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4장. 가르안 암살. 3
로아도르가 시종들이 저택으로 부축해서 들어간 다음. 아르시엘은 한동안 그가 땀을 흘리던 연무장에 남아 있었다. 공작저의 뒤뜰은 일반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다. 연무장 외에, 기마 훈련장 까지 갖춘 저택가는 황궁을 제외하고는 바이파 가문이 유일하리라. 그녀는 시녀들을 한명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그 넓은 곳을 걸었다. 방금 전까지 로아도르가 달리던 그 곳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어째서, 그토록 중요시 여겨왔던 체면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지, 아르시엘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토록 필사적인 모습. 무언가를 위해 달리던 소년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모르면서,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 이토록 감성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르시엘은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다. 틀림없이 자신은 그 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차분히 생각하 고 있다.
로아도르 반 바이파는, 루리아 공주의 혼약자 이니까. 설령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척 기쁜 일이겠지만 그 뒷일까지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언니의 혼약자 를 가로챈 악녀. 귀족들 사이에 퍼질 소문과 그에 따른 대가는 정해져 있는 수순이다. 그와 이루어진다는 것은 언니와 나. 그리고 로아도르에 게도 좋은 일이 못된다.
그러니 마음만으로 만족하자.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행복함과 동시에, 체념하고 있는 아르시 엘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낯익은 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여러번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로아도르의 전속 시종 소년. 도련님을 깨끗이 씻 기고 침대에 뉘이고 나온 그였다.
“에구. 정말 이러다 몸 먼저 상하시겠네”
로아도르의 전속 시종이 투덜투덜 거리며 갑주를 챙겨 들고 있었다. 물론, 단련을 전혀 하지 않은 시종으로써는 들기에도 버거운 무게였다. 이 충실한 시종에겐, 무거워서 라기 보다는 이 것을 입고 뛰었던 도련 님이 더욱 걱정되어 나오는 투덜거림이었다. 아르시엘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오래 되었나?”
“암요. 벌써 한달째라구요. 정말.”
그제서야 누군가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달은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뒤 돌아 보았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아르시엘 공주가 있음에 한 층 더 놀랐다. 그는 주워 들었던 갑주를 땅에 떨어뜨리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시지요”
“되었다. 그보다, 한달동안, 이라 했느냐.”
“예.그렇습니다.”
저 자연스러운 하대에 시종은 한층 더 움츠려 든다. 하지만 제 아무 리 어리다 할지라도 바이파 가문의 시종. 공주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부족함은 없었다.
아르시엘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로아도르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던 만큼 그의 꿈이 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저리도 단 련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왜?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 없이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시종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의문에 그녀는 그런 시종을 배려해 줄 정도까지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저택 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공주를 발견한 엘리엇이었다.
“황실의 충실한 기사. 저 엘리엇 데 더르힌이 아르시엘 엘 아스토 공 주님을 뵙습니다”
엘리엇은 이제 바이파 가문의 사람이지만, 그에 앞서 황실 친위 기사 단의 부단장이다. 기사의 서약을 맺은 곳이 황실이라는 뜻이다. 곧, 이 공주는 엘리엇에게는 주인과도 같았다.
그러자 아르시엘은 손을 내밀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일어나세요 엘리엇 경.”
엘리엇은 귀족으로서의 작위는 형편없지만 제국에 몇 안되는 소드 마스터. 뛰어난 기사이다. 공주라고 그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었 다.
그리고 내심, 그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상대였기 때문이다. 로아도르의 수련을 담당하는 이라면 시종과는 달 리,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요즘, 장기간의 휴가를 내었다고 들었습니다. 혼인 때문이라고 들었 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가 저렇게 말하고 있는 요지를 단번에 알아챘음에도, 엘리엇은 곤란하다는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로아도르의 수명에 관한 것은 비밀로 되어 있다. 저 시 종에게도. 아는 이는 바이파 가문의 직계들과 자신, 그리고 궁정 마법 사 델토스 정도일까? 결국 입을 한참동안이나 입을 달착이던 그는 공 주의 시선을 피하며 되물었다.
“공주님께서 어인일로 여기에까지?”
말을 돌리려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는 뜻이다. 바이파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몰아 칠 수도 없어, 그녀는 속으로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에리지에를 만나러 왔어요.”
속마음을 숨기며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다. 일단 그녀가 바이파 가문 을 방문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에리지에를 만나러 왔다는 것 정도 는 대의명분이 된다.
“그렇습니까. 에리지에는 지금 저택에....
