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살기는 자신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마력과 상응하여 주변에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촘촘하지 못한 승현의 기도라고는 해도 막대한 마력이 이를 커버했다.
덕분에 녹림왕과의 기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강한 살기에 노출된 초목들이 빠르게 시들고 병들어 죽어갔다.
아름드리나무조차 마치 시간을 빠르게 감은 듯 잎사귀가 시들며 죽어갔다.
녹림왕은 자신의 호위대까지 데려온 것 같았는데 무려 3명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가 있었고 나머진 모두 절정 고수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거대 문파나 세가의 주요 전력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들이 넓게 포위망을 갖추고 있자니 승현으로선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었다.
‘성표의 힘을 빌리면 그림자 안으로 숨어 도망칠 수 있다. 여유를 가지자.’
포위당한 것이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지만 승현은 여유를 느낄 수 있도록 미리 도망칠 루트를 정해뒀다.
이미 그 시점에서 녹림왕과의 대결에서 패한 셈이지만 승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코끼리에게 덤비진 않으니까.
지금 승현은 코끼리에게 이빨을 드러낸 사자와도 같았다.
“듣자하니 무기를 만들어 쓴다던데, 무기는 꺼내진 않는 건가?”
“그건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녹림왕처럼 크고 무거운 도끼는 그리 길지 않은 타르샤로 막으면 충격이 쉽게 전해진다.
대신 손바닥으로 도끼를 밀어내듯 쳐내면 그나마 무리를 덜하고 쉽게 공격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타르샤보단 체술을 쓰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다면 시작하자고!”
녹림왕 가영호는 그대로 도끼를 옆으로 세워 야구 배트를 스윙하듯 승현에게 휘둘렀다.
도끼의 장점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한 방에 담긴 거력일 거다.
검이나 도로는 나무를 베는 게 어렵지만 도끼는 무거운 머리 부분에 힘이 모이며 도검보다 쉽게 나무를 베어낸다.
그런 만큼 녹림왕의 도끼는 묵직하고 둔중하게 움직였지만 무조건 막는 게 아닌 회피를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후웅, 콰과가가!!
한 번 휘둘러진 도끼에서 강기가 발출되며 넓은 면적을 휩쓸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맥없이 부서지며 쓰러졌다.
그런데 이 도끼의 속도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린 게 아니었다.
범인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저 녹색광선이 무차별적으로 숲을 분쇄하는 것뿐이었다.
나머진 승현의 잔상이나 우두커니 서서 잔상이 보일 정도로 팔을 휘두르는 녹림왕 가영호 뿐이었다.
도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를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며 승현은 패턴을 분석했다.
하지만 수백 번이 휘둘러진 지금까지도 같은 행로로 그어지는 도끼는 거의 없었다.
승현이 피하는 걸 예측하며 날리는 강기는 반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승현은 녹림왕의 공격을 분석하고 또 해부하며 최단 루트를 구성했다.
‘모두에게 무의식이 존재하고 무공이 무의식에 각인되었다면 분명 도끼의 움직임에도 무의식이 작용할 터. 그런 미세한 습관과 규칙을 찾을 수 있다면 나라고 반격을 못할 이유는 없다.’
속도라면 자신 있었다.
비록 암왕의 힘이 약화되긴 했어도 작은 판 정도는 만들 수 있었고 허공에서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 작은 판을 밟고 방향을 전환했다.
다른 때엔 강기 앞으로 당당히 막거나 도끼의 행로쯤에 판을 만들어 공격을 방해했다.
“과연 사술 같은 걸 부린다더니 이런 것인가!”
그걸 본 녹림왕은 사방이 분쇄되며 들리는 소음 너머로 외쳤다.
승현이 계승한 암왕의 힘은 분명 무림에선 사술이라 불릴 만하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어둠을 조종하는 능력은 기로서 모든 걸 해내는 그들에겐 사술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녹림왕도 승현의 기술을 사술로 치부했다.
본인에겐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힘인지라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날다람쥐처럼 회피만 하는 승현에 간단하게 승현을 간보던 녹림왕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사술을 써도 좋다. 어디 나의 월광부편파도 피해봐라!”
