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7장. 부수겠다. 5
그 무렵. 수도 아스토니아.
크로스트 가문의 후계자. 시튼 반 크로스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신의 영지인 에이오튼 남작령에서 극비로 온 보고서였다.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루카펠의 웨이크닝을 확인했다는 정보. 시튼 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이것을 어떡한다.
정계의 뱀이라 불리는 시튼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사람을 대상으 로 하는 정계에서의 얘기다. 드래곤이라는 자연제해에 대해서 어떤 대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에게로 올 사항도 아 니다. 아버지인 크로스트 후작에게 바로 전달되어야 하는 정보이건만 현재 병환으로 인해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 그 대행자로서, 그에게는 판단을 내릴 위무가 있는 것이다. 그는 결 론을 내렸다.
“황궁으로 가겠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그리 말하고 일어나는 시튼. 하인 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후다닥 뛰어 나갔다. 시튼이 나오는 시간 안에 황궁에 갈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크로스트 가문 자체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드래곤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1급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재앙 중의 재앙 이다. 아마 일개 가문의 힘으로 드래곤이라는 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가문은 바이파 공작가 정도일 터이다.
“아마, 군의 파견되어야 하겠지.”
시튼은 무심코 중얼거리고 만다.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가신의 영지라니, 군을 파견해서 보는 이득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큰 손해다. 군대를 파견한다고 하더라도 드래곤을 물리친다는 개념이 아니라, 치안과 안정의 개념이 옳다. 물리치는 것은 소수의 정예의 기사와 마법 사가 해야 할 일이다.
슬슬 준비가 끝났겠다 싶어 시튼은 방에서 나왔다. 적에게는 가차 없 고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가신들에게는 나름대로 신경써주는 편이다. 그때, 복도에 울려 퍼지는 비명.
“아아아악!”
동생. 쟉셀 반 크로스트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미쳐서 돌아온 후, 주기적으로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는 동생. 그 신분 때문에 함부로 죽여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멍청한 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시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사항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가르안이라는 녀석이 뭔가 수를 부 렸겠지. 소드 마스터쯤 되는 강대한 기사이니까. 그것은 그조차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니 실패한 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 자신까지 말려들도록 허술하게 일을 꾸미냔 말이지. 가만.
그러고 보니, 꽤 쓸 만한 전력이 있지 않나?그러면서도 가장 쓸모없 는 전력이. 평민 출신 소드 마스터. 물론 소드 마스터의 전력이 귀중하 긴 하지만 가르안은 현재 제국의 골칫덩어리였다. 뭔가 수를 내야 하는 데,소문이 나버린 맹세 때문에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커다란 골칫덩 어리.
‘이거 괜찮군.
공주와의 사랑을 인정해 줄 터이니 블랙 드래곤을 물리쳐라. 저런 맹 세를 앞 뒤 가리지 않고 해버리는 것을 보면 꽤나 감정적인 녀석일 터 이다. 옳다구나 싶으며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긴다면?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어쨌든 영지내 의 드래곤은 없어지는 셈이다. 그 다음이 문제긴 하지만 가능성은 한도 없이 낮으니까. 높은 가능성 쪽으로 생각한다. 녀석이 사라진다면 그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생기는 이득. 바이파 공작의 자제는 결투에서 진 충격으로 집 을 나갔다고 들었으니, 루리아 공주의 다음 약혼자는 자신이 아닌가? 애인은 몇몇 있지만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던 시튼이다. 예상외의 좋은 생각에 시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황궁에 이르러 시튼이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안내를 받고 있을 무렵, 황제는 장녀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죠 아버지?”
“하아.
딸이 투정에 황제는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다. 데오루토스 알 아스 토.현 아스토 제국의 황제. 특별히 잘한 것은 없지만 잘못하는 것도 없 어, 평화시에는 가장 적절한 황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치도 누리지 않고 딱히 여색도 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딸들을 무척 아낀다. 그 중에서도 장녀 루리아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 줄 정도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황비와 가장 닮았다. 그 리고 차녀 아르시엘은 천방지축인 구석이 있는 반면에 루리아는 다정 다감하고 온화하니까. 아르시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 이 있으면 편안한 쪽은 단연 루리아였다. 하지만 그런 딸이, 지금 가장 곤란한 부탁을 하고 있다. 황제로서의 자각은 있기에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것 정도는 확실하 다.그 것에 대한 예외가 바로 루리아 공주이건만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것도 충분히 무리한 일이었다. )이 부탁만은 그로써도 정말 들어 주기 힘든 것이었다.
