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6장. 절대 의지. (끝 )
바이파 공작은 가출한 후계자를 찾을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다고 했 다.그것은 공적으로는 결코 이 수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 그러니 몰래 나가면 찾지는 않겠다 라는 뜻일 것이다. 즉,가족들 중 누구에게 도 알릴 수 없다.
가출을 위해 로아도르가 챙긴 것은 많지 않았다. 혼자서 다녀본 기억 이 없었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단 탓이다. 시종을 방 바깥으 로 내보내고 간편한 (그의 기준에는 그렇지만 입고 나가면 다들 놀랄 정 도로 화려한 옷들이다. )옷들만 몇 가지. 그리고 돈이 될 만한 것들과 집안에 있던 질 좋은 철로 만들어진 검 한자루를 챙겼다. 저런 식으로 나갔다간 황야에서 굶어 죽기 십상이었지만, 그만큼 로 아도르는 모험, 여행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저 돈만 넉넉하게 있으면 되겠지 하는 도련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밤이 깊어 가자, 로아도르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사부와 따로 약속한 것은 없지만, 길을 가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척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툭.
그리고 거리까지 나갈 필요도 없었다. 로아도르가 평소에 아끼던 애 마를 가지러 마구간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그의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 이 있었던 것이다.
“자아, 도련님 준비는 되셨나?”
“네.
왠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놀라지는 않았지만, 내심 스승의 정체 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경비 체제가 더 엄중해졌는데 공 작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자신의 움직임까지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포착하고 있는 것은 로아도르 뿐만이 아니었다.
“거기, 커다란 덩치도 나오시지.”
그러자. 복도의 한 모퉁이에서 듬직한 체격을 가진 이가 모습을 드러 낸다. 로아도르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자였다.
“에,엘리엇?”
엘리엇은 입을 꾹 다물고 로아도르를, 정확히는 사부를 노려보고 있 었다.
“공작님께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아도르. 당신을 정체도 모 르는 자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채앵!
그는 진지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파랗게 타오르는 검. 로아도 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은 진면목을 드러내는 엘리엇. 소드 마스터의 살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 가르안 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인다. 세삼 대단한 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씨구. 한판 붙자?”
그러나 겁먹은 기색 없이 사부는 어깨를 들썩인다. 엘리엇은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사부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서라. 이 비싼 저택 날려 먹는다”
“무례한 자로군”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나가서 붙자고”
사부가 시큰둥하니 대답하자, 엘리엇은 그를 노려보다가 검을 집어 넣었다.
이미 얘기가 되었는지, 엘리엇과 함께 뜰로 나가는 동안 아무런 제재 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저택에 사병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엘리엇은 아마 이럴 생각으로 모든 사병을 치워둔 것이 분명하다. 뜰의 중심에 이르자 사부는 매고 있던 가죽 가방을 바닥을 내려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그 안을 뒤적거린다. 그 옆에 서 있던 로아도르는 의 외의 물건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건 다 엉망진창이지만, 그것만은 깨끗하게 접혀 있다. 천이라 보기에는 묘한 윤기가 흐르고, 가죽이라 보기에는 너무 얇다. 옷 같지 는 않다. 그리고 고정하기 위한 금속 바클이 있었다. ‘망토?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로아도르는 그것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 에 휩싸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지.
그저 망토에 불과한데도.
이윽고, 사부는 그 망토와 한 세트로 보이는 가죽 장갑 같은 것을 꺼 내 끼었다. 그것은 단 한쪽만. 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손가락을 까딱 거린다.
“자,붙지.”
“그게, 끝인가?”
망토를 멍하니 주시하던 로아도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다. 처음으로 보는 분노한 엘리엇의 얼굴이었다. 이 오러 소드를 앞에 두고 저런 건방진 태도라니. 겸손한 성격인지라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넘치던 엘리엇은 진심 섞 인 분노를 그에게 터트린다.
“생각보다 높이 쳐주는 거니까. 걱정 말고 오시지.”
분노한 소드 마스터를 앞에 두고 저리 태연할 사람은 이 세상에 저 사람 한명뿐일 것이다.
그럼!
엘리엇은 크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가르안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짙 은 푸른색의 오러소드는 잔상을 남기며 스승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벰과 동시에 소드 마스터의 최고의 장기. 검기를 쏘아 보내며 검보다 먼저, 날카로운 마나가 사부를 집어 삼킬 듯이 쏘아져 나갔다. 그 화려함과 강대함에 로아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품위 없이 입을 벌리 고 만다.
그리고 사부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 빛을, 튕겨냈다.
콰아아앙!!
저택가의 뜰의 한쪽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강대한 위력이었건만, 정 작 그것을 정면으로 튕겨낸 사나이는 심드렁한 태도로 서 있을 뿐이다. 아니, 그 심드렁한 잔상 ’은 곧 사라져 버렸다. 스르륵.
그 사이, 사부는 엘리엇의 앞에 서서 타오르고 있는 검을 손아귀로 움켜 쥔 것이다. 엘리엇은 경악할 세도 없었다. 타닥타닥.
