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장. 공작가의 도련님. 2
바이파 공작가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무척 드문 일이다. 바이파 공작은 자신의 임무 자체로 집에 붙어있는 것이 힘들 정도이고, 공작의 부인과 딸인 에리지에는 사교계의 일로 항상 바쁘다. 로아도르 만이 집에 많이 머무는 편이지만 그것은 아직 공작의 후예계자로서의 교육 때문이지, 좀 더 나이를 먹는다면 그 역시 이 집에 있는 시간은 극 히 짧아질 것이다.
그렇게,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만찬의 자리에서 바이파 공작은 조심 스럽게 로아도르에게 얘기를 꺼냈다.
“로아도르, 아무래도 집을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 물론 현재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써, 자신에게 할당된 영지까지 가지고 있는 몸이지만 그는 곧 공작이 될 몸. 영지도 대리인 이 관리하고 있으니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즉,공적으로 이 집을 떠날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아카데미 말이다”
바이파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카데미. 아스톤 제국에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운영하는 고등 교 육 기관이다. 지금까지 제국을 대륙 제일 강국으로 끌어 올려준 원동력 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실로 뛰어났으니까. 기사 엘리 엇도 아카데미 출신이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여보. 로아도르는 굳이 그런 곳에 다닐 이유가 없잖아요?”
물론 고등교육기관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로아도르 쯤 되는 신분 이라면 그곳에 다닐 이유는 없었다. 분명한 계급 체제로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평민도 다니는 곳. 그곳의 주된 학생이라면 돈 많은 부유한 상 인의 자식들이라거나, 혹은 쾌쾌 묵은 이름만이 남아 있는 오래된 귀족 정도들일 것이다. 하물며 공작의 후계자야 말할 것도 없다. 자비로 가 정교사를 들이는 것이 몇배나 효율적이니까. 그러자 공작은 난처한 듯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루리아 공주님께서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 하실 듯 해서 말이오”
예상치도 못했던 이름에 공작가의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그런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황족. 그것도 제 1 공주인 루리아라면 더더욱 그렇다. 황족에는 뒤를 이을 적자가 없는 실정이니 실질적으로 루리아 공주가 계승 서열 1순위인 셈이다. 즉, 현재 제국에서 가장 고귀 한 여인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다.
“이상하네요. 어째서 공주님이 그런 곳을?”
공작 역시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그러게 말이다. 다들 난감해 하고 있다. 아카데미 따위야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황가에서 공주님을 그곳에 입학시킨다니, 우리 역시 별 다 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묘한 분위기가 감돌자, 이윽고 로아도르가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느냐? 그...익숙치 않은 분들 곁에서? 그 익숙치 않은 분들이라 함은 황족을 가리킨다. 로아도르는 천성 귀족으로 자라왔다. 다른 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 지 못한다.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에는 공작인 그도 혀를 두를 정도 로 재능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바이파 공작가의 윗사람 이라고 해봤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몇몇 밖에 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루리아 공주께서 그곳에 들 어가신다면 저로써도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러니 저러니 해 도 저는 ‘후보자들 ’중 한명 아닙니까?”
우아하게 물잔을 들이키는 로아도르. 그러자 공작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부인에게 귓속말을 건낸다.
“그,혹시 그런 얘기를 한적 있소?”
공작 부인도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로아도르가 루리아 공주와의 혼담이 있다는 것. 쉬쉬하지만 널리 알 려진 바이다. 황제와의 술자리에서, 구두로나마 혼약을 약속한 적도 있 긴 하다. (법적으로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와 바이파 공작 둘 다 묵인하고 있다. )
즉, 당대에 한해서지만 대공의 지위의 후보라고도 볼 수 있다. 부모님이 귓속말의 내용을 알만 했지만, 로아도르는 눈치 채지 못한 척 식사를 계속했다.
“루리아 공주...인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로아도르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고 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공주, 그리고 황족 쯤 되는 인물이 그리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당황해 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은 바이파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딴에는 무슨 생각이 있어 한 행동이겠지만 로아도르는 치기로 밖 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 역시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다. 그것이 공작의 후계자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귀족이 제 마음대로 행 동한다면 뒤에 남는 것은 타락일 뿐이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입학식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앞으로 한달 정도나 남았을까? 로아도 르는 천천히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물품을 시종을 시켜 아카데미 내의 기숙사로 옮기게 하고, 자신의 아끼는 물품들은 스스로 챙겼다.
