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7장. 부수겠다. 2
“자.저곳이다.”
그로부터 3일을 더 달려, 로아돌이 한 달하고도 3일 만에 처음 보는 문명의 해택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성이었다. 근처에 작은 마을이 없는 걸로 봐서는 성 안에 모든 이들이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규모 라는 것. 인구수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곳이었 다.
애초에 수도에서 태어나, 바이파 공작령에만 몇 번 오갔을 뿐인 로아 돌에게는 영 낯선 영지였다.
“여기가 어딥니까?
“터커 남작령”
시큰둥하게 답하는 사부. 로아돌은 머리 속에서 터커라는 이름을 찾 아봤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바이파 가문의 사람은 아니다. 여타 대귀족들의 가신인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귀족의 후계자로써 교육을 받아 왔던 로아돌에게 남아 있지 않은 이름이라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자라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정계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자라 는 뜻이기도 하다.
사부가 앞장서서 말을 몰자 로아돌은 걸어서 그의 뒤를 따른다. 하도 뛰는데 익숙해져 버린 몸은 걷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정도였다. 평범한 영지였다. 성의 바깥에는 농부들이 논을 갈고, 소에게 풀을 뜯게 하고 있었다. 가끔 이방인인 로아돌을 흘낏 보긴 하지만 눈에는 경계심이 아닌 호기심이 담겨 있을 뿐이다. 흘낏 보고는 자신들이 하던 일에 전념한다.
성 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위치가 제국의 내부인 만큼, 병사 들의 태도는 기강이 잡혀 있지 않았고 너무 가벼웠다. 제대로 된 관문 은 커녕 귀찮다는 듯 손부터 휘젓는다. 안의 마을 역시 마찬가지. 활기 차지도 않지만 침울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제국의 분위기는 거의 다 이렇다. 그리고 도착한 곳.
아는 신전이라.
로아돌은 도착한 곳을 올려다보면서 약간 허망한 느낌이었다. 제대 로 말도 해주지 않고, 손을 봐준다기에 알려지지 않은 어마어마한 고대 의 신전이라던가. 내심 그런 것을 조금 바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신전이긴 신전이었다. 빛의 신 라를 받드는 수수하고 어디에나 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조그마한 신전.
“뭐하고 있어?안 들어가고”
말 위에서 사부가 로아돌을 발로 툭 치자,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걸 음을 옮겼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 역시 자신을 싫어하는 건 지 알 수가 없다.
신전의 안은 한산했다. 애초에 부패 할대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 먹 기 위한 신관들은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아마, 신관들은 다 농민들과 함께 밭을 가꾸러 갔을 터였다.
아직 수습인지, 신관 복이 어색한 소년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뜰을 쓸고 있다가, 외지인이 신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웃는 얼 굴로 인사를 하려 했다.
그 전에 사부를 보더니.
“허억!
갑자기 놀라며 뛰어 들어간다. 외부인인지라? 아니다. 신관은 오히 려 외부인들을 환영한다. 바깥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들이 의례적으로 내는 기부금은 신전 살림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반 기면 반겼지 이런 반응은 없다.
보통은 말이다.
곧,수습 신관을 필두로 서너 명의 신관들이 우르르 뛰어 나온다.
“허억?!
“오,오셨다!!저 분이 결국 오고 말았어”
신전의 신관들은 사부를 아는지, 그를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른다. 지 독한 무례이지만서도.
그러나 분명,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시선은 존경에 가깝다. 그리고 뭐 랄까. 저 반면에 나오는 경악함이란. 반가워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쩔 쩔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모르게 자신에게도 동정의 눈길도 쏟아지는 것 같아 로아돌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사부는 히죽 웃었다.
“나 왔다”
“어,어서오십시오.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
신관들 중 가장 나이가 되어 보이는 자가 와 성호를 그으며 인사를 건낸다. 사부는 오만하게도 음 하며 고개를 한번 끄덕일 뿐. 그러나 신 관들은 모두 그의 태도를 당연한 듯이 바라본다. 특히 수습 신관의 저 동경에 가까운 시선이란.
