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현경.
일반 무인들에겐 논외로 쳐지는 위치.
실상은 초경의 고수가 대다수 무인의 목표이다.
그 위인 화경부턴 정말 하늘이 점지해야 간은 그런 경지이다.
그러나 여기.
튼튼한 기반과 준비된 자원으로 가파른 성장을 해 현경이 된 인물과.
모든 역경을 몸소 부수며 끝없이 성장해 막 생사경이란 경지에 오른 인물이 있다.
두 사람이 가진 마력이 부딪치는 것만으로 엄청난 소음과 열을 냈다.
기세란 무형의 형태인데 그것이 마력에 담기자 일반인은 1초도 못 버틸 죽음의 공간으로 바꿔버렸다.
“놈.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성장이 괴물 같더군.”
“모든 게 이미 준비되었으니까.”
승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대화로 시간을 끌면 이쪽이 더 유리하다.
룬의 서포트도 있지만 이젠 현경에 맞춰 활성화된 육체와 영혼은 상대의 기세를 통해 상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방인의 힘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나는 여태까지 무공만을 사용해왔으니까.”
“그래, 넌 자신을 암왕이라 칭했지. 그러면 어디 내게도 무공만으로 덤빌 생각이냐?”
“글쎄. 그건 아닐 것 같아. 내가 더 내공이 많지만 생사경은 더 이상 내공의 우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으니까.”
“잘 아는군. 생사경은 진리를 깨부순 자들이다. 충고를 해주지. 내 앞에서 방어를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너무 싱겁게 끝나면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없지 않겠느냐?”
“방어 무시라 이건가. 좋아. 그럼 쫑알쫑알 떠드는 건 여기까지 하지!”
현경이 되고 승현은 생각보다 엄청난 차이가 나는 생사경의 벽을 보았다.
너무나 높고 단단해 부수거나 넘질 못할 것 같은 그런 아득한 벽이었다.
단숨에 이; 생사경이란 벽 앞에 서게 되었지만 몇 번의 비무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내겐 다른 게 있다.’
저 벽은 법칙이 가져다오는 이미지이다.
무의 극.
끝이 없는 무의 끝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무극신공의 마지막 벽이었다.
포괄적인 법칙은 하위 법칙을 동시에 어길 수 있기 때문에 그 벽은 무척이나 단단하다.
승현의 그림자 기술 또한 시스템으로 얻지 않았다면 결코 인간의 삶으로는 습득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공간을 이동하고 물질을 어둠 안으로 넣는 등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있어야 했다.
무극도 마찬가지이다.
베고 찌르며 차고 휘두르는 모든 행동에 무가 깃들게 된다.
그에 따라 모든 지 베고 찌를 수 있게 되고 뭐든지 차고 휘둘러 맞힐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에너지나 빛 같은 비물질적인 것들이라도 말이다.
무극신공이란 자신의 육신이 말 그대로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무극이 삼라만상과 우주를 담은 것도 모든 것을 베고 찌르며 차고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까마득한 벽 앞에 부딪친 승현은 그걸 인지했다.
생사경은 오직 무공으로 법칙을 깨부수는 기술이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이 벽을 넘은 괴물 중의 괴물이 있었다.
“자, 간다···.”
말을 마친 고일이 움직였다.
그리고 순간 승현은 현경의 몸에 초인이 되었음에도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쿠와아아아!!
순간 앞에 나타나 수도로 목을 치는 고일에 의해 승현은 저 멀리 무너진 돌무더기로 총알 같이 날아갔다.
그걸 즉시 쫓은 고일은 날아가는 승현보다 먼저 돌무더기 근처에 도착해 그대로 무릎을 세워 승현의 허리를 찍어 올렸다.
다시 허공으로 높이 치솟는 승현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초월한 몸과 알타의 재생력 룬의 방어 그리고 직접 마력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목뼈에 금이 가고 척추에도 금이 간 것 같았다.
치료가 빠르게 이어졌지만 만약 치료할 시간도 없는 난타전이 된다면 이쪽이 무조건 불리했다.
