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세컨드-12화 (12/100)

제목      제  2장. 신경 쓰이는 자. (끝 )

로아도르는 최고급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우습게도 바이파 가문 의 정식 예복으로 누구나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가슴팍에 가문의 문장이 큼직하니 박혀 있었다. 특히 황족이라면 모를 리 없는 복장이지 만 그럴 때일수록 더더욱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니 아이러니 하다면 아 이러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치는 반 망토. 한쪽어깨에만 걸치는 것으로 역 시 상단에는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도련님. 참으로 멋지십니다.”

옷담당의 하인이 아부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감탄을 보내왔다. 그 정도로 로아도르는 멋진 모습이었다. 애초에 명문가의 피를 가진 만큼 혈통을 타고 올라가면 온갖 미의 종류를 가진 선조들이 많은 만큼 그의 본바탕은 가르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로아도르는 옷들 중, 가장 구석에 있는 옷에 눈길을 주었다. 하얀색 의 예복에 어깨에는 금줄이 달려 있는 것으로 바이파 가문의 사람들이 결전을 벌일 때만 입는 옷이었다. 물론 어린 로아도르에게는 아직 입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기사의 가문인 만큼, 언제 입게 될지 몰라 항상 준비되어 있는 옷.

언제고 로아도르가 가장 입어보고 싶은 예복이기도 하다.

“가시지요.

“그러지.

호롯불을 들고 있는 자신이 전속 시종을 앞에 두고 로아도르는 공주 의 처소로 발걸음 옮겼다. 얼마나 갔을까?로아도르는 역시 짙은 남색 에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는 쟉셀을 만날 수 있었다.

“기대되는데. 루리아 공주가 우리를 상대로 얼마나 좋은 다과회를 열 수 있을지”

쟉셀은 심술 궂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로아도르는 못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쟉셀은 귀족으로서의 태도와 품격에 결코 뒤지지 않지 만 묘하게 솔직하고 직선적인 구석이 있었다. 로아도르는 그 부분을 자 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라 보고 존경하는 면이 있었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는 만큼, 루리아 공주의 처소에 이르자 미리 마 중 나와 있던 시녀가 허리를 굽히고 앞장선다. 커다란 방문 앞에 역시 시녀들이 앞서 나와 있었고, 로아도르와 쟉셀의 걸음에 지장이 되지 않 게 양 쪽에서 문을 당겨 열었다.

아니다 다를까, 로아도르의 예상대로 접대용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 들을 마중하는 것은 아르시엘 엘 아스토 제               2 공주였다.

“죄송합니다 에틴경. 큐엘경. 루리아 공주님께서는 두 분과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무척 기뻐하고 계셨습니다만 그것이 너무나 과하 셨는지 몸이 안 좋아 지셨습니다. 차마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수 없다 고 하시기에, 부족하게나마 제가 대신 여러분을 대접하도록 하겠습니 다.”

그제서야 상황이 대충 어찌 돌아가는지 눈치챈 쟉셀은 로아도르에게 귓속말을 건냈다.

“알고 있었어?

“뭐,혹시 이러지 않을까 싶었지.”

흥 하며 작게 콧방귀를 뀌는 로아도를. 그러자 쟉셀은 입술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그도 빙긋 웃으며 마주 안부의 인사를 했다.

“루리아 공주님께서 몸이 편찮으신 건 황실과 제국에의 아픔. 부디 저로써도 쾌차를 빕니다.”

쟉셀도 생각이 있는 귀족이다. 이런 건 어차피 대외용이니만큼 루리 아 공주가 두 자제를 초대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아르시엘 공주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총명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했다. 오히려 솔직함 을 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영리한 머리를 이용하는 듯, 그녀는 연신 웃 음을 멈추지 않았다.

로아도르와 쟉셀은 오랜만에 느끼는 품위 있는 대화에 모처럼 마음 을 풀고 있었다.

그때.