“그 자격은 충분하잖아요. 어째서 작위를 주지 않는 거죠? 그가 소드 마스터임은 에, 에틴경과의 결투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놓고 벌인 결투였기에 루리아 공주는 홍조를 띄며 말 을 더듬는다. 그녀도 공주다. 자신과의 혼인을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신 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니 우선 순위로는, 가르안이 귀족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가르안은 소드 마스터. 다른 중소국가에서라면 후작, 혹은 공 작의 작위를 내리면서까지 잡아 두고 싶어 할 인재다.
“그,그게 말이다”
그게 문제란 말이다!
그로서도 딸이 사랑하는 자와 혼인을 하는 것이 좋다고는 생각한다. 저렇게 좋아하니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혼인까지 허 (許 )하고 싶 다.하지만 그 대가로 수많은 대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바이파 가문이 가장 두려웠다. 소드 마스터를 둘이나 가신으로 두었으면서도 공작 본인 자 신도 제국의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사의 가문. 비록 바이파 공작이 직접 찾아와 이번 일은 로아도르 반 바이파 개인적인 일로 취급하며 바 이파 가문 자체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지 만.
정당하다고 떡 하니 가르안과의 혼인을 허락해 버린다면? 그들이 불만을 품고 일어나면 그 반발을 누를 자신이 황제에게는 없 었다. 그가 그렇게 곤란해 하고 있을 무렵, 시종의 안내로 시튼이 나와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오!시튼!”
때 마침 구세주의 등장. 황제는 반기며 그를 일으킨다. 크로스트 가 문의 후계자. 황제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신하들 중 하나였다. 실제로 뱀이라 불리는 비겁한 성격이지만서도, 시튼의 황실에 대한 충성 하나 만큼은 절대적이다.
“이런 이런. 곤란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시튼이 곁눈질로 루리아를 바라보자,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던 그녀 는 즉시 공주의 얼굴로 돌아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뜬다. 신하와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 정도로 교양이 없는 그녀는 아니 었다.
“제게 괜찮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오,그래, 좋은 수가 생겼나?”
황제가 반색하며 묻자 시튼은 곤란한 듯 턱을 매만진다. 드래곤에 대 해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 심약한 황제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나쁜 일입니다만, 처리 하는 김에 겸사겸사라 는 것이지요”
그리 말하며 시튼은 씨익 웃었다.
제목 제 7 장. 부수겠다. (끝 )
“으음. 역시 아직은 무린가.”
가르안은 여관의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이란 공간에는,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많은 마법진이 떠 올라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루리아 공주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자!가 목적 이건만, 아무래도 공주란 신분은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여관 바깥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는 기사들의 짜릿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로아도르와의 결투 때문에, 그리고 그에 앞서 루리 아 공주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원래 대로라면, 여타 기사단에서 제의가 와야 정상이건만. 그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엘 카이자의 방대한 지식을 읽어가며 마법을 익히고 몸의 각성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럼에 도 아직 엘 카이자의 힘을 제대로 각성시키지 못했다. 아마 지금 상태 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약 1할 정도.
감시하는 자들을 따돌리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나 다름없지만 루리아 공주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의심 받지 않기 위해 수련 외 남는 시간에 수도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돌아다 니는 것도 질린 가르안은 의심을 하건 말건 여관방에서 자리 잡고 힘을 키우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한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 는 몸으로 직접 하는 수밖에 없는 듯한데. 타다닥.
여관의 복도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 도 누구인지는 뻔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 오는 녀석. 그런데 어째, 오늘은 좀 소리가 심하다.
쾅!
갑자기 열리는 문. 가르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살레살 레 저었다.
“뭐냐 카시레타. 좀 조용히 다니라구.”
“시끄러!그게 문제가 아냐! 야!야!
카시레타는 수습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 그 역시 상당한 인재로 판단되었기에 즉시 황실의 친위 기사단에 발탁 되었던 것이다. 시큰둥 하게 있던 가르안은 평소와는 달리, 카시레타가 다급한 표정으로 서 있 자 정색하며 제대로 앉는다.
“뭐야 왜 난리냐?”
“화,황제페하께서 널 보자고 한데!”
아무래도 근무처가 황실인 만큼 어디선가 얘기를 주워들은 모양이 다.
호오.
가르안은 그제서야 제대로 애기를 들을 생각이 들었는지 눈에 생기 가 돈다. 아무래도, 이제야 상황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는 몸을 일으 킨다. 아무래도 카시레타가 말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한 50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들의 말발 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관이 무슨 전설의 여관도 아니고, 일직선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겠 지.
