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장. 공작가의 도련님. 4
‘피곤하군 ’
자신의 숙소로 지정된 로아돌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미 그가 오기 전에 바이파 공작가의 시종들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기에 생활하기에 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품들 역시 손에 익은 것들이 그가 사용하기 쉬 운 위치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다만, 방 자체만은 아카데미에서 최고로 좋은 곳임에도 로아도르가 공작저에서 사용하던 방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지만 말이다. 게다가, 사용하던 시종까지 제 위치에서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묵묵 히 서 있다. 공작저에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편인 소년이었다. 나이 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로아도르의 전속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잔뜩 얼어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 졌는지 제법 편안한 기색이다. “돌아 가서 쉬어도 좋아.”
“네.도련님. 편히 쉬십시오.”
시종이 나가자 로아도르는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구나 싶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첫날이니 조금 유별나긴 했어도, 이런 생활의 연속 이라는 것은 겪지 않아도 뻔했다.
“검을 잡고 싶다.”
로아도르는 손을 쭉 천장으로 뻗었다. 그는 엘리엇에 의해 토막 난 수련용 철검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철제검으로 무척이나 소 중히 다루던 검. 아끼던 검이 반토막 났음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아니 오 히려 한층 더 강해지는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지. 검을 잡고, 휘두르고, 휘둘러서. 언젠가는 나도.........
똑똑.
‘또 누구지.
단번에 인상이 쫙 찌푸려지며 로아도르는 문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하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 만,로아도르는 곧 이 곳이 공작저가 아닌 곳임을 깨달았다. 보통, 공작저에서 자신을 찾는 손님이 있다면 응접실로 안내하고, 그 사이에 하인이 자신에게 찾아와 누구누구가 찾아 왔다는 말을 전한다. 보통은 나가보기 마련이지만, 여기에서 로아도르는 공작가의 후예로써 만날 사람을 고를 권리가 있다.
즉, 이렇게 직접 자신의 방을 방문하는 이는 겪어 보지 못했다는 뜻 이다.
이리저리 인사 받느라 지쳐 있던 로아도르는 무시할까도 생각해 봤 지만 애초에 연기를 하는 것에는 서툴다. 아니, 할 마음이 없다. 별 특 별한 인물이 아니라면 대충 얘기해서 돌려보내면 되리라 생각하며 로 아도르는 귀찮은 마음을 가득 품고 손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아직 키가 작은 어린 소녀가 똘망똘망한 눈으 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로아도르가 자세히 보았다면 그녀가 루리 아 공주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피곤함으로 가득한 그에 게 있어서는 그냥 화려한 복장을 입은 소녀. 에 불과했다.
“당신이 로아도르인가요?
그것은 본명, 하지만 지금 에틴 경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를 본명으로 부르려면 어지간한 친분이 아니고서야 상당한 실례다. 하지 만 눈 앞의 소녀는 그런 것 따위 알바 아니라는 듯 천진난만한 눈으로 로아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 어조로 보아하니 상당한 그제 서야 로아도르는 정신을 조금 차리며 그녀를 주시한다. 어쨌던 간에 상 대는 절차를 밟지 않고 멋대로 남의 방을 들어온 이다. 먼저 소개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자 소녀가 로아도르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 챘는지 가볍게 쿡 하 고 웃는다.
“처음 뵙겠어요. 로아도르 반 바이파. 저는 아르시엘 엘 아스토.”
로아도르의 눈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돌았다. 즉, 제 2황녀란 얘기다. 피곤한 와중이었지만 황족에게, 그것도 계승 서열 2 순위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제서야 로아도르는 한 족 무릎을 꺾으며 예의를 갖춘 인사를 했 다.
“아르시엘 공주님께서도 이 곳에 오신 줄은 몰랐군요. 전 바실....로 아도르 반 바이파입니다.”
에틴의 이름을 대려고 했건만, 이미 소녀가 자신을 로아도르라 부르 고 있는 마당에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그는 본명으로 소개했다.
“네네. 다들 언니 언니 하니까 저는 이 곳에 온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 을 거예요”
일단 그럴 리는 없다. 제 2 공주라고는 하나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루리아 공주보다는 그 여파가 작 은 것임은 분명했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 거리며 말하자 로아도르는 표 정을 굳히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그건 분명 공주님의 말씀대로이지만, 그 점에까지 신 경을 쓰지 않은 저를 포함한 아랫것들의 책임이지요. 사죄의 말씀을 올 립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작은 공주는 로아도르를 놀란 눈으로 올려 본 다. 로아도르 역시 눈에 의아함을 가득 품고 (겉으로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을 뿐 )그녀를 주시했다. 루리아 공주가 그야말로 차분, 상냥, 온화 등등 모든 남성들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하면, 아르 시엘 공주는 황궁의 말괄량이 정도로 알려져 있다. 공주이면서도 검을 배우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조르는 모습이 수차례나 목격되었다고 하니 까.
