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승현은 다시 길을 나섰다.
나름의 기연으로 고강한 고수로 탈바꿈한 승현은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지금이라면 7왕에서 8왕이라 칭호를 바꿔버릴 수 있으리라.
어쩌면 5제와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다.
5제 중 3제만이 현경이란 경지를 밟았고 나머지 둘은 아직 화경의 끝자락에서 현경을 바라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마침 지금 가는 기미성엔 염제와 빙제가 있군.”
별호에서 알 수 있듯 그 둘은 화공과 빙공을 익힌 고수들이다.
심지어 둘은 남매이고 같은 스승을 두고 있는데 그 스승이 자그마치 천기자였다.
천외천으로 분류되는 그가 직접 무공을 사사한 이들 중 가장 강한 인물.
또 천기자의 사상을 짙게 받아들인 그의 수제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남매는 사이가 좋은 듯 안 좋았는데.
기미성의 남쪽은 동생인 빙제가 차지했고 북쪽은 염제가 차지하며 둘 다 독자적인 문파를 개설했다는 거다.
둘 다 양쪽이 상성이기에 잦은 다툼이 있지만 사생결단까진 가지 않은 나름 앙숙 관계다.
속성이 부여된 무공인 만큼 거의 마법과 동급의 이적을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염제는 화염구 같은 걸 만들어 내거나 맞으면 폭발을 일으키는 강기를 날릴 수 있었다.
빙제는 물 없는 사방을 빙판으로 만들고 닿기만 해도 대상을 얼려버릴 수 있다.
세간에선 둘이 가진 음양을 합하여 합공을 한다면 천하의 2성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라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라 단언했다.
그만큼 그들의 합격술은 천기자가 만든 하늘의 이치와 닿아있었고 그것은 메꿀 수 없는 큰 차이를 메꾸어버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승현은 이곳에서 한 차례 명성을 얻어가기로 했다.
“상대는 역시 빙제가 좋겠지.”
알타의 힘과 어둠의 마력이 무극신공으로 쌓은 본신의 마력과 합쳐졌다.
그중 가장 많은 힘이 녹아든 건 알타의 힘이었고 그 힘은 극양, 그러니까 극도의 플러스 에너지가 되겠다.
숨을 뱉을 때마다 불길이 숨결에 묻어나올 정도로 많은 힘이 이번에 넘어왔다.
한 쪽으로 치우쳐지는 에너지를 무극신공은 암왕이 가진 마이너스 에너지를 끌어와 균형을 맞췄지만 워낙에 강맹한 앝타의 힘을 감내하고자 무극신공의 마력은 마이너스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힘의 비율이 5:2:3의 비율로 뒤섞여 지금의 승현이 가진 마력이 되었다.
균형을 찾았지만 언제든 알타의 힘을 끌어올 수 있는 만큼 사실 양공(陽功)에 가까우니 그와 상극인 빙공을 익힌 빙제와 겨룬다면 높은 승산으로 이길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승현은 기미성 남문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특색을 만들기로 했다.
암왕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그 인상착의만으로도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특별한 복장을 만들기로 한 거다.
이런 방법은 중원 게이트에서 곧잘 쓰이는 방법이다.
개방의 무인들은 허리춤의 매듭으로 자신을 표시하고 하오문의 문도들은 문신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
또 화산은 소매에 매화를 수놓는 걸로 유명하다.
이렇게 자신이나 단체를 알리는 표식은 자주 쓰이고 있었다.
화경이 되고 한 단계 경지가 상승함으로서 법칙으로 인한 죽음의 저주를 복구하는데 들던 마력과 힘이 약간이지만 덜어졌다.
그에 승현은 세포 곳곳에 퍼진 룬을 외피로 불러 모아 검은색 무복을 만들었다.
예전엔 그저 금속 재질로만 변형이 가능한 줄 알았던 룬이었지만 지금처럼.
펄럭!
“질감도 무게도 모두 일반 천옷과 같아.”
룬은 검은색 무복에 검은색 도포로 변했다.
거기에 길게 기른 머리를 잡아주는 머리끈으로도 변해 있었다.
승현의 검은색 무복에는 붉은 글씨로 가슴 한쪽과 도포 그리고 무복 뒤에 ‘暗王’이란 수가 놓여져 있었다.
승현의 고유 직업인 암왕을 수로 박아 넣은 옷을 통해 누가 봐도 승현을 암왕이라 기억하게 만들어주었다.
확실한 특색이 부여되자 바로 세간의 이목이 모였다.
중원 게이트에서 무복은 자신을 알리는 비즈니스맨의 양복과 같다.
즉, 자신이 무인임을 알리는 직업복인 거다.
누구도 멋으로 무복을 입지 않았다.
가끔 철없는 졸부의 아들이 무인이랍시고 무복을 입었다가 근처의 과객이 신청한 비무로 목이 달아는 일은 예삿일이었다.
몇몇 무인들은 승현의 무복에 적힌 오만한 문구에 혀를 차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누구도 승현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승현이 은은하게 풍기는 기도 때문이었다.
절대 고수가 아니고선 피울 수 없는 잔잔하지만 위험한 느낌이 물신 풍기는 기도가.
승현은 그런 세간의 시선을 어느 정도 즐기는 듯 고개를 들고 당당히 걸었다.
이미 특수 대응 부대 대장이란 직함을 가지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런 세간의 주목을 받는 걸 부끄럽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남쪽에서 가장 큰 객잔을 찾은 승현은 그곳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역시 곁들일 술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템인 선인의 호리병 속 화주였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이젠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술엔 미력을 상승시키는 힘이 들어있어. 그렇기 때문에 많이 마실수록 스텟이 올라갔던 거지. 하지만 시스템의 법칙을 일정 부분 무시할 수 있게 된 이상 더는 스텟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체력과 마력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아이템이다.