“위대하신 황제 페하를 뵈옵니다”
무릎을 꿇으면서도 가르안은 당당하게 인사를 올린다. 비공식 적인 만남이었기에 동석하고 있는 것은 단 한명의 귀족이었다. 어째서인지 얼굴에는 미소가 배겨있다. 습관적으로 웃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 이다.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 저 녀석이 더 인상적이다. ‘저 녀석.....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빙글빙글 웃고 있지만, 눈이 마음에 안 든다. 마치, 뱀처럼 먹이를 삼 키려 드는 듯한 눈. 절로 불쾌한 상대라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훤칠하고 당당한 가르안의 품세가 황제의 마음에 들었지 만,그는 그런 기색을 철저히 감추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 드래곤, 루카펠의 부활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제서야 가르안은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황제의 말을 경청 한다. 죽을 확률이 높은 일이다. 사실상 죽으러 가라고 하는 말 인 것도 같아 황제는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시튼의 말처럼, 이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루리아에게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일단은 국 가가 우선이지 않은가.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성공하여 들어온다면, 진심으로 환영하며 공 주를 줄 수도 있다.
“그대가 이름난 기사라고 들었다. 더구나, 루리아 공주와도 아주 사 이가 좋다지. 그리하여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어떤가, 루카펠을 물리치지 않겠는가?”
블랙드래곤 루카펠이라. 엘 카이자의 지식 안에 들어 있는 드래곤이 다.광폭한 블랙 일족. 2천살이면 드래곤 축에서는 성룡 급에 들어가긴 하지만 아직 어리고 힘이 약하다. 하지만, 아마 지금의 자신보다는 강 할 것이다. 가르안은 속으로 씨익 웃었다. 저 정도면 훌륭한 수련의 상 대가 아닌가?
“만약, 그대가 루카펠을 물리친다면 그대에게 후작의 작위와, 공주와 의 혼인을 약속하겠다. 이 데오루토스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행하 마.”
혼인이라.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은 말이다. 가르안은 즉시 답했다.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이 가르안 카이자.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악한 블랙 드래곤, 루카펠을 물리치겠나이다.”
너무나 단호히 하는 말이라 황제는 놀라 옥좌에서 일어났다.
“저,정말인가? 알고 있는가? 자칫하면 그, 그대의 생명이 위험....”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그러자 시튼이 나서서 황제를 진정시킨다. 황제도 체통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시 튼은 한 발자국 나오며 가르안을 향해 빙긋 웃는다.
“물론,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 겠지. 그렇지 않은가?”
‘하아?뭐야 이 녀석.’
마치, 아카데미에서의 고양이 눈깔을 보는 느낌. 아니 그것보다는 한 층 더 강한 녀석 같다. 가르안은 경계해야 할 대상에 저 녀석을 단단히 새겨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방안에 축복은 잔뜩 내려 두었지?”
사부의 말에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노신관에게 물었다. 몇시간 전에 모든 시전이 끝난 터였다. 만만찮게 신력을 소비했으니 피곤하기 도 했지만, 그것보다 노신관은 심력 (心力 )을 소비한 이유가 더 컸 다.
“음.여타 잡병은 절대로 들지 않을 걸세. 하지만...”
노신관은 안쓰러운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로아도르를 바라본다. 저 것을 사람의 형태라고 불러야 하는지. 온 몸을 고정시키기 위한 부 대 (附帶 )로 둘려 쌓여 있다. 뼈가 제대로 붙지 않은 곳은 붕대로 감아 고정시켰으며, 그 것조차도 불가능 한 곳은 방금 전처럼 신관이 하나 붙어 꾸준히 신력으로 몸의 체형을 유지하게 만들고 있다. 일부분인지 라 이곳에 있는 신관들을 총 동원한다면 못할 것도 아니지만 힘든 일임 에는 분명하다.
무엇하나 빠진다면, 형태 자체가 무너져 버리리라. 저런 것을 사람이 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작 저런 꼴로 만든 악마는 시큰둥하니 서 있다.
“하지만 뭐?
“문제는 이제부털세.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 할 텐데. 정말 괜찮겠 나?”
“그러니까 먹을 거 잔득 준비해두라고 했잖아. 약초랑. 돈 주고 갔을 텐데. 모자랐나?”
“그런 문제가 아닐세!저 상태로 도대체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노신관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로아도르를 가리킨다. 몸의 형태로 고 정시키는 것만 해도 저리 힘들다. 신관 한명은 뼈가 제대로 붙을 때까 지 계속 붙어야 하는 것이다. 노신관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치유력, 저 상태라면 보통 필요한 것이 아 닐세!!도대체 무슨 수로 섭취를 한단 말인가!”
