검.
그리고 검 주위에 시들어 가는 몇몇의 꽃. 검 뒤의 뿌리 깊은 튼튼한 나무. 점차 거대하게 변하는 검은 나무를 기대고 있다. ‘저 나무는, 나인 거냐.
검이 커지는 것만큼이나 자라나는 나무. 그토록 신뢰 받고 있는 것은 기쁘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을.
‘모든 걸, 버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
사랑. 가족. 애정. 자존심. 자부심. 명예.
이 모든 것이 시들어 가고 있고.
나에 대한 신뢰라는 것과.
검뿐이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귀족 같고 오만하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따르고 있다. 원래 말 수가 그리 없던 녀석이다. 그저 익숙해 졌으려니, 강해지기 위해 자존심을 접어 두었으려니 정도로 생 각했건만.
절대 의지는 말 그대로 절대적. 강해지기 위해, 그 눈앞에 있는 빛의 검을 넘어서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