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승부 예측은 했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아직 모른다.
그저 승현은 룬이 쌓기 시작하는 무공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동시에 수만 번의 모의 전투를 치르며 그 경험과 지식을 쌓았다.
확실히 서포트를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이미 이 이미지 트레이닝은 인간의 범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만 번의 모의 전투를 동시에 수많은 가정의 수를 산정해 시도하는 걸 인간의 뇌가 버틸 리가 없다.
그러나 룬의 마법 같은 과학력은 뇌를 기반으로 하여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승현은 직접 보지 않은 여러 낭인 고수와 녹림 고수들의 대결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걸 느끼며 더욱 남중섭과 가영호의 대결에 집중했다.
승현은 느끼지 못했지만 승현의 몸은 그렇게 돌아가는 시뮬레이션의 효과로 점점 무공이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아주 미미하게 몸의 세포들과 근섬유가 진화를 시작했다.
원래라면 몇십 년을 깨달음을 얻고 시행착오를 거쳐 몸이 완성되겠지만 알타의 무한한 재생력과 고차원 문명의 이기인 룬의 서포트로 순식간에 적용이 되고 있었다.
남중섭과 가영호의 전투는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얼마나 대단한지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다를 절정 고수들이 그 여파만으로 내상을 입고 쓰러질 정도였다.
뱀의 형상을 하는 남중섭의 마력과 거목의 형상을 하는 가영호의 전투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놀라운 전투였다.
이와 비슷한 전투는 승현이 알기론 1,500레벨에 달하는 거대 레이드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을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수많은 영웅들이 모여 마력을 끌어올려 싸운 거라면 지금은 단 두 명이서 싸워 그와 비슷한 기세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화경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겠는가?
가영호가 강한 무게로 내리찍으면 남중섭은 그걸 흘려 밖으로 튕겨내거나 교묘하게 피해냈다.
그렇게 되면 주위로 가영호의 강기가 날아가는데 그 강기의 위력이 바다는 못해도 강 정도는 두 쪽으로 갈리지게 만들 만큼 강력해 폭탄이 터진 듯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중섭이 자신의 찌르기 공격을 넣으면 가영호는 그걸 막았는데 그때 발생하는 마력파 등은 멀리 떨어진 승현의 내장에도 진동을 줄 정도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전장 수백 미터에는 사람도, 서 있는 나무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었을 때 승현은 불현듯 몸에 변화를 감지했다.
정확힌 몸이 품고 있는 마력이 변하고 있었다.
알타의 힘으로 되었던 신수의 마력과 자신이 여태까지 쌓은 마력들이 하나로 뭉치며 위아래로 분리되었던 길이 열렸다.
“후우―!”
화륵.
날숨을 뱉을 때마다 강한 열을 품은 마력이 빠져나오며 잠깐씩 불꽃이 일었다.
한데 뭉친 무극신공의 마력과 알탈의 힘은 전혀 새로운 마력으로 탄생했다.
계약자인 알타는 승현과 연결된 끈으로 끊임없이 마력을 전해주었다.
무극신공과 시스템으로 오른 모든 마력이 알타의 힘과 합쳐졌다.
여기에 암왕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어둠이 가진 마이너스 에너지까지 뒤섞이면서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1+1+1=3가 아니라 1+1+1=7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집을 크게 키운 마력들은 몸 안의 그릇을 모두 채우자 어느 순간 룬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이미 마력의 절대량으론 생사경을 넘보던 승현의 마력이 세 배 이상 올랐다.
그러나 그런 어마어마한 마력이 생기고 변화하고 있음에도 주변에 어떤 전조나 영향을 생성하지 않았다.
덕분에 승현은 남중섭이나 가영호와 같은 초인들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승현의 기도가 촘촘한 옷감마냥 잘 짜이고 또 두껍고 무겁게 변했다.
전에는 성기기만 해 무림 고수들에겐 큰 압박을 주지 못했다면 지금 변한 이 기세는 충분히 현경의 고수와 견줄 수 있을 만큼 특별해졌다.