‘대체, 왜?’
그들의 안내로 신전 안으로 들어가며 로아돌은 한층 더 사부에 대한 의문감이 늘었다.
“그럼 이 녀석은 방으로 안내해줘. 난 그 노인네 방으로 갈 테니”
“네.
심드렁한 사부의 말에 나이도 더 많아 보이는 중년의 신관은 충실히 로아돌은 안내한다. 무언가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불쌍하다는 듯 자꾸 흘낏 보자 로아돌은 언짢아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꼴이 이렇지만 동 정 받을 이유 따윈 아무것도 없다.
원래의 신분이라면 당장이라도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 보겠지만 지금은 그저, 일개 검사 로아돌일 뿐이니. 그저 꾹 참고 넘어가야 했 다.
“편히 쉬십시오”
일반 여관보다 조금 떨어지는, 평범한 방이었다. 물론 로아돌이 보기 에는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문명의 해택을 누리게 된 로아돌이었다. 달리면서 세수도 제대로 못했기에 그 기품 넘치던 모습은 완벽하게 거지로 돌아 서 있었다. 윤기 나던 금발은 먼지투성이로 차라리 갈색에 가까워져 있 었고, 미공자라 불리던 얼굴에는 때가 가득하다. 물수건으로 닦아낸 적은 있었지만 그저 땀만 닦아 내는 정도다. 씻을 것을 찾아보니 침대 옆에 세수 하라고 가져다 둔 것인지, 큰 그릇에 물 이 한 그득 담겨 있었다. 로아돌은 옷을 벗어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먼 지를 털어낸다. 그리고 그릇에서 손으로 물을 퍼, 얼굴에 끼얹는다. 욕 실에서는 언제나 시중을 담당하던 이가 있었기에 로아돌이 자신의 몸 을 만지작거리면서 씻는 것은 무척 어색했다.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대로 된 목욕이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한 로아돌이었다.
“결국 왔나”
방에 단 둘이 남자, 노신관은 사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신전의 책 임자인 듯,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더 화려한 복장이었지만 그것도 흙으 로 얼룩져 있어서는 별다른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밭에 있다가 온 탓이리라.
“약속대로. 준비는 해뒀을 거라고 믿는데?”
사부는 능글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노신관은 창가를 바라보며 성호 를 그었다
“그토록 찾던 자가 함께 왔다던 청년이로군.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할 셈인가?”
“물론이야. 찾아냈으니 즉시 해야지.”
“죽을지도 모른다”
“안 죽을 놈 데려왔어”
장난스럽게 얘기 했지만 사부의 눈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진지한 빛이 감돌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상대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다. 그 걸 알아챈 노신관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기도를 올린다.
“아아 라여.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나이까.”
“어허, 거참. 왜 그리 난리들이야.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걸 가지고. 전에는 뭐든지 해주겠다며?”
“시끄럽다!이런 인의에 어긋나는 일인 줄 알면 네 녀석의 도움을 거 절 했을 것이다!”
“진짜?”
“....”
노신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말은 이렇게 했지 만 그때의 상황은 정말 다급했다. 아마 이 눈앞에서 깐쭉거리는 자가 없었다면 몇 명이 죽어나갔을 지도 모를 대참사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가 부탁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 다. 차마 인간으로써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수명의 생명과 맞바꾸어 한 약속. 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아니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준비는 다 되어 있네. 진작에 다 해두었지. 언제 할 텐가?”
“그렇게 나오셔야지. 음.녀석도 많이 지쳤을 테니 오늘 하루는 쉬라 그러고. 내일 아침에 할까?
아주 커다란 자비를 베풀듯이 말하는 사부. 그에 노신관은 아직 보지 도 못한 청년에게 동정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