물론 일국의 공주일진데, 검은 커녕 바늘 하나 들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 뻔한 일이지만.
그런 소녀가 왜 자신을 찾아 온 것일까?인사를 하러 왔다고 보기엔 좀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 자체가 인사를 하러 올 필요는 없다. 신분상 오히려 로아도르가 인사를 하러 가지 않은 것이 실례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어요. 편안한 밤이 되시길.
“공주님도 편안함 밤이 되시길”
카펫이 쭉 깔려 있는 복도를 공주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라져갔다. 그러고 보니, 수행하는 시녀들이 한명도 없다. 거느리는 사람이 하나 없어도 사라지지 않는 힘 있는 발 소리.
로아도르는 훗 하고 웃었다.
루리아 공주와 아르시엘 공주.
굳이 호감을 갖는다면 이 쪽이 가까웠다.
“입학식?”
수프를 뜨던 로아도르는 시종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먼지가 안 나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그의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이 곳의 식당은 공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방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아카데미에서 새로 학생을 받을 때 거행하는 식이라고 합니다. 참여 하시겠습니까?”
“굳이 안 가도 상관은 없는 건가?”
“네.괜찮겠지요.”
하인인 소녀는 이미 여러모로 알아 봤는지 똑 부러지게 대답한다. 실 재로 로아도르의 신분의 위치상,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이유는 없다.
게다가, 학생들의 대부분이 평민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 렇다. 로아도르는 나름대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어 안심하 며 스프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하지만.
“하지만?”
“루리아 공주님께서 참석하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로아도르의 눈이 다시 차갑게 변한다. 안 그래도 그 공주 때문에 이 런 곳에 들어와야 했건만 그 공주는 아카데미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활 동할 계획인 모양이다. 어제 자신의 앞에서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인 것 치곤, 행동력이 넘치는 모양이다.
로아도르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디, 자신의 행동에 많은 이들이 여파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줬으면 좋으련만 ’
“옷을 준비해줘”
“네.알겠습니다.”
이 것 역시 예측하고 준비 해둔바, 시종은 로아도르 몰래 빙긋 웃으 며 답했다.
기본적으로 아카데미라는 곳은 공적은 시설물이기 때문에 많은 수의 하인들을 거느릴 수 없다. 로아도르 같은 대 귀족이라면 무작정 밀어 붙이면 안 될 것도 없다. 하지만 일부러 분란의 여지를 만들 필요도 없 겠다 싶어 옷 담당, 시중 담당, 그리고 식사 담당 이렇게 세명만을 데리 고 왔을 뿐이다.
시종만을 거느리고 그 입학식이라는 곳에 참석하기 위해 로아도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입학식은 시작했지만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루리아 공주가 참석했으니 자신 역시 참석한다, 라 는 정도로 보여도 충분한 것이다.
그때.
저벅저벅.
복도의 한쪽 끝에서 한 학생이 로아도르와는 반대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막 10세나 좀 넘었을까? 로아도르 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 였지만 로아도르가 신경 쓸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아마, 어느 정도 재 산이 있는 상인 집의 아들 정도일 것이다. 그 쯤에서 로아도르는 신경 을 끊었다.
다만 시종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흑발에 흑안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희귀한 존재이다. 게다가 굉장한 미소년이었다. 죽 찢어진 날카로운 눈에는 얼마나 클지도 모를 눈동자의 광채가 담겨 있다. 휘날리는 머리에 자연스러움은 없어도, 자 연이 다듬은 듯 한 거친 느낌이 한층 더 매력을 살려주고 있었다. 그 소년과 로아도르가 교차하는 순간.
“훗.
그 흑발의 소년은 그들의 귀에 들릴 정도의 작은 웃음을 흘리며 지나 쳤다.
무척이나 오만한 태도다.
그제서야 자신의 임무를 깨달은 시종은 뒤돌아 그에게 외쳤다.
“무,무례하다!이 분이 뉘신 줄 알고 그런 태도를.....
이런 일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실제로 해보지는 않았기에 시종의 목 소리는 무척 어색했다. 전혀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으리라. 실재로 그 흑발의 소년도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멈춰 서지도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다.
로아도르는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내버려 둬”
“하,하지만 도련님”
에틴경의 수행자가 아니고, 또한 에틴경의 수행인이 아닌 공작가의 시종이기에 그에게는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허락 된다.
“저런 것 까지 어떻게 일일이 신경을 쓴단 말이냐. 평민이니 잘 몰랐 겠지. 나중에 주의를 주면 될 일이다. 가자.”
로아도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사소한 일에까 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라는 식의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주인의 말에 시종은 주춤 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로아도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 흑발의 소년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그의 등을 주시한다. 로아도르 반 바이파의 등을.
“꽤나 건방진 놈이네. 감히 누구한테 것 ’이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