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6장. 절대 의지. 1
루리아 공주가 달려가던 그때, 아르시엘 공주 역시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차분히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며 로아도르와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녀의 뒤를 시녀들이 허 둥지둥 따르지만 그녀는 따라오지 말라며 앙칼지게 소리를 지른다. 검술제의 바깥. 모든 환호가 무대 안에서 울려 퍼지고. 그 밖은 고요 하다.
그렇게 울면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로아도르. 드레스를 잡고 숨을 헐떡이며 아르시엘은 그를 막아 섰다. 그녀는 로아도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러면 안된다고 이성이 그리 도 외치고 있건만.
가슴으로 행동하고 만다.
“맹세하세요.
로아도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맹세하세요!”
다시 한번 외치는 그녀. 아르시엘은 용기를 짜내, 필생의 고백을 한 다.
“부디 저를 위한 기사가 되어 주세요.”
“안됩니다. 저는 이제 검을 잡아도 의미가 없는 자. 그제서야 로아도르는 힘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말투로 중얼거리듯 이 말한다.
“그렇다면, 저를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요!”
로아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저를 위해서 ’ 라는 말 의 의미에 극히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귀찮았다. 공주를 상대로 말장난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었다. 평소라면 잊지 않을 예의조차 잊고, 그는 아르시엘 공주를 뒤에 두고 걸음을 옮긴다.
쓸쓸한 패자의 걸음.
“멈춰요 로아도르!”
그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연신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 인다.
털석.
그녀는 주저앉으며 결국 눈물을 흘린다.
“멈춰요....일어나요....긍지 높은 바이파.....로아도르.....”
“로아도르는 아직도 그대로인가?”
바이파 공작의 말에 가신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차마, 주인에게 해줄 말이 없었으리라. 결승전에서의 패배는 아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듯 하다. 바이파 공작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인 것은 마찬가지 였지만,
그 정도로, 자부심이 높은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아끼던 그의 아들이었다.
“하다 못해, 생명을 연장할 수라도 있다면”
시름이 한숨이 되어 나온다. 소드 마스터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오래 살아남아 바이파의 이름을 이어 주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공작이 되었을 텐데. 그런 것을 떠나서도 정말 훌륭한 아들이었다. 이미 손을 쓸 수 있는 바는 다 써두고 있었다. 황궁의 대마법사에게 도 자문을 구했고, 모든 치유사들을 통해 해결책을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반응은 그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 다.아들의 사망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심정은 이루 말할 것 없는 것이 었다.
다시 술병 하나가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방에는 로아도르가 불도 키 지 않고 홀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들이키고 있다.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그저 이렇게 살다가 죽을 텅 빈 육체 하나뿐 이다.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바이파라는 그 긍지조차도.
덜컥덜컥.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인가 했지만 소리가 너무나 인의적이었 다.로아도르는 멍청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덜컹!
이윽고 창문이 열리고.
담 넘어, 창 너머 들어오는 주제에 남자는 당당하게 영차영차 거리며 기어들어오고 있는 한 인물.
그러나, 로아도르에게는 그것조차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낯선 이 가 당당하게 방에 들어오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 넘어오는 이도 가관이 었다. 마치 친구 집에 들어오는 듯한 그 당당함이란. 당연히 로아도르가 자신을 저지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그는 들어오자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여어. 만나서 반갑다”
“이 곳은 공작가다. 썩 사라지도록.”
“알고 들어 온 거니까 걱정 말게나. 와아. 역시나 귀족의 저택 답구 만.저렇게 술을 처마셨는데 이 향기라니. 방에 술 냄새가 안나!”
특이한 방식으로 감탄하며 남자는 제 것인 마냥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는 “캬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넌 누구냐?
“누구 같냐?
로아도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이 만큼 짜증 나는 상대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저 거슬리는 이방인에 불과했 다.
자세히 살펴보니 인상은 무척 온순했다. 흑발이라는 것이 가르안과 같이 무척 거슬렸지만 눈을 보니 흑안은 아니다. 푸른 빛으로 연신 빙 글 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가끔 영지 시찰을 나갔을 때 거리에서 빵 팔던 장사꾼 같이 생겼다. 남자의 무례에 분노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버릇처럼, 살아 있었 을 때처럼 행동할 뿐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넌 뭐냐?”
“흐음. 그럼 내가 반대로 묻겠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들어 왔다고 생각하나?
그제서야 로아도르는 술기운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꼈다. 이 곳은 공 작가다. 그 말 그대로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다. 설령 나쁜 뜻을 가진 이 라 할지라도 일백명에 가까운 사병이 지키고 있는 이 저택을 쉬이 들어 올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바깥에는 아무런 소란이 없다. 암살자인가? “어떻게 들어 왔는지 궁금해지지?”
그리고, 바로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들어 왔지.”
방금 전까지 정면에 있던 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여 전히 앞에 그 남자의 모습이...
스르륵하니 사라졌다.
잔상이었다. 급속도로 움직인 끝에 분신을 남긴 것이다. 그것들은 하 나가 아니었다. 곧 남자는 수십명으로 나뉘어서 로아도르를 둘러싼다. 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드는 자, 발레를 하는 것처럼 발끝으로 서며 빙 글빙글 도는 자. 천장에 거미처럼 붙어 있는 자. 그 와중에도 술병 하나 꿰차고 꿀꺽꿀꺽 들이키는 자. 등등.