몸이 아파 침상에 누워 있어야할 루리아 공주는 아카데미의 구석진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침상에 계속 누워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너무 일렀고, 또 너무나 심심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책을 뒤적거리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니까. 부스럭.

한적한 정원이라 생각했건만 인기척이 들린다. 루리아 공주는 깜짝 놀라 고목의 그늘 뒤로 숨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크흑”

하며, 누군가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만이 들려 올뿐. 그 소리에 루리아는 그늘에서 나와 그쪽으로 달렸다. 천성적으로 착 한 공주다. 고통 받고 있는 자가 있으면 당연히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그곳에는 루리아 공주가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그러나 연모하게 된 흑발의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이,이봐요!괜찮아요?!”

제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냉정하기까지는 힘들었는지, 그녀는 어 쩔 줄 몰라하며 가르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정신을 잃고 있던 가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겁에 질린 아름다운 소녀가 눈에 가득 들 어왔다.

가르안 역시 이번만은 연기가 아니었다. 멋모르고 베르패트란 소년 에게 마나를 주입한 탓에 몸에 극한 부담감이 오고 있는 것이다.

“조,조금만 참아요. 제가 치유 마법사를 불러 올게요”

그제서야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지, 루리아 공주는 일어나려 했지만 가르안에게 손목을 잡혀 그러지 못했다.

“그,그러지 마. 조,조금만 쉬면 괜찮아 질 테니까”

어차피 불러봤자 소용없다. 급격한 마나의 소모로 오는 부작용일 뿐. 조금 쉬며 마나를 보충하면 곧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엘 카이자의 기억 이 말하고 있다. 어쨌든, 반한 소녀 앞에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 다니 실수라고 생각하면서 가르안은 몸을 일으켰다. 비틀.

역시, 좀 더 누워 있어야 했던 것인가? 그는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화사한 꽃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들어 왔다. 루리아 공주 의 틈새를 파고 들어 그를 안아 올린 것이다.

“제,제가 부축할 테니까....”

루리아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공주로써 외간 남 자와 몸을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손이라도 잡는 경우는 무도회가 있을 경우 외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 다. 다만, 아픈 이를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호감을 가 지게 된 소년이니까.

너무나 부드러운 몸에 아름다운 향기. 가르안은 절로 모르게 미소를 떠올리며 몸을 그녀에게 기대었다.

“즐거운 담소였습니다 아르시엘 공주님”

“앞으로도 이런 자리가 종종 있었으면 좋겠군요.”

이것만큼은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아리따운 귀부인과 나누는 티타임. 이런 자리에 익숙하고 또 무엇보다도 즐겨야 할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이런 자리가 너무나 도 없었다.

“어머나, 저로써 또 이런 부끄러운 초대를 하란 말인가요? 저도 가끔 은 초대를 받고 싶답니다.

빙글 돌려 말하지만 다음번에는 니네가 나를 불러라, 라는 뜻이다. 그러자 로아도르와 쟉셀은 거침없이 크게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말했 다.

아무래도 이런 당돌한 면이 그녀를 말괄량이라 부르는 이유인 모양 이다. 그러게 서로 예를 갖추며, 그러나 진심이 가득한 인사를 하며 자 신들의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음?”

복도의 한쪽 끝에서, 한 소녀가 한 남자를 부축해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남자는 아직은 정신이 있었는지 비척비척 발에 힘을 주고 있지 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이고 어떤 자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설령 평민들이라 할 지 라도 남성을 부축하고 있는 여성을 내버려 둘 수 없다.

“가서 도와주고......

시종에게 지시하려던 로아도르는 딱딱하게 굳었다. 육안으로 확인된 그 소녀는 다름 아닌 루리아 공주였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 챈 쟉셀 역 시 입가가 실룩 거렸고, 아르시엘 공주는 골치가 아파졌다는 듯 손을 이마에 대고 있었다.

