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33화 (33/100)

제목      제  6장. 절대 의지. 3

다그닥다그닥.

마차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로아도르. 수도는 아직 축제의 여운이 가 시지 않았는지 많은 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다니고 있다. 그 이야 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소드 마스터의 탄생, 가르안의 이름이 담겨 있 다. 로아도르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 하더라도 그 상대 자의 입장으로, 단칼에 패배가 되어버린 이름으로 남을 뿐이다. 저자들의 말에 신경 쓸 것 없다고 여기면서도, 로아도르는 씁쓸한 표 정을 감출 수 없었다.

황궁에 이르자, 문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창을 들어 올리며 경계한다.

“충!통과!”

지휘관인 듯한 병사는 바이파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를 보고 단번에 통과를 허락한다. 그러자 병사들도 경계 태세를 해제한다. 허술한 듯한 검문이지만 이곳은 일차. 일단 황궁에 입궐할 자격이 있는 자를 가르는 관문에 불과하다.

투박한 외관을 지나, 화려한 황궁의 내성에 이르자 제 아무리 로아도 르라 하더라도 마차에서 내려 검문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외관을 지 키던 병사들과는 달리 이곳을 지키는 이들 중에는 황실 친위대의 기사 조차 포함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문조차도 굳게 봉해져 있다. 바이파 가문임을 알아본 듯 곧 한 병사가 기사에게 전달했고, 그 기 사는 로아도르를 향해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틴경. 몸이 많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친위 기사단의 일원이 아는 체 하며 인사를 건냈다. 로아도르 역시 그의 얼굴은 알고 있다. 로아도르 역시 수도에 사는 만큼 황궁에 와본 적은 몇 번 있으니까. 아직 성년이 되기 전인지라 황제를 배알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의 의미 있는 눈짓과 인사를 무시하며 로아도르는 고개를 끄덕였 다.

“수고가 많소. 아버지를 뵈러 왔소만.”

“바이파 공작님을 말입니까? 네.알겠습니다. 통과시켜 드려라!”

기사의 외침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병사들은 문을 열기 시작한다. 황 궁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치스러운 광경에 익숙 한 로아도르는 별다른 감흥 없이 걸어갔다. 규모면에서만 다를 뿐이지 공작저 역시 화려하기로는 황궁에 뒤지지 않으니까. 낯익은 길을 걸어가며, 로아도르는 관리 중 하나를 붙잡아 물었 다.

“바이파 공작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바이파 공작을 찾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바쁜 업무에 시큰둥하니 있던 관리는 바이파라는 이름이 표정을 굳히며 예를 표한다.

“현재, 황제폐하를 뵈고 계시는 중입니다. 나오시면 바로 연락드리겠 습니다. 어떤 분이라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바실론 후작이라고 전해주게.”

그러자 그 관리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황급히 수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유명한 소문의 주인공. 아니 정확하게 말 하자면 그 주인공의 상대역이었던 자다.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불편한 시선이 잔뜩 느껴진다.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로 아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황궁에 많이 있는 대기실 중 하나로 들어갔다. 이미 여러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로아도르가 들어 오는 순간 일제히 조용해진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니, 다시 그 귀족들이 서로 수근 거리면서 로 아도르를 흘낏 흘낏 쳐다본다. 로아도르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이 갔다. 워낙에 뒷소문 같은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니까. 그 역시 그런 것에 얽 매여 있는 귀족이니 만큼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현재 수도가 그런 만큼이나, 황궁 역시 큰 소란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였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루리아 공주와 가르안이라는 이름 때문이었 다. 결과가 로아도르의 승리로 끝났다면 이렇게 떠들썩 할리도 없다. 그저 있어야 할 일 도중에 일어난 해프닝에 불과하리라. 문제는 가르안과 루리아 공주와의 맹세. 그것을 이미 모든 자들이 알 아 버렸다는 것에 있다. 게다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이였다면 모를까, 그 상대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소드 마스터. 제국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탐을 내는 귀중한 인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1의 공주라는 외교, 내실을 다지는 데 있어서 는 최고인 카드까지 사용해야 하는 것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황실 계승자 제         1순위. 그녀의 남편은 대공으로써 실질적 제국 의 지도자가 될 확률도 많았으니까. 가르안 개인과 바이파 가문과 황실 의 연줄을 생각하면 단연 후자였지만, 이미 맹세를 선언했으니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여러모로 애매한 문제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뭐라고 떠들어 되던 간에, 로아도르의 머릿속에 있 는 것은 가르안과 강림하는 마왕, 그리고 대마왕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하나하나가 너무나 놀라운 사항이라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다. 그 때,황궁의 시종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바이파 공작님께서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대기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격이 낮은 곳. 바이파 공작쯤 되는 이라 면 황궁이라 할지라도 개인 접대실 정도는 준비되어 있다. 로아도르가 시종을 따라 나가자, 그의 등 뒤로 한층 더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며 귀 족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몸은 좀 괜찮은 것 같구나.”

