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름대로 강단은 있는 기사였는지 굽히지는 않았다. 그러자 로아도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그의 입장이 있는 만큼, 헤아려 주는 것도 자신의 임무일 터다. 오히려 자신의 임무 에 물러서지 않는 그의 태도는 존중해줘야 할 정도다. 그때였다. 학생들의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로아도 르와 그 기사는 동시에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로아도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진다. 학생들 너머 중심에 있는 자는 바로 가르안 카이자.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목검에서 은은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목 제 2장. 신경 쓰이는 자. 4
“오.대단하군!!자네, 벌써 마나를 다룰 수 있다니!”
로아도르의 옆에 있던 기사는 크게 박수를 치며 가르안에게로 다가 갔다. 이 아카데미의, 지금 클래스의 평균 나이대는 보통 14, 1세 정도 이다. 마나를 이십 세 초반에 익혀도 천재 소리를 듣는 실정에, 이제 겨 우 15세의 소년이 마나를 다룬 것이다. 그것은 일대의 충격이나 다름 없다. 아마 저 기사는 자신이 지금 로아도르를 무시하고 그에게로 갔다 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다행히, 그는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로아도르 역시 기 사는 안중에도 없이 가르안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눈에는 허망함. 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죽어라 노력했느냐? 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한도 내에 서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로아도르는 자신 있게 ‘그렇다 ’고 대 답할 수 있다. 그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저리도 간단하게.......
“가르안....”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로아도르. 그가 쥐고 있는 목도는 너무 힘을 줘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반대로, 가르안은 로아도르란 사람은 아예 없는 것처럼 기사와의 대 화에 열중해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오!겸손 떨 것 없네. 지금 견습 기사들 중에서도 마나를 다룰 수 있 는 드무니까!자네는 지금 그 견습 기사들을 뛰어넘는 단 말일세! 어떤 가? 황실의 견습 기사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가?”
아카데미의 학생이 교육기관이라면, 황실의 견습 기사들은 정녕 기 사만이 되기 위한 양성기관에 소속된 이들이다. 돈만 있으면 들어 올 수 있는 아카데미의 학생들과는 다르게 가문, 신분, 자질 등의 엄정한 심사를 걸쳐야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재능이라니, 귀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을 것이다.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검술에 한정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오. 그런가. 이거 아쉽군!하지만 자네라는 인재를 볼 수 있게 된 나 자신은 지금 행운아라 생각한다네”
“그 말씀, 저로써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고대어 시간에 졸던 모습과는 다르게 가르안의 말은 정중하기 그지 없었다. 당연했다. 고대어 선생과는 다르게 이 기사는 제법 강단이 있 는 자라고 판단 때문이다. 그것을 판가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로아 도르를 대하는 태도. 쫄아서 아무 말 못하던 선생과는 다르게 할 말은 하는 자 아닌가.
처음에는 가르안 역시 검술 수업에 큰 흥미는 없었다. 엘카이자의 기 억 속에는 궁극의 검술이 담겨 있고, 또한 그것을 그대로 시전할 수 있 는 육체도 재구성 되어 있다. 그가 이 아카데미에 들어 온 것은 일단 루 리아공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제국은 어떤가, 어떤 정세로 돌아가는 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무력을 단련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마나를 뽑아 낸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바로 로 아도르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로아도르는 목검은 커녕 나뭇가지나 들고 휘둘러야 할 정도의 실력인데 철검을 내놓으라고 꼬장을 부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신분만 믿고 설치는 저 건방진 도련님에게 한방 먹여줘야 할 필요성 을 느낀 그는 거침없이 행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자!검술 수업에 들어간다!”
기사는 호탕하게 외쳤다. 저만한 인재를 손수 가르치게 된 것이 커다 란 기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로아도르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순간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춤주춤 로아도르에게로 다가갔 다.
“저,저어. 에틴경께서는?”
“나에겐 바이파 가문의 검술이 있다. 이미 모든 검로는 익혔으니 기 본기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어.
