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란의 나라. 전쟁의 한 복판. 바이파란 이름이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곳. 오히려 위험한 곳. 엘로운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지. 내가 엘로운인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면서 쿡쿡 웃는 사부였다. 제목 제 9장. 오우거 슬레이어. 5
제국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로아도르는 제국에서와 같이, 묵묵해 보 이지만 안정되어 있는 농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어딘 지 모르게 다들 날카롭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게다가, 무기를 든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외지인이라는 것도 익숙한 듯, 흘낏 보고 넘어갈 뿐이다. 고작해야, 국경이라는 인간 이 정해 놓은 선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사는 모습이 이렇게 다를 줄이 야.
“왜 그러냐?
“아닙니다.
사부는 후 ~ 하고 가볍게 웃었다. 도련님의 생각이야 안 봐도 뻔하다. 제국보다 낙후되어 있는 곳을 보고 놀라는 것일 것이다.
“엘로운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중심에 있는 케거란 나라에 가면 한층 더 심하지. 몇일에 한번은 길가에 버려진 시체도 볼 수 있을 정도 니까.”
그런 이들 모두가 몬스터, 혹은 전쟁으로 죽어나간 이들이다. 제국에 서 처럼 몬스터를 찾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 이윽고, 지평선 너머로 높은 성벽이 보였다. 가르스. 엘로운 동쪽 끝의 수비요새이자 도시. 높은 성벽으로 빙 둘 러싸여 있다. 게다가 성벽의 색이 드문드문 다른 것으로 보아 몇 번이 고 무너진 곳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성문을 중심으로 안에 들어가려는 인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검문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사부가 명한 대로 전과는 달리, 몸의 쇳덩어리를 풀지 않은 로아도르 가 물었다. 그러자 사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제국에서고. 잔말 말고 이 사부에게 맡겨 둬라. 병사들은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은 국경이지만 제국의 병사 들과는 달리 여유보다는 어딘가 날카롭고,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 것 같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곳이 닿은 국경은 아스톤 제국뿐만이 아니다. 북쪽으로는 야만인 이라 불리는 게르 일족이 그들을 노리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군사 국가 시아르가 노리고 있었다. 노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몇 번이고 그 주인이 바뀌었던 비운의 땅이다.
하지만 서로 사이가 안 좋다 하더라도 국경은 국경. 유동인구가 무척 많았기에 제대로 된 통제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줄은 무척 길었다. 한참을 기다려 로아도르와 사부의 차례가 되자, 병사는 귀찮은 듯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무사 수행 중인 용병이오”
무사 수행?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설명으로 되는 건가? “호오. 그거 대단하군”
그러나 별다른 의심 없이 병사는 로아도르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고 개를 끄덕인다.
“보통 실력이 아니겠는데, 목적은?”
“당연히 용병일이지 뭣이겠소?”
용병이라는 말에 오히려 병사는 조금 안색이 밝아진다. 싸울 병력이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소속된 용병단이라도 있소?”
“개인적으로 움직이오”
“그런가. 두 명이니까 통과세로 20실버. 무기 소지 세금으로 10실버 추가요.”
사부는 아무렇지도 주머니에서 은화 세 개를 꺼내 병사에게 건낸다. 그러자 병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나무패를 두개 꺼내어 그들에게 내주었다.
“자,이 패를 가지고 들어가게. 나올 때 반납하는 것 잊지 말고.”
“알고 있소이다. 거참, 한두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끝이었다. 병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 간단한 검문 에 로아도르는 어이가 없었다.
“이걸로 끝입니까?
“응.
제국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었다. 하다못해 제국의 신민이라면 누 구나 가지고 있을 호패조차 검사를 하지 않다니. 명부조차 기록하지 않 았다. 저 태도로 봐서 돈만 내면 얼마든지 들어 올 수 있을 분위기가 아 닌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아스톤 제국처럼 꽤 오랜 안정을 거친 곳에나 가능한 일이라구. 그리 여유 있게 인구 통제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국경이니까 더 삼엄해야 할 텐데요”
“그러기엔 너무나 유동인구가 너무 많으니까 그렇지. 철저하게 하려 면 오히려 도시로서의 기능 자체가 마비되어 버릴 걸? 뭐,정작 중요한 건 내성에 보관 되어 있을 거야. 거긴 함부로 못 들어가고.”