허공에서 생각을 마친 승현은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알타의 힘을 전신으로 퍼트렸다.
예전엔 체모가 붉게 변했다면 이젠 하얀색으로 변했다.
완전히 반신의 육체로 탈바꿈하자 치유속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성표나 활성화한 알타의 힘으로 반신에 가까운 육체를 얻었지만 이번엔 가까운 게 아니라 반신의 몸이 되었다.
비록 피는 아니더라도 알타라는 신수의 힘과 성표의 도움을 받아 온전한 반신이 되었다.
이 경지는 오직 생사경을 넘어가야지 얻을 수 있는 육체이자 영혼이었다.
그걸 알아본 패도천성 고일이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게 네 이능인가?”
“아니. 이런 거다.”
촤좌좌좍!!
승현은 간단한 생각만으로 고일의 주변의 그림자를 둥글게 만들어 사방으로 기다란 꼬챙이를 일으켰다.
이 과정이 단 1초도 안 되는 순간적인 생각으로 이루어졌다.
기척도 없고 어떤 기조도 없이 갑자기 생겨난 꼬챙이들에 고일은 흠칫 놀라며 솟아나는 꼬챙이들을 직감으로 피하거나 막아냈다.
어떤 금속보다 단단한 꼬챙이지만 고일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으니 부러져나갔다.
그러나 꼬챙이가 부러지는 순간 그림자로 된 꼬챙이는 다시 분열하듯 제 몸체에서 다시 꼬챙이를 토해냈다.
정말 생각하는 순간 빛에 한없이 가까운 속도로 명령을 전달받은 그림자가 고일을 압박하였다.
승현은 고고히 서서 그자 생각만으로 그림자를 조종해 생사경의 고수를 괴롭혔다.
현경이 되면서 암왕으로서의 거의 모든 것들의 제약이 풀려났다.
아마도 법칙을 무시하는 생사경 이전의 경지에 다다라서 역시 법칙을 어기는 기술인 암왕의 기술도 허용이 된 것 같았다.
백발에 회색 눈동자를 한 승현은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 억눌렸던 암왕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조종하는 그림자는 들어간 마력만큼 강도를 가진다.
알타의 힘을 쓸 수 있으면서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가진 승현에겐 이런 생사경의 고수조차 속박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었다.
“이놈, 이놈, 이노옴―!!”
발목을 잡고 팔에 휘감기며 끝없이 자신의 몸을 꿰뚫으려는 그림자들에 패도천성 고일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워밍업에 지나지 않음을 고일은 모르고 있었다.
승현은 생각을 떠올리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돌멩이 아래, 부서진 잔해들 사이사이에 있던 그림자가 이동을 시작했다.
“내 힘의 근본은 어둠이다. 작게는 그림자로 대표되며 크게는 빛의 부재를 뜻한다.”
고일에게 모여든 그림자는 서서히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태양이 떠 있었고 반경 1킬로미터에는 수많은 잔해들이 그늘을 만들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늘은 급류가 흐르는 듯 바쁘게 고일에게 이동했다.
그림자를 잃은 물체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분명 그것의 기척은 있지만 그림자가 없어지면서 모습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빛의 부재는 많은 것을 뜻하는데. 그 모든 뜻을 나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지.”
“물러설 성싶으냐!?”
“고일 네가 내게 베푼 그 친절 덕분에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어.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럼 패도천성. 어둠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합니다.”
순간 태양에 서서히 그림자가 지며 일식 현상이 펼쳐졌다.
다만 행성이 가려서 일어난 게 아니라 마력이 그 일대의 빛을 차단하고 튕겨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수십 킬로미터가 모두 승현의 영역이 되었다.
모든 어둠과 그림자는 이제 승현의 편이었다.
“이것이 내가 현경의 경지에 들며 얻어낸 어둠에 대한 이해. 그에 따른 나만의 고유결계. 이름은 간단하게 일식이라 짓는 게 좋겠네.”
사방에 옅은 빛을 빼곤 모두가 어둡게 내려앉았다.
꼭 짙은 어둠만을 조종할 필요는 없다.
