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20화 (20/100)

귀족이란,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말로 귀족이니까. 제목      제  4장. 가르안 암살. 2

“로아도르 반 바이파 님은 어떻게 되신 것이죠?”

아카데미로 돌아온 아르시엘. 그녀는 오자마자 단연 로아도르를 찾 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카데모로 돌아 온 것에 가 장 큰 이유는 그를 만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들려오는 얘 기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 앞으로도 올 기약이 없다는 것.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제적하지는 않았다는 이상한 얘기들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이 아카데미에서 제일 높은 학장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었다. 고귀하신 황녀가 직접 물어오자 루쉴드 자작은 손 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싶은 심정에 가득 휩 쌓였지만 고귀한 신분 앞에 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는 없다.

흘러내리는 땀을 최대한 눈에 안들어가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루쉴 드 자작은 간신히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님. 다만 공작저에서 그리 연락이 왔을 뿐입니다.”

“이런!어딘가 편찮으신 건가요?”

아르시엘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런 상태에서 짐작할 수 있 는 것은 로아도르가 어딘가 앓고 있다는 것. 하지만 잠깐 앓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공 작가에서 연락을 안해 왔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것은 아마도. 좋지 않 은 질병이라거나       성병  ),

혹은 생명이 위험한 병이라거나.

멋대로 결론을 내린 아르시엘은 강요, 협박이 담긴 시선으로 루쉴드 자작을 내려 보았다.

“외출 허가를 내주시겠어요, 루쉴드 자작님?”

스트레이트로 들어오는 아르시엘. 루쉴드 자작은 당황하면서도 허락 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외출 허가는 커녕, 학장 자리를 내 놓으 라고도 할 자격이 있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아가씨였다. 치맛자락을 잡고 총총 뛰어가는 그녀를 보며, 루쉴드 자작은 멍하니 중얼 거렸다.

“에틴경은, 루리아 공주님의 태중 혼약자로 알고 있었는데.....아니 었나?”

공작가는 뜬금없는 공주의 방문에 난리가 아니었다. 황족이 귀족을 방문하는 일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만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난리 가 날 수밖에.

그러나 이곳은 아스토니아 제국 제              1귀족임을 자랑하는 바이파 공작 가의 저택. 엄한 훈련을 받은 시종과 시녀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차근차근 공주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황족이 귀족을 방문하 는 드문 사태. 그 드문 사태에 대항할 수 있는 이름이 바로 바이파였기 때문이다. 실재로 이 공작저를 방문하는 황족은 아르시엘 공주가 최초 는 아니다.

그녀의 마차가 이르자, 시종과 시녀는 정문에 척 서서 이 곳이 공작 가임을 나타낸다.

“아르시엘 엘 아스토 제         2공주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 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전대의 바이파 공작 때부터 저택을 지켜온, 현 황 제의 방문조차 겪어본 노련한 시종장이 나와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차라리 이쪽이 루쉴드 자작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다. 아르시엘 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토닥이며 조신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렇게 환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연락이라도 해주셨으면 좀 더 준비를 해뒀을 텐데. 송구스럽습니 다.”

황족의 맞을 준비가 덜 되었음을 반성하면서도 왜 연락을 안 하고 왔 냐는 고도의 비난을 동시에 해내는 시종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아르시 엘에게는 시종장을 상대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에틴경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해 서요.”

그러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음을 지우지 않을 것 같은 시종장의 눈이 흐트러진다.

“도련님을 어째서 찾으시는지요? 혹,약속이라도 하셨습니까?”

시종장의 이상하다는 눈초리에, 여기까지 와서야 퍼득 정신을 차리 는 아르시엘이었다.

그렇다. 로아도르는 어디까지나, 언니의 혼약자. 자신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까지 해서는 안 되었다. 왜 이렇게 이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 일부러 귀족들의 입방아 거리에 올라야 할 이유는 없었는데. 그저, 서신으로 알아봐도 되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선뜻 대답을 못하자 시종장은 한층 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다시 물으려는 순간.

“안내해드려요.

저택에서 나오는 한 여성이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에리지에!

에리지에 반 바이파. 로아도르의 친 누이. 다행히도 아르시엘은 에리 지에와는 여러번 마주한 적이 있다. 황실의 공주와 바이파의 여식이 어 울리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논란 거리가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에리지에다. 아르시엘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곧 그 표정을 지워야 했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 초췌해 있었다. 언제나 화사하고 부드러운 아름 다움을 뽐내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절 망하는 이의 얼굴과 같았다.

“아르시엘. 다만. 로아도르를 방해만은 하지 말아줘요.”

“방해....라니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은 에리지에 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감히 공주를 앞에 두고 할 수 없는 무 례한 행동이었지만, 바이파의 이름은 이 정도는 허락했다. 게다가 아르 시엘과 에리지에는 각별한 사이다. 그녀는 화를 낸다기 보다는 의아해 하고 있었다.

방해라고 했다. 아프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 고 있기에?

그리고.

시종장의 안내로 뒤뜰에 이른 아르시엘 공주는, 벌어지는 입을 손으 로 살짝 가렸다.

로아도르가 달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깔끔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귀족중의 귀족. 땀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던 저 남자가, 온 몸이 흠뻑 젖어 있는 체로 달리고 있다. 그의 몸체 걸쳐져 있는 것은 풀 플레이트 메일. 실용성보다는 장식용에 가까운 화려한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 로 실용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기에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려 있다. 몇배나 더 무거울 것이다.

저런 것을 입고, 로아도르는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달리는 모 습을 연무장의 중심에 선 엘리엇은 팔짱을 끼고 스승의 엄한 눈으로 바 라볼 뿐이다.

“우웩!우웩!크으윽.”