“하,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병사를 잠입 시켜서....”
사부는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싶은 눈으로 로아도르를 바라본 다.
“방금 전에 세금 못 들었냐? 딴 곳의 열배 가까운 액수라고.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냐. 게다가 사람의 숫자 파악 정도는 하고 있으니까.”
역시 경제관념이 떨어지는 제자다. 사부는 한숨을 푹 쉬며 돈 주머니 를 열었다. 출발했을 때는 가득 차 있던 금화와 은화였건만, 이제는 은 화 두세개 정도만이 남았을 뿐이다.
“에고. 어쨌든 이걸로 우리는 거지 신세다. 여관에서 하루 자면 끝나 겠네. 일단 일거리를 잡아야겠어”
“일거리라니요?”
“돈이 없으니까 벌어야 할 것 아니냐.”
일이라. 로아도르는 까칠해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도둑질은 아닐 테니. 차라리 이편이 나을 지도 모른 다.
가르스의 성내는 활기차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박하기도 했 다.성 밖의 주민들처럼 주민들의 눈에 안정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들 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인 듯, 반쯤 무너진 건물들도 간간히 눈에 띠 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랑민인 듯, 찢어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독기 에 찬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유랑민이다. 로아도르는 조금 놀란 듯, 눈살을 찌푸 리며 그들을 바라보자 사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후후, 왜? 안쓰럽냐? 그럼 네 이름으로 제국 내로 좀 들여 주지 그 래? 제국에서 살면 이런 취급은 안 당할 것 아니냐.”
그러자 로아도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동정은 가지만 그래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아무나 받아들이면 오히 려 제국의 신민들에게 누가 될 테니까요. 게다가....”
차마 뒷 말은 하지 못하고 삼켰다. 자신은 제국의 신민들을 위한 귀 족이다. 다른 국가의 백성들조차 무턱대고 보살필 정도로 성인군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저들이 만약 바이파의 이름 아래 있는 영지민들이라 면 모를까.
결코 착하기만 한 녀석은 아니다. 마음속 어딘가에는 정치적인 안목 으로 바라보는 구석이 있다. 사부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원참. 누가 제국 귀족 아니랄까봐.”
사부가 멈춰선 곳은 3층으로 이루어진 붉은 건물이었다. 문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케시아트 용병단 -
용병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기를 든 사람들이 쉴 세 없이 들락날 락 거리고 있었다. 워낙에 가지각색이라 로아도르도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는 정도였다.
사부에 이어, 로아도르가 들어서자 목재로 이루어진 바닥이 삐꺽 소 리를 내며 ‘쿠웅 ’소리를 낸다.
“뭐,뭐야?”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안에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문을 바라본다. 이 윽고, 그들의 시선은 로아도르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 같 은 의아함이 떠올라 있다. 갑옷도 아닌데, 도대체 왜 저런 걸 달고 있는 것일까?
안은 일반 주점처럼 되어 있었다. 사부는 익숙한 듯 용병 사이를 지 나쳐, 바에서 잔을 닦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마스터를 만나고 싶은데.”
“허이고, 마스터는 아무나 만나는 줄 아슈? 저기 가서 접수원이나 기 다리구랴.”
바를 지키고 있는 노인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시큰둥하니 말했다. 그 러자 사부 역시 우습지도 않다는 듯 검은 장갑을 착용하고 손을 훽 하 고 휘둘렀다.
사강 ~
깔끔한 수도에 바 위에 놓여 있던 빈 술병이 칼로 벤 것처럼 매끈하 게 잘라진다.
챵그랑 ~
“나 모르나?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노인은 동그래진 눈으로 술병과 사부의 손을 바라보더니, 곧 깜짝 놀 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호,혹시 당신. 수,수도 (手刀 )의 잭?”
“알고 있으면 마스터 만나게 해주시지?”
노인은 차마 대답도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둥지둥 윗 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사부는 히죽이죽 웃으며 멋대로 바 안으로 들 어가 장식장에서 술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한다.