아마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이다. 노신관의 눈에는 저것은 살아 숨 쉬고 있을 뿐. 그저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자 사부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귀찮다는 표시를 한다.
“시끄러워. 고작해야 이런 것도 못해낼 놈 데려오지 않았다니까.
“고작해야? 하아....그래..얼마나 머물 셈인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저 청년 역시 자처하지 않았는가. 저 둘 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자들이라고 생각해야 간신히 이성을 유지 할 수 있다.
“3개월.
“뭐?!지금 3개월 안에 저 자가 일어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몇 년은 누워 있어야 할 몸이다. 노신관은 다시한번 버럭 소리를 지 르자, 그의 말을 날카롭게 자르며 답하는 사부.
“할 수 있어야지.”
씨익 웃으며 침상의 로아도르를 바라보는 사부. 노신관은 몇 번이나 입을 달삭이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방의 밖으로 나가 버 린다. 순식간에 몇배나 늙어버린 얼굴이다. 로아도르는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표 현할 길조차 없다. 전신의 근육은 힘이 풀려서 들어가지 않고, 얼굴에 도 마비가 와 입에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다. 턱 밑에 준비해둔 수건은 이미 홍건이 젖어있다.
자유로운 곳은 오로지 눈 뿐이다.
“자 그럼. 얘기를 마저 해볼까. 듣고 있지?”
로아도르의 시선이 천천히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사부에게로 돌아간 다.이것도 힘이 들어 아주 느리다.
“전에 아낙네와 같이 예를 들어 보겠다. 이 것 또한 단순한 얘기다. 설령 죽음을 앞둔 자라 할지라도, 무언가 목적을 지닌 이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티지. 이 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렇지?”
이것은 로아도르도 들은 적 있는 얘기다. 죽음에 임박한 기사의 이야 기.당장 생명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강대한 적을 베어버리 고 그와 함께 죽는 기사. 영웅담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그 힘 또한 의지라고 나는 본다. 결코 신의 축복 따위가 아냐. 몸 어 딘가에 있던, 힘을 끌어내어 죽음 앞에서도 버티고 버틴 것이다. 그의 의지가 발현한 것이다. 너라고 못할 리가 없고, 또 못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단련이자 시험이다. 3개월. 그 안에 잔뜩 먹고 모두 흡수해서 몸을 치유해라. 네 의지의 힘으로. 통과 하지 못하면. 넌 그대로 죽을 뿐이다.”
지금의 로아도르의 상태는 듣는 것조차 힘들다. 사부도 알고 있는지 짧게 말을 끊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기 전, 그는 문 앞에 우뚝 섰다.
“넌 해낼 수 있는 힘을 분명 가지고 있다.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 믿 어라.”
그리 말하고 나가는 사부. 로아도르는 말없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 다.어차피 뭐라고 말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부가 나감 과 그와 동시에, 다른 이가 들어왔다.
“저,저어...”
입구에서 마주쳤던 어린 수습 신관이었다. 그는 수프를 들고 있다. 김이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충분히 식혀져 있을 터. 일단 준비하라고 해서 가져오기는 했지만 저 상태의 사람에게 어떻 게 먹인단 말인가. 소년은 어쩔 줄 몰라하며 로아도르의 몸을 고정 시 키고 있는 선배 신관을 쳐다봤지만, 그 역시 신력에 집중하고 있는지라 답을 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자.
로아도르는 눈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 시선을 스프에 주고 바로 수습 소년을 똑바로 바라본다. 눈으로 말하고 있다.
먹여. 빨리.
저토록 시체나 다름없는 데도, 눈만은 다른 이들보다 몇배나 생기가 넘친다. 무서울 정도로. 소년은 겁에 질려 뒷걸음 질 친다.
“아,아....하지만....”
로아도르의 시선은 다시 천장을 향하고 있다. 3개월 안에 회복하란다. 당장 무엇을 먹기도 힘든 판에. 입조차 자신 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어려워 침이 흐르고 있건만. 잔뜩 먹고 그 의진 가 뭔가로 회복하란다. 회복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일방적으로 말하 고 나가버렸다. 게다가 이 상태에서 빨리 치유하는 것도 단련이라니. 정말로 화가 치민다. 제멋대로인 것도 정도가 있다. 이리 화가 치미 는데도, 이라도 뿌득 갈고 싶은데도 몸에서 움직이는 부분은 눈 밖에 없다.
죽는다고? 웃기는 소리다. 이런 미친 짓까지 했다. 누가 죽을 줄 알 고.
내가 이대로 질 것 같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