“이런 게 기연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룬의 서포트이니 기연이라 치기엔 어폐가 있군,”
미완이던 무극신공에도 괄목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극도의 유와 쾌를 핵심으로 하는 남중섭의 무공과 강과 중을 중심으로 하는 가영호의 무공을 수없이 분석하며 자신이 가진 무극신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무극이란 모든 무의 끝이다. 어찌 그것이 마냥 무겁기만 하고 강하기만 할까.’
무극에는 유는 물론이고 쾌와 중 그리고 강까지 모든 묘리가 담겨 있다.
곧게 뻗어 주먹을 내지르면 그것이 쾌이고 강인 것이고 상대의 공격을 흘린다면 그게 유인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에 무의 묘리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무극신공이 담은 참된 뜻이었다.
“삼라만상을 담고 우주를 넘보는 무공이었군. 이런 무공이니 여태 감도 잡지 못한 거겠지.”
여태까지의 고생이 헛수고가 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무공을 샘플로 남기고 자신을 통해 수십만 번 이상 가상으로 대결을 해본 결과 무극신공의 참된 묘리를 깨달았다.
그 깨달음으로 인해 승현의 실력은 화경의 경지 끝자락까지 순식간에 올랐다.
그만큼 화경 고수인 남중섭과 가영호의 혼신을 다한 전투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승현은 마력은 이미 현경을 넘어섰고 육체 또한 화경의 고수들이 겪는다는 환골탈태와 현경의 고수가 겪는다는 반로환동의 단계를 넘었다.
승현에게 부족하던 경험과 정신적 성장만 있으면 굳이 요란하지 않게 지금처럼 기량을 올릴 수 있었다.
승현은 더욱 많고 밀도가 높아진 마력을 느끼며 짙게 웃었다.
“후후, 지금이라면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도 약간의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마력으로 찍어 눌러도 되겠지만 기량 싸움으로 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저 두 사람과는 머릿속이라도 수만 번 이상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없는 밑천까지 다 드러내는 탓에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승현은 둘의 싸움에 끼어들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에 각각 한 명씩 하고만 싸우던 걸 이젠 둘 혹은 셋까지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빠르게 조건을 상정하고 변수를 삽입해 각종 환경과 상황에서의 전투를 펼쳤다.
무림인에게 이보다 가지고 싶은 능력이 또 있을까 싶다.
견식만 해도 기량이 올라가며 몸이 변화하는 능력 말이다.
화경 끝자락의 고수가 되어버린 승현은 암왕의 힘도 조금이지만 돌아온 걸 느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중원 게이트가 거는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다.
이젠 물건을 넣고 빼는 것은 물론 마차 하나 정도는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의 그림자를 조종할 수 잇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그림자를 통한 이동도 자유롭게 되었다.
물리력을 부여하는 것도 어지간한 강기나 마력은 우습게 막을 정도의 강도를 부여할 수 있게 되며 생사경의 고수만 아니라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무극의 오의는 깨닫지 못했군.”
화경의 끝자락까지 정신과 경험이 성숙했지만 워낙 난해한 무극신공은 그 오의를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승현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무극신공의 오의를 깨닫는 그날.
자신은 생사경의 고수가 될 것이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한 오의를 쓰지 못할 뿐이지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명색이 화경의 경지인데 어렴풋이 느끼는 바가 없겠는가.
두 사람의 생사결은 서서히 승현의 예상처럼 남중섭에게로 기울었다.
천년 거목도 노련한 나무꾼이 수천 번의 도끼질을 하면 결국엔 넘어가게 되어 있다.
모든 공격을 흘려내고 가영호를 압박하는 남중섭에 의해 가영호는 서서히 수세에 몰렸다.
승현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싸우고 싶단 생각이 물신 들었다.
송곳 같은 찌르기에 만신창이가 된 가영호는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크오오오오!!!”
“어림없다!”
가영호의 함성에 잠시 거리를 준 남중섭은 낭패한 얼굴로 가영호에게 달려들었다.
쾌속함 속에서도 늘 여유가 있던 것과는 조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진 모습은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가영호의 전신에 허연 김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피부가 붉게 변했다.
무겁고 둔중하던 그의 기세도 일변해 여전히 무겁지만 거칠고 모난 바위가 되었다.
“선천지기까지 사용하다니······!”