“예. 이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할 따름입니 다.”

“집에서 쉬지 않고, 황궁에까지 왔다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이겠구 나.”

책상에 앉아 바이파 공작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본 다.역시 바이파 공작은 공작이었다. 아들의 몸 상태에 대한 염려에 앞 서, 그 몸 상태에도      불구  ’하고 이곳에까지 와서 할 얘기가 우선순위인 것이다.

“예.

아버지의 냉정한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로아도르는 어제 스승 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공작에게 꺼냈다.

천년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왕. 그리고, 대마왕 루스 사이퍼에 관 한 것. 그리고 그가 천년전의 마왕을 상대할 자로 자신을 지목한 것 까 지도. 로아도르의 말을 다 들은 바이파 공작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진 다.

“낯선 자를 그리 쉽게 들이는 우리집의 경비 체제에 대한 것은 그렇 다 치고, 이건 너무 믿을 수 없는 얘기로구나. 갑자기 대마왕 루스사이 퍼이라니.”

너무나 황당하고 커다란 얘기인지라, 바이파 공작은 차라리 공작저 의 경비 상태가 더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로아도르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정녕 대마왕이 강림한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한다고 해 도 늦습니다. 저는 그리 판단했기에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음.”

아들의 판단력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낯 선 침입자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작이 갈 등하고 있는 듯하자, 로아도르는 자신이 생각해온 것을 차분히 얘기했 다.

“일단, 대마왕의 강림의 여부를 조사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그것을 근거 삼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전시상태를 항시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할지라도, 즉시 전시 체재로 변환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대마왕 강림 여부에 없이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있던 제국인 만큼, 필연적으로 군사적 문제 에는 느슨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때 십여명이나 있었 던 소드 마스터가, 다섯 이하로 줄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흐음. 과연. 그 정도는 내 사적인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 조사 후,정녕 그 말이 사실이라 판단되면 즉각 군을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써두마.”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사실, 이제부터가 로아도르 개인으로써의 볼 일이다. 로아도르는 일 어나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자, 죄송하오나 한동안 바이파의 이름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대충 짐작은 했다. 바이파의 이름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어깨에 놓여 있던 책임 과 의무까지 내팽겨 치겠다는 소리다.

“그 분의 말로는 가르안을 이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허튼 소리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라도, 모든 것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뒷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바이파 공작은 짐작했을 것이다. 묵묵히 아들을 내려보던 바이파 공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아비로써도, 공작으로써도 말릴 수밖에 없는 일이란 건 알고 있을 터이다. 그래도 가겠다는 것이냐?

“예.

“네 수명에 대해서도 넌 알고 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 겠다는 것이냐?”

“예.

탕!

공작은 책상을 손으로 내치며 거칠게 일어났다. 좀처럼 표정의 변화 가 없는 바이파 공작에, 분노라는 두 글자가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멍청한!도대체 그자가 어떤 자라서 그런단 말이냐! 세상에 자신보 다 뛰어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그 자를 뛰어넘기 위해 생명 을 걸겠다고?!아무런 이유 없이?! 이토록 멍청한 행위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그 자를 뛰어넘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모든 의무와 책임을 벗어난다고?!지금 너를 움직이는 것은 추잡한 질투와 시기심이다!네가 뭐 그리 잘났다고 그리 비장한 척 한단 말이냐!”

주르륵.