가영호의 기세가 유형화되면서 거대한 거목의 잔영이 비춰졌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녹색 강기의 색이 더욱 짙어지고 더욱 넓어졌다.
이젠 선이 아니라 숫제 면으로 공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녹림왕의 도끼에서 형식이 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형식 없이 도끼를 휘둘렀던 거다.
승현은 도끼 지근거리에 얇고 긴 그러면서 넓은 면적의 그림자를 만들어 날아오는 강기의 틈을 억지로 만들었다.
강기의 부딪친 그림자는 산산이 부서지며 다시 물리력을 잃었지만 덕분에 몸 하나 피할 구석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점점 속도와 힘을 더해가는 강기 폭풍에 결국 그 강기를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콰아앙!!
강기를 몸으로 받은 승현은 그대로 강기의 반발력을 이용해 뒤로 쭉 물러났다.
모양새는 마치 강기에 맞고 뒤로 날아가는 모양새였지만 무사히 파괴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크하하! 그걸 맞고도 잘도 움직이는군.”
“쯧, 역시 무공이란.”
승현은 팔 깊숙이 침투한 녹림왕의 마력을 억지로 밀어내며 혀를 찼다.
분명 마력을 둘러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마력이 팔에 침투해 몸을 굳게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화경급 고수가 방비 없이 맞았다면 상당한 치명상이었을 거다.
이 무거운 마력은 더 많고 높은 마력으로만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회복한 승현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아직까지 싸울 용기가 남아 있다니. 과연 본 녹림채를 건드린 배짱이 있군.”
“내게도 비장의 수가 있으니까.”
“크흐흐, 기대하지.”
승현은 바뀐 기수식을 펼쳤다.
몸을 잔뜩 낮추고 양손을 축 늘어트린 다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돌적이면서 방어를 도외시한 기수식에 녹림왕도 코웃음치던 걸 멈췄다.
“이봐. 어설프게 수라도를 따라하지 말라고.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거니까 말이야.”
“나는 수라도가 뭔지 모른다. 이건 내 무공의 또 다른 기수식. 그것을 위한 사전 준비 자세일 뿐이니, 까!”
말을 마치는 순간 승현의 몸이 대포알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다리에 수많은 마력이 몰리며 박찬 땅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땅이 갈라지고 푹 파일 정도의 속력으로 날아간 승현은 랑아권과 같이 손가락을 세워 손끝에 강기를 펼쳤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녹림왕의 명치 부근으로 날아들었다.
“얕보지 마라, 애송아―!”녹림왕 가영호는 강하게 소리치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정확한 타이밍을 노리고 도끼를 찔렀지만 승현은 물체화한 그림자를 밟고 다른 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수차례 반복하기 시작하자 점점 그것에 익숙해져 사방을 날아다니며 녹림왕을 긴장시켰다.
나중에 가면 이렇게 직접 물체화한 그림자를 밟는 게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순식간에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죽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 해도 수초에 수백 미터를 이동하는 통에 천하의 녹림왕조차 약간이지만 긴장했다.
“과연, 사술과 무공이 섞이니 성가셔지는군.”
촤아악!
한순간 녹림왕의 팔뚝을 긋고 지나치는 승현이었다.
알타의 힘이 조금 묻어나 가영호는 마치 화상을 입은 듯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분명 승현의 움직임을 시야로 포착할 순 있으나 쉽사리 공격을 하는 게 어려웠다.
강기를 음속으로 날린다고 해도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승현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아마 예측하여 강기를 날린다고 해도 저 사술로 미꾸라지처럼 피할 테지.
가영호는 조금씩 늘어나는 상처에 인상을 찌푸렸다.
쉭, 쉭, 쉭!
이번엔 작은 표창 같은 것들이 자신의 기감을 방해했다.
무언가 날아드는 걸 포착해 도끼를 휘저으면 그건 승현이 아니었다.
상당히 귀찮게 되자 녹림왕은 별로 쓰고 싶지 않던 수를 쓰기로 했다.