“재,잭이다.”
“수도의 잭이야”
뒤에서 용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같이 경악한 눈 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통 유명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로아도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면 그렇지.’ 라는 심정이었다. 사부 정도의 실력. 알려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는가?
“사부. 이름이 잭이십니까?”
“용병 노릇 할 때만 사용하는 이름이다.”
사부는 저들의 뭐라고 떠들건 간에 관심 없다는 듯 연신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로아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병들과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갈 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사부가 돈도 안내고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신경 쓰일 정도였다.
이윽고, 다시 바로 돌아온 노인은 전과 달리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시죠. 마스터가 보자고 하십니다.”
로아도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계단이 부셔진 것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문제없이 케시아트 용병단의 마스터에게 안내되었다. 마스터는 마흔 쯤 먹은 사내였는데, 벽에는 전에 로아도르가 쓰던 오거린만한 대 검이 벽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이거. 설마 그 유명한 수도의 잭이 이런 변경에 까지 오실 줄이 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행분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만.”
마스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로아도르를 바라본다. 그의 정보라고 는 방금 전 계단을 무너트린 사내라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자 사부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제자야. 잔말은 됐고, 돈이 떨어져서 그러는데 적당한 일거리가 있나? 기왕이면 후딱 끝나는 일이면 좋겠는데.”
“어디 바쁜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호위 임무는 무리겠군 요.”
“소문 못 들었어? 그런 거 안 맡아. 몬스터 같은 걸로 줘”
“그러죠. 어디 보자...”
역시 사부는 거물인 듯, 무척 오만한 태도에도 마스터는 표정의 흐트 러짐 없이 책상위의 서류를 들척이기 시작했다.
“흐음. 이거 좀 위험한데, 괜찮겠는지 모르겠군요.”
“뭔데?”
“오우거입니다.
오우거라는 말에 로아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오우거. 지상에 있는 존재들 중에는 최강의 몬스터다. 체격이나 힘이 미노타우로스나 싸이클롭 같은 몬스터에 비하면 떨어지긴 하지만, 타 고난 본능으로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한 수 위로 쳐준다. 그리고 보통, 오우거는 상급의 소드 익스 퍼트에 해당하는 기사만이 처치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호오, 오우거라?”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을 듣고도, 사부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로아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다. 아마도, 자신이 맡게 되리라.
그런데, 그 것 말고도 다른 뜻이 있는 것 같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떨어져서 산 밑으로 내려 온 듯 합니다만, 무척 영리하지요. 보통의 오우거는 단독으로 행동합니 다만, 녀석은 오크를 수하로 부리고 있습니다”
“호오. 그건 신기하군?”
“강한 것뿐만이 아니라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 고 판단되면 그 오크들에게 맡기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오 크 무리를 찾아서 다시 수하로 둔 다음 먹을 것을 바치게 하죠. 정말이 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인간다운 놈입니다. 사냥한 것만 먹는다는 오 우거에 대한 기록도 다 태워버려야 할 정도입니다”
“좋아, 보수는?”
“보통 오우거라면 금화 5개입니다만, 이번일은 10개입니다. 녀석을 잡기 위해서는 오크 한 부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놓쳐 도 5개는 드리지요.”
적어도, 오크 한부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용병이 라면 단 한명에게 이런 의뢰를 맡기는 것에 경악하겠지만, 수도의 잭이 라면 얘기가 다르다.
“좋아. 대신, 착수금으로 한개는 받아야겠어. 지금 당장 돈이 없으니 까.”
“흐음. 하기사, 수도의 잭의 명예를 거신다면 못 드릴 것도 없겠지 요.”
거래가 성립되자 마스터는 별다른 말없이 서류를 부욱 찢어 사부에 게 건내었다.
아니다 다를까, 용병단을 나오자마자 사부는 로아도르가 예측했던 말을 꺼낸다.
“로아돌, 네가 잡아라”
로아도르는 묵묵히 끄덕인다. 그도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지금까지의 수행.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가늠해볼 좋은 기회일 것 이다.
그러나, 사부의 이어지는 말에 로아도르는 뻣뻣하게 굳었다.
“맨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