한 없이 밝은 빛 아래에서도 멀리 갈수록 빛이 희미해진다면 그건 빌이 점점 공간을 채우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 빈 공간은 바로 승현의 것이었다.
태양의 거의 모든 것이 가려지며 이제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에 따라 정말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었지만 현경에 이른 무극신공과 육체는 주변의 마력을 끝도 없이 삼키며 가공해 뱉어냈다.
한편 아수라신공을 극성으로 펼치기 시작한 고일은 드디어 지옥 같던 그림자 늪엣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승현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공기의 모든 것이 승현의 지배에 놓인 이상 아무리 빨리 움직이고 아무리 대단한 기술을 사용해도 다 읽혔다.
또한.
푸욱!
“···공간 자체를 네놈 손바닥에 두었구나!”
정말 반응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검은색 바늘이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며 음속을 넘어선 속도로 날아들었다.
때문에 고일은 강기로 전신을 둘러 수비를 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공격을 잇지 않은 건 아직 승현이 제대로 무공을 펼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숨을 쉴 때마다 침투하는 승현의 마력은 언제든 고일의 목숨을 노렸고 바늘뿐만이 아니라 다가가려고 할 때면 푹푹 꺼지는 땅이며 승현이 선 땅이 치솟고 이동하는 등 괴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승현은 그림자를 넘어서 어둠을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건 룬의 도움이 아니라 오직 그만의 체득과 생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조금은 더디지만 빠른 속도로 어둠에 적응했다.
“생사경은 법칙을 어기며 반신이 되는 것. 그렇다면 어둠이란 법칙을 휘두르는 나 또한 이미 그 경지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다. 그저 무극의 법칙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 뿐.”
“파(破)―!!!"
고일도 그냥 무인이 절대 아니다.
그 또한 무를 통해 깨트림의 법칙을 어기는 반신이다.
무엇이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깨트리지 못할 게 없었다.
승현의 어둠조차 고일에게 있어선 깨트림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기세만으로 생겨난 아수라가 소리 없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승현이 펼친 고유 결계에서 딱 그가 선 자리 중 수백여 미터만이 햇빛이 들어왔다.
승현의 마력을 깨트려 그 또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승현이 펼친 고유 결계는 막대한 마력을 전제로 한다.
한 번 펼칠 때 너무 많은 마력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마력이 충분해도 쉽게 사용해선 안 되는 기술이다.
더욱이 이미 남의 결계가 펼쳐진 곳에서라면 배는 많은 마력이 들어갈 터였다.
실제로 승현의 결계를 일부 파훼한 고일은 절반 이상의 마력이 소실된 걸 느렸다.
“저 놈은 어떤 괴물이란 말인가.”
승현은 허공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고일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접어두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는데 그런 그의 주먹엔 무극신공과 무언가의 묘리가 담겨져 있었다.
“힘 조절은 하지 않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현의 막대한 마력풀에서 상당양의 마력이 빠져나가며 하늘에서 갑자기 검은색 거대한 주먹이 나타나 고속으로 고일에게 떨어졌다.
고일은 그 주먹에 담긴 힘이 결코 예사로운 힘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도 그 주먹 형상을 향해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쿠구구구!!!!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면서 고일이 있던 일대의 지반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고일을 덮친 주먹은 그대로 고일을 땅에 처박으면서 지반을 망가트렸다.
응집된 어둠과 마력 그리고 강과 중의 묘리가 섞인 승현의 일권(一拳)이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승현이란 자는 분명 암왕이다.
그는 어둠을 관장하는 신처럼 비춰졌으니 말이다.
화경의 고수조차 방금 저 고일을 덮친 주먹을 어떤 수를 써도 막을 수 없었을 거다.
또 당장에 고일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면 피하기조차 불가능했으리라.
“저것은 사술을 넘어서 선술이라 칭해야겠구나.”
정파 쪽 삿갓을 쓴 노인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승현의 기술을 이젠 사술이라 폄하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도 천천히 땅 아래로 밀고 들어가는 거대한 주먹 형상을 보며 삿갓의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