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3장. 재능조차 없었다. 2
‘이상하군 ’
로아도르와 검을 마주치며 엘리엇은 생각한다. 검로는 흠잡을 곳이 없다. 실제로 대련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이 정도면 상당 히 괜찮은 수준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모양이다. 게다가 평소에 이것저 것 생각해둔 것이 많은지, 초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발한 공격을 해 온다. 스승으로써는 만족스러울 정도인데.
하지만 이상하다. 어째서, 로아도르의 몸에서는, 이 정도로 단련했는 데 그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엘리엇경. 언제쯤 저에게 소드 마스터의 검을 보여 주실 겁니까? 문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간 심술 난 표정을 한 로아도르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자 엘리엇은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음. 그냥 보여드리기는 그렇고, 저한테서 한대 뽑으면 보여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치사하군.
“수련의 일과로 여겨주십시오.”
저 소드 마스터인 엘리엇에게 한대를 뽑는다, 라는 것이 무척 매력적 으로 여겨졌는지 로아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쉽게 손에 넣는 것은 재미가 없다. 로아도르는 하앗! 하고 기합을 넣으며 다시 그에게 돌진한다. 엘리엇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그의 공 격을 아주 쉽게 막아 내었다.
“휴학기 동안에 반드시 한대를 뽑아내겠어.”
결국, 엘리엇의 몸이 스치지도 못한 로아도르는 뚱한 얼굴로 공작저 로 들어간다.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워 혼자 쿡쿡 거리던 엘리엇은 무심 코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알아보는 수밖에.
다름 아닌 바이파 가문의 후계자, 게다가 아내 될 이의 남동생에 관 련된 일이다. 자신의 처음으로 검술 지도를 맡은 이이다. 모든 일에 열 심히라서,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볼 수 없는 소년에 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엘리엇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지 시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을 거느린 것이 아니었고, 또 전부 가 기사 출신들이라 이쪽의 지식을 지닌 이는 전무했다. 그렇다고 아무 나 불러 물어 볼 수도 없는 것이, 그 대상이 너무나 고귀했기 때문이다. 함부로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큰 소란이 벌어지리라. 그러니, 짧은 학식이나마 살려 열심히 서책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 곳은 공작저. 별의 별 서책이 다 모여 있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의학에 관련된 서적도 충분히 많이 있었다. 에리지에와 로아도르는, 갑자기 책에 파고드는 엘리엇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공작가의 사위로써 이제부터라도 학식에 힘을 쓰려니 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로아도르는 그 와 검을 맞댈 수 있는 기회가 줄어 든 것을 섭섭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익숙하지 않은 독서에 피곤함을 느 끼던 엘리엇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이거다.
다시 한번 그 병명을 주의 깊게 읽어 본 엘리엇은 믿을 수 없는 현실 에 책을 떨어뜨렸다. 아주 오래된, 그리고 아주 드문 병. 여태까지 살펴 보았던 어떤 의학 서적에서도 다루지 조차 않던, 재앙이라 불릴만한 병 명이다.
이런 것이 어째서 저 귀하게 자란 도련님에게서 나타난단 말인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저 로아도르가...”
엘리엇은 아주 뛰어난 기사인 만큼 곧 자신의 정신을 수습했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짧은 자신의 지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저, 로아도르가 다른 이보다 몇배나 재능 없는 이었기를, 그 래서 자신이 알아차릴 수 없었기를, 차라리 그러기를 수십번이나 비며 엘리엇은 에리지에를 찾아 갔다.
그녀는 마침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였다. 책에 파고들다 보니 밤이 되 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에리지에는 밤늦게 찾아온 엘리엇에 놀라 며 시녀가 입혀주는 가운을 입고 접대용 테이블에 앉았다.
“에리지에. 혹시, 공작님과 연결이 가능합니까?”
“어머나? 아버님께 무슨 볼 일이 있나요?”
대답 없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엘리엇. 에리지에는 눈치가 빠르다고는 볼 수 없는 여성이었지만 적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타고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귀족의 여식이라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곧 연락할 방법을 떠올렸다.
“아마. 궁정 마법사이신 델토스님을 찾아 가면 연락은 가능할 거예 요.하지만 보통 큰일이 아니면 쓰이지 않는 방법이죠.”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여부에 따라 큰 일이 될 수도 있습니 다.”
“무슨 일인지는, 말씀해 주실 수 없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부디 저에게 허락을.”
에리지에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은 가슴 아팠지만, 그녀는 연기가 서 툴다. 말 했다가는 아마 동생에 대한 걱정을 그대로 로아도르에게 쏟아 낼 것임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남동생은 다른 이의 몇배나 예민하고 예리한 소년이 니까.
엘리엇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리지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제 이름으로, 바이파의 이름으로 허가합니다. 델토스 궁정 마법 사님께 가서 연락을 취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에리지에.”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달려나가는 엘리엇을 그녀는 걱정스러 운 눈으로 주시했다.
이제 막 서른살이 되는 델토스는 바이파 가문 휘하의 마법사이다. 물 론 현재 소속된 곳은 궁정이지만, 그가 마법사가 되기 전까지의 후원자 는 바이파 공작이었다. 그러니 황실보다는 바이파 가문에 대한 충성이 더 높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엘리엇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그는 태도를 조심했다. 아무래도 공작저의 아가씨와 혼약할 기사였기 때문 이기도 하고, 그의 용건이 다름 아닌 바이파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시 바이파 공작님과 연락을 취하고 싶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한참 늦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 공작저에 연락을 취한다는 것은 지독 한 무례다. 보통 큰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델토스도 그리 눈치가 없는 이는 아니었는지, 굳은 얼굴에 엘리엇에 게서 심상치 않은 일임을 감지한 그는 순순히 수정구슬을 가지고 와 공 작가에 연락을 취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일이 아 니지만 바이파의 이름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공작님. 저 엘리엇입니다”
“사위, 이 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사실, 로아도르에 대해서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로아도르?”
엘리엇의 연락에 에리지에가 어떤 나쁜 소문이라도 돌았나 싶어 조 마조마하던 바이파 공작이었지만 나온 이름은 로아도르였다. 그는 몇 배나 심각해진 얼굴로 수정구 너머의 엘리엇을 주시했다. 에리지에와 로아도르 둘 다 소중한 자식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중요 성의 비중을 따지자면 단연 로아도르가 압도적이다. 그에게는 단 하나 있는 후계자인 것. 에리지에에게 소문이 도는 것보다 몇 배나 나쁜 상 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가, 도련님의 검술을 담당했다는 것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에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었기에 그러려니 하 고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보니 미리 알려드려야 했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천천히 얘기해 보게.”
“최근, 도련님께서 다시 공작저로 돌아 오셨기에, 몇 번이나마 검을 다시 지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때와 전혀 달라지 지 않았더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작님도 아실 겁니다. 달라 지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위화감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나름대 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설마.......
공작 본인 역시 상위권의 기사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 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는 듯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몇번이나 얘기를 꺼내길 꺼려하던 엘리엇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마나 부적응자 ’라고, 들어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