검기가, 검을 쥐고 있는 장갑을 쉴 세 없이 베어내려고 하고 있지만 흠집도 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해 마나가 바깥으로 흘 러나오고 있었다. 정작 검을 쥐고 있는 사부는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그리 비싼 검은 아니지?”
라는 말과 함께.
챙강.
가볍게 검이 부러져 버린다. 곁에서 보고 있는 로아도르도 로아도르 지만, 완전히 농락당한 엘리엇은 도저히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듯 부러진 검과 그 검의 파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정작 원인을 제공한 본인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사부는 로 아도르를 향해 외친다.
“봤냐!이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생기지?”
“아....”
멍하니 서 있던 로아도르는 그제서야 사부의 의도를 눈치 챈다. 잔상 이 남을 정도의 움직임. 귀찮음을 피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사부를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믿고 있지 않았 다.어떻게 그리 쉬이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대마왕이니 마왕이니 하 는 것이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지만, 그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던 것 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 또한 사실.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그토록 꿈꿔왔고, 소망해왔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
그것을 넘어설 다른 힘도 세상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하,하하하!!!”
멍청하니 서 있던 엘리엇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사부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선다.
“뭐,뭐야, 갑자기 미쳤나?!”
“이제서야 당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 다.”
엘리엇은 정당한 예를 취하며 그에게 두 손을 모은다. 사실 분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뛰어나지 않은 자가 감언이설로 속여 로아도르를 데려간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자는 무례할 지라도 정녕 뛰어난 자였다. “부디. 로아도르 를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어....그려..”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어 보지 못했는지, 사부는 어설프게 마주 예를 표한다. 엘리엇은 빙긋 웃는다. 아주 예의와 담 싸놓고 사는 사람은 아 닌 모양이다. 그저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우지 못한 이일 뿐. 엘리엇은 진정 그에게 감사했다. 로아도르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저자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저 것은 오로지 순수한 힘으로, 극 에 달한 육체로 지금의 결과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아니, 극이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그것을 넘어선 뭔가를 가지고 있 는 것이다. 그런 만큼, 마나 부적응자인 로아도르에게는 최적의 스승일 지도 몰랐다.
이토록 무참하게 패배했음에도, 엘리엇은 한결 시원한 표정으로 로 아도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패배에 대한 실망보다는, 적어도 믿 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자에게 로아도르를 맡긴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마주보는 로아도르와 엘리엇. 엘리엇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로아도르. 당신을 친동생처럼 생각했습니다.”
“엘리엇.
“부디, 당신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로아도르는 고개를 숙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울음을 간신 히 참고 있는 것 같다. 엘리엇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주저하다가, 살 며시 로아도르를 안았다.
옆에 있던 사부는 뭐라고 한마디 빈정거리려다가, 입을 꾹 다문 다.
이런 닭살 돋는 장면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방해할 때 와 해선 안 될 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는 일단 로아도르를 끌고 나왔지만, 그의 겉모습을 보고는 한숨 을 푹 내쉰다. 지 딴에는 수수하게 차려 왔다 이건가 본데 누가 봐도 가 출한 도련님이오 하고 알리고 다니는 꼴이다. 게다가 저 윤기가 좔좔 흐르는 명마. 하기사, 도련님이건 뭐건 알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저런 복장으로 수련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 팔아 버린다. 말은 나중에 먹을 지도 모르니까 타고 다닌다 치고. 돈 될 만한 것은 다 팔아버린다.
로아도르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가 하는 수련은 무척 돈이 많이 들 것이다.
아마도 식비가.
그렇게 야시장을 돌고 있을 때였다.
“사부님.
“뭐냐.
“이미 아실 것 같습니다만. 저는 마나 부적응자입니다.”
역시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었다. 오히려 눈으로 빨리 말하라 고 독촉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수명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가르안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그래 그거”
그제서야 뭘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은 듯. 사부는 ‘어떤 짐작 ’을 그에 게 얘기했다.
로아도르의 얼굴이 조금 화색이 돈다.
그러나.
이윽고. 어두워져 가고.
곧,굳게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안타까운, 미안한 마음으로 멀리서 보이는 황궁을 올려다본 다.
그리고 수도의 외곽에 이르렀다. 그토록 화려했던 도련님은 없고, 막 여행을 떠나는 철부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자아. 너.그러니까. 로댕 데 파팡이라고 했던가? 그제서야 제자의 이름을 확인하려 든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야 저런 이름이 나올 수 있는지. 로아도르는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아닙니다. 로아도르 반 바이파라고 합니다.”
로아도르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토록 자신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이라니. 사부라는 자가 아니었 다면 당장이라도 결투를 신청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부이기에, 로아 도르는 속내를 감추며 정중히 그의 말을 정정했다. 역시, 개그 센스도 고려해야 했다. 사부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뭐 그렇게 길다냐. 그냥 로아돌이라고 부르겠다”
고작해야 한 글자 차인데.
“예.
이름 따위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모든 것을 버리고 왔으니 이름도 버려도 좋다.
다만, 다시 되찾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의 애마에 대신 올라타 있는 사부는 심드렁하니 말했다.
“자아, 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