스텟이 오르는 건 부차적인 것이지만 그로 인한 미미한 상승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푸짐한 안주가 나오고 지구에선 맛볼 수 없는 진미를 즐기며 자작을 할 때였다.
“누구인가 했더니 암왕이라 자칭하는 이방인이었군?”
“흠, 식사 예절이 엉망이군요.”
“하하하! 우리 빙화설문의 앞마당에 그리 화력하게 등장한 건 ‘나 좀 봐주쇼’하고 선전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후후,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요.”
“녹림왕과 싸우다 낭인왕에게 구함을 받은 게 자랑은 아닐 텐데.”
“그렇죠. 그러나 나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생겼다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호오, 듣기와 달리 한 자락 하는 것 같더니 그새 자칭하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가.”
“당신 정도는 내 독문무기를 꺼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승현은 술잔에 화주를 따라 마시며 말했다.
그에 시비를 건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났다.
초경 끝에 이르러 지금은 빙화설문의 무력 단체인 설호대를 이끄는 그인지라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승현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범상치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망신을 받고도 멈출 정도로 그는 마음이 넓지 않다.
뿌드득.
순간 기세를 뿌리는 것만으로 삽시간에 승현의 테이블에 있던 안주와 술잔에 든 화주가 얼어붙었다.
그에 승현은 호리병을 소매 안으로 넣는 척 하며 그림자 속에 보관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상대하면 주인장에게 민폐이니 거리로 나가지.”
“내가 바라던 바다. 어디 천하의 암왕이라 불리는 이의 실력을 좀 보자.”
말을 마친 승현은 그림자를 통해 바로 객잔 입구로 이동했다.
그 이적에 순간 설호대주인 정청대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고강한 고수라고 해도 그 움직임에 따른 반응이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현경의 고수도 눈 위를 걸으면 작은 흔적이라도 남고 아무리 은밀히 이동해도 동선에서 이어지는 체향이며 소리가 있다.
그런데 방금 승현은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객잔 입구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 어떤 기척도 정청대는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승현이 천외천의 고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놈. 그것이 네가 가진 사술이냐?”
“널 상대할 땐 오직 내 무공만을 쓸 테니 두려움에 떨지 마라.”
“하! 좋다. 어디 암왕의 무공을 한 번 보자구나!”
정청대가 객잔 밖으로 나오자 객잔 위층부터 거리까지 인파가 잔뜩 몰렸다.
“자, 그럼 어디 자웅을 겨뤄보자.”
“미안한 말이지만 너는 랑아군 보다는 못하는군.”
“으득, 그 모욕을 듣고 내가 흥분해 경거망동할 생각은 말아라. 차합!”
극냉의 마력이 둘러진 손바닥이 승현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승현은 이참에 자신이 깨달은 무극의 외의 한 조각을 내보였다.
“보라. 이것이 나의 무공이다.”
“아······.”
승현의 마력이 무극의 묘리에 따라 얽히고 또 얽히며 알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해와 같았고 심연 속 괴물을 보는 듯 하기도 했으며 무수한 별이 뜬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승현의 기세가 불완전하게 형상화되었음에도 초경에 달하는 고수인 정청대의 빙장이 힘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무극의 오의는 모든 걸 포용하고 모든 걸 덮어버린다.
그것이 설령 하늘이며 신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형상된 기세 하나만으로도 압도된 정청대는 승현의 앞에 섰을 때 북풍설한과도 같은 극냉의 마력이 모두 흩어져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승현은 압도되어 그 기세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정청대의 목에 가만히 수도를 가져다 댔다.
“이로서 나의 승리이다.”
“······패배를 인정하오.”
“가서 빙제에게 전하라. 금일 암왕이 그대에게 비무를 신청하노라고.”
승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순간 주변에 침묵이 감돌았다.
“······!”
“우오오오!!”
세간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지자 정신을 차린 정청대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길을 나섰다.
승현은 그런 정청대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다시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안주거리와 화주를 극양의 마력으로 녹여내 식사를 계속했다.
“그는 강하더냐?”
“······강했습니다. 문주님.”
“얼마나 강하더냐. 감히 비교해보아라.”
“그의 기세는. 마치, 마치 우주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삼라만상이 절 덮쳤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소인의 시야를 어지럽혔습니다.”
“······.”
“그렇게 되니. 저의 폭설은 그저 그것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암왕 그자의 앞에서 더 이상 기세를 올릴 수 없었습니다.”
“총경의 경지인 네가 그리 느꼈다면 분명한 것이겠지. 기대가 되는구나.”
젊은 얼굴의 청년은 정청대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청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웃음을 짓던 청년이 그에게 물었다.
“내가 패배할까 걱정이 되느냐?”
“아, 아닙니다! 그저, 그저······.”
“되었다. 패배할 수도 있지. 기세만으로 널 압도하였다면, 또 본신의 힘을 발휘하지도 않았다면 나는 필패를 할 것이다. 청대야, 너는 가서 내 누이를 불러오너라.”
“······!”
“어서 불러오라. 지금 그가 정문에 도착하였구나.”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인 빙제의 말에 정청대는 재빨리 후문으로 빠져나가 기미성 북쪽으로 달렸다.
“오랜만에 호적수로구나. 과연······.”
빙제는 빙그레 웃었다.
빙화성문의 앞에 선 암왕 최승현은 막 쓴 비무첩을 문지기에게 건넸다.
벌써 정청대가 한 수도 쓰지 못하고 제압되었음이 알려진 터라 문지기는 그 비무첩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비무첩이 빙제에게 전해지자 곧 빙제는 승현은 안으로 들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