어찌나 지독하게 뛰었는지, 로아도르는 나무 밑으로 달려가 토악질 을 해댄다. 그 모습을 엘리엇은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만 있다. 열심히 뛰어라, 늦다, 이런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아니,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말려야 멈출 정도니까.

한참동안이나 속을 게워낸 로아도르. 그는 비틀 거리며 다시 연무장 으로 돌아와 뛰기 시작한다. 엘리엇과 로아도르, 둘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다. 격려도 없고, 또 필요도 없다. 저 소년의 의지는, 오로지 홀로서 짊어진 것. 엘리엇은 그것을 돕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비척비척 뛰는 로아도르의 몸이 순간 뒤틀린다. 아르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에 앞서 엘리엇의 차가운 목소 리가 그것을 막아선다.

“그냥 뛰면 소용없습니다. 발목에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검을 쓰는 자로써 발놀림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로아도르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엇은 알 수 있다. 아 니,엘리엇 뿐만이 아니라 아르시엘도 알 수 있었다. 로아도르의 자세가 다시 바로 잡힌다. 한계에 이렀음에도, 아니 한계 를 넘어 섰음에도 천천히, 제대로 된 자세로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천 천히. 천천히라도 끝까지 자세를 유지한다. 얼마나 더 뛰었을까, 목표량을 다 뛰었는지, 로아도르가 조용히 걸음 을 멈추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숨 쉬는 것조차도 버거운 듯. 식식 거리고 있는 숨소리에조차 힘이 없다. 그러자, 안절부절 지켜보고 있던 로아도르의 전속 시종이 재빨리 다가와 물을 건낸다. 아니, 로아도르는 마실 힘조 차 없다. 여러번 해본 듯, 시종은 로아도르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젖히 고 벌어진 입에 물을 조금씩 흘러 넣어 준다. 물을 마시고 잠깐,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조용히 시간을 재고 있던 엘리엇은 로아도르에게 다가갔다.

“적에겐, 자신이 지쳤을 때가 가장 호기인 법입니다.”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엘리엇은 서 있기조차 힘겨운 그에게 검을 건 낸다. 두툼한 투핸드 소드. 어지간히 힘이 있는 자라도 꺼려할 무거운 검이었다.

검을 보는 순간, 죽어 있던 로아도르의 눈에 광채가 서린다. 몸을 부 르르 떨면서, 시종의 부축을 뿌리치고 일어난다.

“자세를 유지 하십시오!”

쾅!!

엘리엇은 강렬한 검으로 연신 내려친다. 로아도르에겐 들기조차 버 거워 보이는 투핸드 소드. 평소에 로아도르가 써오던 롱소드와는 무게 부터가 배로 차이난다. 그럼에도 로아도르는 그것을 들고, 엘리엇의 공 격을 막아서고 있다.

“끄으으으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던 로아도르의 꽉 깨문 이 사이로 신음 소리가 베어 나온다.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다리. 방금 전까지 달 리던 그것은 견디지 못하고 떨리기 시작한다.

“제 아무리 소년이라 할지라도 마나를 사용하는 자의 공격은 이것보 다 매섭습니다!이것보다 무겁고!이것보다 빠릅니다!마나조차 실리지 않은 이 검을 버거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쾅!쾅!

엘리엇이 비록 사정을 봐주며 내리치고 있지만 성인과 소년의 기본 적인 힘 차이는 엄연히 존재했다. 게다가 엘리엇은 평범한 성인이 아 닌, 소드 마스터에 이른 강대한 기사였으니 한층 더 차원이 다른 것은 자명했다.

“실전과는 다릅니다!상대방은 어디를 노릴지 모릅니다!이렇게 막아 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겁니다”

점차 로아도르의 자세가 무너져 간다. 몸이 점차 아래로 처지고. 무릎이 점차 땅에 닿는가 했지만.

절대 닿지 않는다. 엘리엇은 한층 더 강한 힘으로 검을 내려 쳤다. 하 지만, 자세는 무너져도, 검은 흐트러져 잔뜩 흔들리고 있어도. 꽉 깨문 이에서 피가 세어 나올 정도임에도.

무릎만은 절대 꿇지 않는다.

로아도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감정적으로 나오는 눈물이 아니다. 비오듯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고,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얼굴 의 혈압 때문에 끌려 나오는 눈물이다.

눈이 따가워 죽을 지경임에도 로아도르는 눈을 감지 않고 엘리엇의 검을 바라본다. 자세는 흐트러지고 있음에도 그의 검을 막는 것에는 변 함이 없다.

쾅!쾅!

더 이상은 무리다. 로아로드가 한계 이상으로 힘을 끌어내고 있음을 깨달은 엘리엇은 검을 내렸다.

“오후 수련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최고의 휴식을 취하십 시오.”

수련이 종료 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

로아도르는 쓰러진다. 달리기를 멈췄을 때와는 달랐다. 완전히, 그야 말로 정신을 잃어 버린 것이다. 쾅!’소리를 내며 갑옷과 땅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 역시 익숙한 모습인 듯. 시종은 숨을 내쉬며 로아도르의 갑옷을 낑낑 거리며 벗기고, 아직 까지 쥐어져 있는 투핸드 소드를 손에서 떼어 놓으려 했지만.

검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종은 손가락을 펴보려고 했다. 하지 만 검을 꾹 말아 쥔 손가락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한숨 을 내쉬며 시종을 가볍게 밀었다.

“비켜라. 내가 할 테니.”

하지만, 엘리엇조차도 로아도르에게서 검을 떼어 놓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도대체 저 쇳덩어리가 뭐라고. 시종은 투덜투덜 거리면서 즉시 사람들을 불렀다.

다만, 엘리엇은 가라앉은 눈으로 쓰러진 로아도르를 바라볼 뿐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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