“어차피 이대로 관아로 가나 여기서 목이 잘리나 매한가지라면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 가영호가 가파른 절벽을 구르는 바위마냥 남중섭에게 돌진했다.
그 저돌적인 모습에 남중섭의 흘리는 유의 수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굴러오는 바위를 흘릴 방법은 자신도 선천지기를 폭발시키는 일밖에 없었다.
선천지기란 생명이 가지는 고유한 마력.
살면서 쌓이는 업과 카르마와 같은 것.
그런 것을 소진한다는 건 삶을 단축시키고 몸을 망가트리는 일이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가영호는 거리낌 없이 선천지기를 사용했다.
그 흉흉한 기세에 남중섭은 서서히 수세로 밀렸다.
아무리 상성이라고 해도 더 강한 힘을 주면 상성을 깰 수 있다.
강풍에도 꺾이지 않는 갈대라면 폭풍이 되어 뿌리째 뽑아버리면 될 일이다.
그것이 지금 가영호가 하는 방식이었다.
그에 몇십 합을 주고받던 남중섭은 낭패한 얼굴로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도주로를 만들었다.
이미 녹림왕 가영호의 친위대는 모두 정리했다.
그 정도면 소기의 성과는 있는 셈이니 체면은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아마 세간에선 자신과 싸우다 가영호가 도망쳤다고 알려지겠지.
“가영호! 이 무뢰배야,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말을 남긴 남중섭은 그의 검으로 수천 개의 강기를 줄기줄기 날리며 퇴각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되자 가영호도 강기를 막아낼 뿐 특별히 추격을 하진 않았다.
친위대가 모두 당하고 저쪽은 아직 상당수 고수들이 남아있었다.
비록 화경의 고수라고는 하나 남중섭이 그들과 합공을 한다면 필패였다.
그래도 남중섭의 목 정도는 함께 가져갈 수 있겠지만.
낭인들이 수급을 챙기고 물러나자 붉게 변했던 가영호의 몸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이거 꼴이 말이 아니군.”
“그러게 말입니다. 녹림왕.”
“흐흐, 날 죽일 생각인가? 그렇다면 아쉽게 됐군. 지금 날 죽여 봤자 남중섭의 명성만을 올려줄 뿐이니까.”
“그러겠지요. 그렇기에 전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녹림은 은원을 잘 아는 곳. 네가 그리 나온다면 소정의 보상만 받고 내 원한을 사해주마.”
“소정의 보상이라. 당신의 목숨으로도 다 원한을 청산할 수 없습니까?”
“그렇지. 녹림에 의리는 그리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드리지요.”
승현은 창고를 열어 수천 개의 금화가 든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놨다.
“여기 계산으로 치면 황금 1,700냥입니다. 한 사람의 관 정도는 황금으로 칠할 수 있는 양입니다. 이 정도는 알아서 들고 갈 수 있겠죠?”
“크흐흐, 이거 개무시를 받는구만. 좋다, 그 금으로 녹림과의 원한을 털어내마. 물론 이건 나의 목숨값이 포함된 계산이니 나중에 또 우리 녹림채를 건드렸다간 무사치 못할 거다.”
“각 채주들에게 알리세요. 암왕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요.”
“기고만장하긴. 음? 호오, 놀랄 노자군. 그 잠깐 사이에 화경이라니. 무공의 경지를 올리기가 이리도 허무하였던가.”
“제가 특별한 거니 상관하지 마시죠.”
“크큭, 그래. 네놈의 내공과 육체는 아직도 본래 경지와 맞지 않아. 얼마나 빠르게 성장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구나.”
30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주머니를 한 손으로 번쩍 든 가영호는 슬쩍 눈빛으로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사실 무림인의 은원을 돈으로 갚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화경의 고수인 가영호는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승현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건 승현에게 확실한 명분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녹림의 체면을 깎는 일임에도 가영호는 돈을 요구했고 이로서 공식적인 은원을 해결한 셈 친 것이다.
원래라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중원의 법이다.
이 룰을 당사자도 아닌 대리인이 어겼으니 가영호의 체면도 땅에 떨어지리라.
이번에 남중섭에게 도망쳤단 소문까지 붙으면 아마 당분간 왕의 칭호를 받았음에도 어느 술자리에서건 잘근잘근 씹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