“무식하게 힘으로 패는 건 영 내키지 않는데 말씀이야. 그래도 사술을 섞으며 싸우는 상대이니 그에 맞춰줘야지!”
콰아아아!!
녹림왕 가영호가 드디어 진심으로 전력을 냈다.
지구의 화경 고수인 후인 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마력!
모든 걸 파괴할 기세의 거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순간 허공에서 멈춘 승현은 그 장면을 바라봤다.
“저것이 중원 게이트의 화경 고수가 가진 진짜 힘인가. 롱 씨보다 더 짙고 순도가 높아.”
후인 롱이 고작 4년 만에 급격히 많은 마력을 모았다면 상대는 수십 년 동안 벽돌을 쌓듯 쌓아올린 힘이다.
기교에서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마력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지금 승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 판 거하게 붙어 보자구나!”
“흐음.”
절로 찌릿한 감각에 승현은 허공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저건 못 이긴다.
아마 알타의 힘과 룬 그리고 성표에 탐식 등을 모두 동원하고 나서야 겨우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터.
‘그리고 저주 때문에 알타의 힘과 룬을 쓸 수 없는 지금은 절대 이길 수 없지.’
아쉽지만 냉철히 판단한 승현은 녹림왕 가영호에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여기 있었군. 녹림와 가영호. 오늘이야말로 네 녀석의 현상금을 받아가마.”
“쥐새끼 같은 놈이 하나 왔구나! 오냐, 오늘 두 놈의 제사상을 차려주마.”
갑작스럽게 등장한 일단의 무리에 의해 승현은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낭인왕 남중섭?”
“흠? 그렇군. 네가 요즘 무림을 시끄럽게 한다는 이방인이로구나. 이방인이면서 무공의 실력이 뛰어나다더니 설마 녹림왕을 상대로 전력을 내게 할 줄이야.”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왕의 별호를 가진 낭인들의 정점.
낭인왕 남중섭이었다.
이미 풀 파워를 전개한 녹림왕은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아 보이자 그대로 남중섭에게 강기를 날렸다.
후와앙.
“낭인조차 아는 도리를 이리 몰라서야. 하여튼 무뢰배로구나. 가영호.”
검신이 유난히 얇고 긴 검으로 부드럽게 날아온 강기를 하늘로 흘려보낸 남중섭은 가영호에게 이죽거렸다.
확실히 하오문이 준 정보에 의하면 가영호에겐 금 1만 냥이란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데 이는 감히 황실의 은 수송 행렬을 습격한 죄목으로 걸려 있었다.
“쫑알쫑알 입으로 싸울 시간이 없다. 얘들아. 쳐라!”
승현의 도주를 막고자 진을 쳤던 가영호의 호위대와 남중섭과 함께 온 낭인무리가 한대 얽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방에서 보기 드문 고수간의 생사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대결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가영호와 남중섭의 대결이 기다려졌다.
승현은 높은 허공에 그림자를 밟고 서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 봤다.
여러 무공이 뒤엉키며 난전이 벌어졌지만 아직까지 남중섭과 가영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세를 폭발시킨 가영호도 기도를 정리하고 차분하게 돌아왔다.
“이봐, 이방인. 어부지리를 노리던 상관없지만 이 대결에 끼어들지 마라.”
“흠, 저 나름대로 강한 편에 속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네가 시야를 끌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고는 해도 이건 나와 가영호의 싸움이다. 네가 나설 공간이 아니야.”
“좋습니다. 대신 관전을 하도록 하죠.”
“좋아, 그 정돈 허락해주지.”
말을 마친 남중섭이 그대로 가영호에게 향했다.
백여 미터 정도의 거리는 먼지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주파해 검을 찔렀다.
도끼에 부딪치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검은 유연하게 휘며 도끼를 밀어냈다.
‘부드러움과 유연함으로 된 무공이로군. 무겁고 딱딱 끊기는 가영호와는 상성이 좋아. 이 싸움, 길어지면 남중섭의 승리다.’
승현은 주로 두 왕의 결투를 주시하며 빠르게 데이터를 축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