집에서 나가는 것이지만, 가족들과 멀어지는 것이지만 로아도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가족들 보다는 시종과 하녀들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정도이고 같은 수도 안인 만큼 얼굴을 보려 한다면 얼마든 지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최고의 검술 스승이었던 엘리엇과 떨어져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해서 엘리엇에게 검술을 배우는 마지막 날.
“흐음 아카데미 입니까?”
엘리엇 역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거린다. 이미 들은 바가 있 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공작의 후계자가 아카데미에 입 학한다는 것에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루리아 공주님께서 입학을 하신다고 하니까 말이지.”
로아도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제서야 사정을 알겠다는 듯 엘리 엇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그는 다른 식으로 이해한 듯 히죽히죽 웃 으며 그에게 말한다.
“루리아 공주님께서 그렇게 미인이라고 하시던데 말이죠.”
“그런 건 상관없어.”
설령 나라를 하나 뒤엎을 미모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 행위는 많은 귀족들에게 동요를 다.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좋게 보일 리가 없 다.
로아도르가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본의가 아니게 입학하는 것임을 깨달은 엘리엇은 표정을 수습하며 위로하듯 말했다.
“아카데미도 좋은 곳입니다.”
“기사 엘리엇보다 훌륭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여전히 부루퉁한 로아도르의 말에 그는 시선을 하늘 위로 올린다. 자 신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고, 그것을 별로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다. 하 지만 로아도르라는 개인에게 어느 쪽이 더 검술을 닦기에 효율적이냐 고 묻는다면 단연코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수련을 받는 편이 낫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결정 된 일. 그가 나서서 해결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쨌든 오늘은 그가 로아도르를 가르칠 수 있는 최후의 날이다. 엘리 엇은 어중간한 수련보다는 마지막에 어울리는 것을 보여주자고 생각했 다.
“그럼, 수업을 시작하죠”
스르릉.
날카로운 쇳소리에 로아도르는 긴장한 눈으로 엘리엇을 바라본다. 오직 황실 친위 기사단 만이 받을 수 있는 검이 눈부신 광채를 내며 로아도르에게 겨누어 진다.
“자,받아 보십시오”
화르륵!
엘리엇의 검에서 푸른빛이 감돈다. 이 것이 오러 소드. 모든 기사들 이 꿈꾸는 검의 이상향. 처음 보는 오러 소드에 로아도르는 동경의 눈 빛을 감추지 못한다.
이윽고, 그의 검이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것을 깨닫고 그 역시 진지 하게 검을 들어 올린다. 이제 겨우 14세. 지금까지 배워온 것이라면 전 부 기본기였지만 근본적으로 바이파 가문에 내려오는 검술 자체는 전 부 습득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으로 로아도르가 검을 섞는 상대는 너무나 강한 자였 다.
승부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 로아도르가 애지중지 하던 철제 연습 검은, 엘리엇의 검에 의해 깨끗하게 두 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오러 소드!’
그저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로아도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저것이 앞으로 그가 걸어야 할 길. 엘리엇이 먼저 보여준 것이다. 로아도르가 엘리엇을 바라보자, 그는 반토막난 검을 검집에 고풍스 럽게 넣고 있었다.
“엘리엇 경에게, 나 로아도르 반 바이파가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오.”
최후로 가르침을 준 최초의 스승. 로아도르는 반쪽난 검을 꺾으며 그 에게 목례를 올렸다.
그러자 엘리엇의 얼굴에도 쑥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로아도르가 대외적으로 쓰는 에틴경 ’의 이름이 아닌, 로아도르라는 본명을 썼다는 것.그것은 로아도르가 윗사람으로써, 아랫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였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엘리엇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검술을 담당한지 1년.떠나보내기엔 너무나 빨랐던 만큼 아 쉬움도 컸다. 조금 더 이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었건만.
“힘내십시오 로아도르 반 바이파”
엘리엇은 진심으로 그를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