남자 ‘들 은 히죽 웃으며 일제히 로아도르에게 말했다.
“신기하지?”
마법이라 보기엔 너무나 희극적. 그러나 웃으며 보기에는 너무나 섬 뜻한 광경이다. 로아도르는 습관적으로 이미 부러져 버린 오거 린을 찾 아 손을 더듬으며 외쳤다.
“넌 누구냐!악마인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남자. 그는 허리를 숙여 로아도르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까딱 거린다.
“상상력이 부족하시군. 보통 악마 나오는 시츄에이션이라고 하면 뻔 하잖아. 절망에 찬 주인공.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거는 음산하고 낮은 목 소리. ‘자 듣거라, 복수를 원하는 자여!내가 너에게 힘을 줄지니 ’ 이것 도 아니면 거울 속의 자신이 말을 건다던가, 혹 이것도 마음에 안 들면 하다못해 목탄으로 그린 것 같은 거무튀튀한 마법진에서 튀어나온다던 가,이딴 식으로 와야지. 설마 담 넘어 들어오겠나”
술병의 밑바닥까지 마시겠다는 듯, 남자는 추하게 혀를 술병에 넣고 낼름낼름 핥는다. 저 추한 행동이 나름 잘 어울린다는 것도 문제다. 남자는 술병을 들어, 눈으로 입구를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남은 술이 없다는 것에 실망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속임수 따위가 아니다. 흥미 있나? 이 움직임에? 너의 몸을, 이렇게 움직이고 싶은가?”
로아도르가 멈칫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남자는 술병을 집어 던지 며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린다.
“검술제를 봤다. 오오! 대단하도다 대단하도다. 위대한 소드 마스터 의 탄생!저 찬란한 광채로 빛나는 오러 소드를 보라!위대한 용사의 탄 생이로다!모두가 저 번쩍번쩍한 그를 찬양하라!검조차 부러트리고 질 질 짜고 있는 이인자에게 줄 시선은 없으니!오오오!”
“....”
이미 모든 것이 죽은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조용히 수명이 끝 나기만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유치한 남자의 도발에 이끌 려.
문득 검을 손에 쥐고 싶어진다. 다시한번 미친 듯이 휘둘러보고 싶어 진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가르안을 이겨보고 싶어진다. 남자는 조용 히 두 손을 내린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지고 싶지 않은 거지?”
“무슨 말이냐”
“음.아까도 말했지만 난 악마가 아니라서 너에게 줄 힘 따위는 없거 든? 그러니까 순식간에 뿅!하고 강해지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절대 지지 않는 다는 말도 터무니없으니까 하지 않겠어. 다만.”
남자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다.
“녀석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내가 키워주마.”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악마와의 계약 같은 우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와도 같은 길을 걷게 되지. 그리고 그 끝에는.”
절대 의지의, 궁극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인가? 나를, 나는 가르안을 이길 수 있는 건가?”
“몰라 짜샤. 너 하기 나름이다.”
이길 수도 있게는 만들어 줄 테니 잡아라. 남자는 눈으로 그리 말하는지 모른다. 이상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 마법사조차 아닌, 사람의 눈을 기만하는 마술사일지도 모르지. 마음을 놓게 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저 자의 손을 잡으면 중독이 될지도 모르고,혹은 꼭두각시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토록 자신 있게 가르안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로아도르는 이빨을 빠득 갈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남자는 아주 조금, 미래를 엿보았다. 남자의 눈에는 보인다.
대회장인가? 수 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것 같은 돔에 거대한, 그러나 엉망으로 무너져 있는 연무장.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이 들이 서둘러 빠져나간 흔적이 눈에 보인다. 한명과, 한 존재만이 중심에 있을 뿐.
무수히 많이 떠 있는 빛. 하나하나가 검의 형상을 띠고 있다. 아름답 다는 말이 절로 나올 모습에, 가장 빛나는 검 하나가 그들 사이에 군림 하고 있다. 그 검은 너무나 찬란하여 자신도 모르게 우러러 보고 만 다.
그 검은 그토록 찬란하건만.
한 남자는 그저 사람일 뿐이다. 대검을 들고 있다. 3m 는 될 것 같은, 전설 속에 나오는, 태초에 신과 싸웠다던 거인이나 들고 있을 법한 검 이다. 빛도 나지 않고, 떠 있지도 않는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검을 들고 있는 그는 강해 보인다. 굳게 다문 그의 입. 상대를 노려보는 눈.그자는 너무나 강해 보여, 남자는 경의감을 표하고 만다. 그 검은 그토록 우직하고 투박했다.
얼핏 보인 미래.
“푸하하하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굉장한 걸 찾았어! 생 각보다 더 굉장한 걸 찾았다고!이 얼마나 통쾌한가!배를 잡고 데굴데 굴 구르며 웃는다.
남자는 단언한다
인류에게 있어 대마왕은 분명 최대의 시련. 그러나, 엘 카이자의 후인이여. 네 녀석에게 있어서 최대의 시련은 바로 이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