기사를 나쁘게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 저절로 퉁명스럽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사는 또 나름대로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라 그 의 기분에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다른 학생들과는 떨어져 홀로 목검을 휘두르는 로아도르. 원래 홀로 서 단련하는 것을 즐기긴 하지만 평소 때와는 다르게 기분 좋게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목검을 멈추고 가르안을 바 라보니, 그는 다른 아이들의 속에 섞여서 기본기를 충실히 익히고 있 다.
하지만 로아도르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기사도 알고 있으니까 저 리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가르안의 목검은 완벽한 검로 를 밟고 있다. 그는 막 검을 잡아 익숙지 못한 학생들에게 무언가 조언 을 하기도 하며 웃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다른 학생들도 웃고, 수업을 진 행하는 기사도 웃고 있었다.
저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건만. 이건, 이건 뭔가 비참했다.
“저...”
로아도르 답지 않게 말을 흐리자 시종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 거 침없는 도련님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종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듯, 로아도르는 급히 고 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
그는 방금, 시종에게 가르안의 뒷조사를 시키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를 가로 막은 것은 바이파의 이름을 가진 이로써의 긍지였 다.
바이파의 이름은 절대 ’여야 한다. 설령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절대여야 한다. 게다가 뒷조사라니, 기사를 꿈꾸는 자로써 그렇게 비겁 한 짓은 할 수 없다.
‘아무래도, 가르안이라는 자가 내 마음을 지독히 흔들어 놨는가 보 군.
연신 의아함을 나타내는 시종을 뒤로 하고 로아도르는 다시 고대어 에 집중했다.
결국 부족하다면 내 자신이다. 가르안. 무척이나 신경을 긁는 존재임 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아직 자신의 단련이 덜 된 터일 터다. 그 자를 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한다.
“나는 바이파다”
하지만 이것은, 로아도르라는 자가 바이파의 이름에 걸 맞는 긍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모는 모든 귀족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쟉셀. 로아도르가 인정한 진정 귀족중의 귀족이었지만, 그는 근본적 으로 로아도르와는 달랐다. 가문의 이름을 이어야 할 자와 잊지 않아도 되는 자의 차이라고나 할까? 천성 귀족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가 문과 이름에 그리 큰 긍지는 없다. 오히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최대한 활용하자, 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한 자각이 있다면 자신은 귀족이라는 점. 다른 이들과는 다른 대 접을 받을 혈통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크로스트 후작가는 바이파 공작가의 뒤를 이어 나가는 굴지의 가문. 그가 복도를 걷고 있어도 로아도르가 걷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다.
“음?”
그렇게 한적해진 복도를 거닐고 있자니, 어느 한 구석에서 소란스러 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일이 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감히 자 신이 있는 곳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참을 수 없으니까. 그곳에는 지독히도 품위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건방지게 평민 따위가 이 곳이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더러운 놈”
“꺼져!니가 살고 있는 시궁창으로 돌아가!”
세명의 학생이 한 명을 둘러싸 발로 밟고 있었다. 그 세 명은 쟉셀도 알고 있는 귀족가의 자제들.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얻어맞고 있는 학 생은 평민이다. 그러자 쟉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이런 일은 흔하다. 저들 자제들 역시 상당한 신분을 지닌 이들이었으 므로, 이 곳이 만약 저들의 영지였다면 쟉셀도 그들을 못 본 척하고 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저런 소란은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을 포함해서 저들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제들이 머물고 있는 아카데 미니까.
어디까지나 이유는 그것 뿐. 쟉셀은 그 품위 없는 소란을 멈추기 위 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얻어맞고 있는 평민이 누구인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때. 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 명의 귀족은 쓰러져 있었다. 장면 이 생략되어 결과만이 나타난 것 같은 일. 쟉셀은 어떻게 된 것 인지 이 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쓰러져 있는 평민에게 한 흑발의 소년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