쟉셀의 고양이 눈이 한 층 더 곡선을 그린다. 알고는 있었다. 이 공주 가 자신들을 꺼려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명목상으로나마 초대해 준 것으로 참고 넘어가려고 했다. 아르시엘 공주라는 재기 발랄한 여성 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초대한 공주가.

다른 남자를 부둥켜 안고 나타난 것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요컨 대,루리아 공주는 자신들을 초대해놓고서는 다른 외간의 남자를 만나 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 사실 하나에 분노하고 있는 쟉셀은 그 남자 가 다름 아닌, 전에 마주쳤던 마법을 쓰던 흑발 소년이라는 것을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아주 쾌차하신 것 같아 기쁩니다. 루리아 엘 아스토 공주님”

루리아 공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듣자하니, 거동이 불편하실 정도로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이 렇게 빠르게 회복하시다니, 그야말로 제국의 복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 다.”

그에 반해 로아도르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루리아 공주는 쟉셀의 독설보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이 남자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질타하려고 하는지.

하지만 로아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주가 부축하고 있던 가르안을 자신이 넘겨받았을 뿐이다. 그의 의외의 행동에 루리아 공주는 멍한 얼굴로 가르안을 그에게 건내었다. 울컥해 다시 한번 쏘아 붙이려던 쟉셀에게, 공주에게서 가르안을 받 은 로아도르는 진중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그만둬 쟉셀”

“하, 하지만 로아도르! 이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를 너무 무 시....”

“설령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 분이 우리 제국의 공주님이시다. 그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조용히 쟉셀을 꾸짖는 로아도르. 쟉셀은 분한 듯 입을 꾹 다문다. 로 아도르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과묵히 끄덕인다. 쟉셀은 얘기가 통하는 자였기에 그의 곁에 두는 것이다.

루리아 공주에게는 그것이 더 큰 질타로 다가왔다. 물론 자신이 잘못 했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그 어떤 말도 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쟉셀처 럼 화를 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 남자의 질책은 너무나 무겁 다. 그리고 저 로아도르라는 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다. 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잊고 싶어 하는 황녀로써의 직위를 자꾸 떠올리게 하니까.

그와는 반대로, 아르시엘 공주는 멍한 눈길로 로아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흥미가 있었다. 다름 아닌 언니의 혼담 상대 였으니 까.어떤 남자일까 싶어서 혼자서 찾아갔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참으로 당당하다는 것. 단정하게 자른 금발 의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는 냉철함과 신중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굳센 마음을 지닌 남자라고 생각했다. 눈치를 봐가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닌 확고한 곳에 우뚝 서 있을 그런 남자. 언제고 제국 이 무너져도 최후까지 충신으로 남을 그런 기백.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런 눈. 그리고 아르시엘은 느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남자에게 반한 것 같다고. 가르안은 정신이 흐릿했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어떤 식으로 돌아가 는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를 너무 무시...”

어쩌고 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온다.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아픈 이를 부축하는 저 가녀린 소녀를 칭찬해 주지 못할 망정, 오히려 화를 내고 있다. 그는 귀족에 대해서 모른다. 알 리가 없다. 엘 카이자는 단 독체로써 살아가는 드래곤이고, 강성훈은 이미 이룩한 평등한 세계에 서 살아왔다.

그러니, 알 리가 없다.

‘이 소녀를 탓하지 마 썩을 놈들아           ’

가르안은 철근 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간신히 시야를 회복 한다. 아주 작은 눈의 틈 사이로 로아도르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넌 이 형이 혼을 좀 내줘야....’.

그의 눈은 다시 스르륵 감겼다.

로아도르는 급히 달려온 시종에게 가르안을 넘겨주며 그를 주시했 다. 루리아 공주. 자신의 약혼녀. 그는 이런 시간이 그녀를 왜 만나고 있었을까. 아니 그것보다, 이 둘이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 것일까. 질투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와 혼인을 한다고 해도 사이좋은 부부 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가르안.

그런데 또다. 또 이 이름이 자신 안에 들어온다. 평민이겠지만 너무 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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