아버지의 호통에 로아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한번 눈물을 흘리 고 만다. 아버지가 하는 말은 모두 알고 있던 것. 그러나 인정하지 않았 던 것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분노 속에,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한가 득 느껴진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 가르안 을 질투하고 있습니다. 부럽습니다. 너무나 부럽고, 너무나. 너무 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로아도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단., 한번만이라도...이겨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불가  (不可  ).허락 할 수 없다”

단호한 바이파 공작의 말에 로아도르는 고개를 푹 숙인다. 당연한 말 이었다. 수련을 위해 집을 나가겠다니, 이런 철부지 같은 말이 통할 리 가 없다.

그러나,

공작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만, 집 나간 아들을 찾을 정도로 공작가는 한가하지 않다”

“아,아버님.”

그러자 바이파 공작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난, 아비로써도 공작으로써도 실격인 모양이다. 후계자가 집을 나가겠다는데 말릴 수조차 없구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이 집을 나가겠다는데 말릴 수조차 없구나. 난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공작의 한탄에 로아도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든지 해줄 수 있는데. 공작이라는 이름하에 설령 로아도르가 잘못 된 사치를 누리겠다 하더라도 그리 해줄 수 있는데. 왜,왜 해줄 수 있 는 것은 이런 것 밖에 없단 말이냐. 왜 아들은 이런 것을 원한단 말이 냐.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단 말이냐. 아버지에게 마음 속 깊이 절을 하며 나온 로아도르, 문 앞에는 한명 이 여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 봐도 고귀한 신분을 지니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품 있는 귀부인.

“아르시엘 공주님”

로아도르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이 공주님은 자신에게 기사가 되어 달라고 했다. 레이디의 기사가 되어 달라고 했다. 지금에서야 그 말의 의미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 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던 탓일 것이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아르시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정 하게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던 남자이지만, 황궁에 왔다는 애기를 듣고 왜 이리 뛰어왔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로아도르는 천천히, 그녀의 발에 맞춰        걸었다. 아르시엘 공주는 그 의 옆에서 말 없이 그를 따를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정원에 이르자,  그제서야 로아도르는 입을 열었 다.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거슬리는 것뿐이었지요. 그저, 뛰어 난 평민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르안 카이자. 이 로아도 르와의 결투 끝에 언니의 혼약자가 된 사람.

“하지만 그는 너무나 강했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 져만 갔지요”

로아도르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척 맑고 높았다. 보기만 해도 상쾌할 것 같지만 그의 눈에는 가르안이라는 존재와도 같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결코 닿지 않는.

“저는 그 자를 시기했습니다. 가문의 이름으로, 긍지로 그 질투심을 포장했지요. 하지만 어느새,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절망했건만 아직도 남아있었다. 가르안이라는 존재를 뛰어넘는 것만인 목표가.

정원의 한가운데, 나무 밑의 그늘에 이르자 로아도르는 우뚝 멈춰 섰 다.

“지금의 저는 공주님의 기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로아도르는 반쪽 무릎을 꿇으며 아르시엘을 올려다본다.

“언제고,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나는 이 발랄한 공주님이 자신의 방문을 두들겼을 때부터 마음 을 빼앗겼던 것이다.

로아도르의 고백. 왜 이리 기쁘면서도 서글프게만 느껴지는지. 아르 시엘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려다가 거두며, 간신히 답한다.

“저도 기다릴게요. 부디 당신이, 저의 기사가 되기를. 아마도 스승을 따라가면 오랜 세월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힘은 강하다. 이 공주의 마음이 희석되어, 언제고 다른 이를 사랑할 수 도 있을 터.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탓할 자격이 없다.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을 위해 나아가려는 이토록 이기적인 자가 한 레이디가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한마음으로 자신만을 기다려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부탁이 있습니다”

“어떤?”

“한번만, 손을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아르시엘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레이스 재질로 된 하얀 손장갑을 벗 으며 로아도르에게 손을 내민다. 공주답게 작고 아담하며, 예쁜 하얀 손이었다.

로아도르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인 것처럼. 마치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만약, 자신이 가르안을 넘어 설 수 있다면.

언제고, 그대가 다른 이의 레이디가 된다고 하더라도. 절망 속에서도 나를 일으켜주려 했던 당신을 위해. 숨어서라도 당신의 기사가 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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