별 의심 없이 말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엘리엇. 그녀를 만나 러 왔다면, 어째서 이런 뒤뜰에서 시녀 하나 없이 거닐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던 이는 누구인가? 아마도, 공주가 보 고 있던 그 소년. 그를 만나러 온 것임이 분명하다. 아르시엘은 로아도르가 감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로 눈치가 빠른 공 주다. 엘리엇이 말고리를 흐리자, 그녀는 당혹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빙긋 웃는다.
“엘리엇경. 그 이름 높은 기사님께서, 숙녀의 마음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틈을 주지 않고 휙 돌아서 가버리는 아르시엘.
“그런가. 로아도르는 이제, 이런 문제에 고민할 나이였군. 평범한 삶이었다면 말이다.
나지막히 중얼 거리는 엘리엇. 그 목소리에는 더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로아도르에게도, 저 발랄한 공주에게도.
“어쩌자고 로아도르에게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까. 대체 어쩌자 고.”
“사랑합니다.
갑작스런 고백에 루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기쁘다. 너무 기쁘고 부끄 러워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지난 1년.가르안과 루리아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거듭했다. 물론 첫 만남은 정체를 숨긴 체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공주라는 신분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가르안은 괜찮은지, 언제나 웃으며 그녀를 대해주었다. 말투만은 하대에서 존대로 바뀌었지만 그 자유스러움은 어디로 가지 않고, 만나는 순간마다 루리아를 공주라는 지위에서 잊게 해주었다. 천 천히 그를 남자로서 사랑하게 된 루리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주와 평민이 아닌, 남자와 여자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기,기뻐요.”
간신히 승낙의 말을 꺼내었다. 그러자 가르안은 진심이 가득한 웃음 을 한가득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언제나, 함께 하고 싶어 루리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연인과만 나눌 수 있는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에 게 프러포즈하는 가르안이었다. 그에게도 이 순간만큼은 가식 없이, 감 출 수 없는 감격에 휩쌓여 있었다.
가르안과의 포옹은 가슴이 두근 거릴 정도로 자극적이었지만, 그만 큼 루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살며시 가르안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하,하지만 저는 이미 혼약자가 있어요”
물론, 황제의 명으로 선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는 기정사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슬픈 듯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가르안은 로미오라도 된 듯 한 느낌이었다. 물론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비극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같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힘이 있다. 점차 각성해 가고 있는 엘 카이자의 힘!그것은 인간의 그 어떤 권위도 도전 할 수 없는 그 힘이다. 결코 비극적인 사랑으로 만들지 않으리라. 가르안은 그렇게 결심했 다.
“걱정하지마. 너와의 사랑. 난 포기하지 않아. 반드시 너와 결혼할게. 그럴만한 자격을 갖출게. 나를 믿어.”
말이 없는 루리아. 하지만 그를 믿겠다는 듯 두 손을 치우고 다시 살 며시 안겨온다. 가르안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쓸어 내린다. 하지만.
그에 거슬리는 것이 이 공주의 혼약자. 로아도르 반 바이파. 일단 녀석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가르안의 날카로운 신경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살기와 비 슷한 느낌. 루리아에게 숨기기 위해 한층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으 며,그는 살기가 느껴지는 곳을 노려보았다. 쟉셀은 창 밖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원이 저 너머, 부둥켜안고 있는 두 남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저건.
공주의 불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도 눈치 채지 못한 척 넘 어 가려고 했다.
저 정원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이건 아니다. 이렇게, 대 놓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귀 족들의 도에 어긋난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기 위해 입 밖으로 내는 것을 참아오던 말이 결국 터져 나온다.
“저 멍청한 공주가.”
뿌득.
안 그래도 가뜩이나 마땅찮은 공주인데 저렇게까지 철이 없나! 그의 시선이 루리아 공주를 떠나 그녀를 끌어 안고 있는 남자. 가르 안에게로 향한다. 공주도 공주지만 저 놈도 마찬가지다. 평민이라는 자 각이 없단 말인가? 주제에 어울리는 상대나 끌어 안고 있으면 천박하 다고 비웃어 주며 넘어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멍청해도 저 여자는 현재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여인이란 말 이다!
그때, 가르안이 고개를 들었고.
쟉셀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공포.
“뭐야, 뭐야!”
우당탕!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쓰러지며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도련님?!
쟉셀의 시종이 뛰쳐 들어 온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어 자신이 어떤 꼴로 있는지를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그 공포감은 조금도 줄어들 지 않았다. 냉정을 차릴 수도 없었다. 간신히 외치는 것이 고작이었 다.
“물러나!아무도 들어오지 마!!”
다가오려 했지만 거듭 되는 쟉셀의 욕설에 주춤 거리며 물러나는 시 종.방에 다시 홀로 남게 되자 쟉셀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뭐냐...가르안, 저 녀석은 대체 뭐인 거냐”
쟉셀은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너무나 무서워서 뭔 가로 자신의 전신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공포감이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