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고민을 하던 승현은 관리자에게 물었다.
“둘 다 지원이 있긴 합니까?”
“물론이죠! 사용자 편의를 위한 관리자 호출인 만큼 대 출혈 서비스를 한답니다. 물론 출장비랑 A/S비용도 받긴 하지만 사소한 거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생사경을 이룩하는 걸로 하죠.”
“선명하신 선택! 성공률 92%의 선택입니다.”
“진화의 결정은 몇 퍼센트입니까?”
“그건100%죠. 존재가 달라지는데 지금 인간인 사용자에게 걸린 법칙은 주인을 잃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곱셈이 마지막에 이뤄지면 더 없이 좋겠죠?”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구체적인 도움을 듣고 싶군요.”
“중원 게이트로 가셔서 무극신공을 완성하세요. 제가 특별히 몇몇 가지를 캐어해 드리겠습니다. 가령 게이트의 시간 비율을 조종하거나 위기에 순간 짠! 하고 나타나기도 할게요.”
“결국은 내 힘으로 하라는 소리군요?”
“생사경이란 경지는 다 그런 겁니다. 그건 반신에 드는 위치이니까요. 그 성표가 힘을 주어도 진짜로 생긴 성표는 아니니 아직 사용자님은 인간이세요.”
“아직은 인간이라. 말이 좀 그렇군요. 어쨌든 그럼 서포트 부탁드리죠. 된다면 시간 비율을 최대한 늦춰주시기 바랍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니.”
아직까진 500레벨의 몬스터가 지구에 등장하고 있다.
천 레벨이 넘어가는 레이드 몬스터나 보스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다.
원이 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수는 대략 10명 정도이고 한 번 투입되면 쉽게 교체하거나 빈 자리에 투입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았다.
이미 승현의 손에 다섯 손가락이 넘는 원이 죽었으니 활동하는 원의 숫자도 적을 터.
무엇보다 이번에 자신에게 제약을 걸기 위해 온 팀까지 합하면 현재 원의 전력은 알드리안이나 조커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거기에 후인 롱이나 이제강이 합류하면 사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승현은 알드리안과 조커 등에게 중원 게이트로 들어갈 것이란 사실을 알리고 단단히 마음먹은 대로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하는 게이트 입구 앞에 섰다.
“후읍, 이번에야 말로 생사경에 도달하여 이딴 저주를 꺾고 당당히 나오겠다.”
승현은 당찬 걸음으로 게이트 안에 들어왔다.
[임무 : 천하제일
-천하제일인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세요. 단, 한 번만 게이트를 오갈 수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입장 횟수를 모두 채워 임무를 달성하기 전까진 예외 방법을 제외하고 게이트를 나갈 수 없습니다. 신적 존재의 개입으로 중원 게이트 전체의 지구와 시간 비율이 변합니다.
최초 입장 시 임무를 받으면 단 한 번씩 입장하고 나갈 수 있는데 이미 한 차례 밖으로 나갔던 승현은 이제 이 게이트로는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고선 나갈 수 없었다.
승현의 힘을 파악한 시스템도 예외 방법을 미리 서술해두었다.
그리고 관리자는 약속대로 시간 비율을 조종해준 것 같다.
얼마나 느리게 흐를지는 모르지만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승현에겐 유리했다.
“좋아! 몸 상태는 좋진 않지만 충분히 날뛸 수 있을 정도다.”
승현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큰 소리로 외치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알타의 힘을 모두 심장 괴사를 막는데 투자하고 룬은 육체 붕괴를 막기 위해 사용했지만 여전히 육체만은 반신에 한없이 근접한 몸이다.
당연히 마력 없이도 아음속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반신의 몸이 아닐 때에도 가능하던 속도이기에 달리는 와중에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강남녹림십팔채를 만났던 숲을 바로 지나치고 바로 백채현으로 달렸다.
그곳에 도착하여 검은 무복을 사 갈아입고 잠시도 쉬지 않고 호고성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랑아군의 랑아천문 앞에 도착했다.
“네놈은······!”
“아아, 오늘은 시비를 걸로 온 게 아니오. 그저 랑아군과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온 것일 뿐이니 말을 좀 전해주시오.”
“······잠시만 기다려라.”
문 앞을 지키던 무사는 승현을 바로 알아봤다.
그 난리를 쳤는데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승현이 정중하게 나오자 무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소식을 안으로 전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안에서부터 북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랑아천문의 문주인 랑아군 고병태가 밖으로 나왔다.
“킁, 어린놈아.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느냐?”
“오랜만입니다. 랑아군.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작은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허! 요거 된통 당하더니 몸을 사리는 게 자라 같구나.”
랑아군의 독설에도 승현은 그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일 뿐 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승현은 모든 걸 다 사용해야 랑아군을 이길 정도이다.
법칙을 통한 저주는 두 개나 되는 승현의 수를 봉인시켰고 암왕의 힘조차 방해했으니 가진 모든 걸 총 동원해야 겨우 랑아군과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제 무공실력이 절정고수보다 낮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흐음, 그러냐. 고놈, 이제 망나니 같이 나대진 않을 심산인가 보군. 따라와라.”
랑아군은 지그시 승현을 보더니 이내 승현을 문파에 들였다.
그를 따라 외관의 어느 한적한 정자로 간 랑아군은 승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스스로를 암왕이라 칭하던 얼간이는 없어지고 조금은 겸손한 무인이 되어 돌아왔군. 이방인 치곤 꽤 놀라운 일이야.”
“제 힘은 분명 암왕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어둠이란 근본을 다루는 무학이기 때문이죠. 전 세상이 암왕이라 부르던 전대 암왕께 힘을 넘겨받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여전히 네 녀석은 암왕이라 이건가?”
“예. 비록 중원에선 통하지 않더라도 전 암왕이 맞습니다. 그건 제 정체성이니까요.”
“허허, 고놈 멍청하기만 하고 자존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알맹이도 조금은 있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승현은 자신을 평하는 랑아군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이곳에서 왕이란 별호를 가진 이들은 화경의 고수들이다.
그들 모두 롱과 같은 쟁쟁한 실력자들이고 법칙의 저주를 받은 지금 승현은 그들에게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승현은 암왕이란 칭호를 고수했다.
감히 승현 본인을 제외하고 어둠을 이해하고 다루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너의 사술은 특별해 보였으니 그렇다면 나 또한 네 녀석의 괴변을 받아주마. 그래, 이제 내게 할 작은 부탁이 뭐지?”
“저와 실력이 비등한 자와 비무를 성사시켜주십시오.”
“아아, 밥상을 차려다가 네놈 목구멍에 쑤셔 넣어라? 내 손으로?”
“대신, 유사시에 랑아천문파가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시류를 따지지 않고 돕겠습니다.”
“널 키워서 낭인처럼 쓰라 이 말이군. 뭐, 좋다. 지금의 넌 솔직히 이제 내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니 말이야. 조금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랑아군은 초경의 중간임에도 승현의 상태를 꿰뚫어봤다.
과연 마력에 대해선 마력으로 이루어진 정령이나 드래곤만큼 월등한 이해도를 가진 무림인다운 식견이었다.
랑아군은 승현을 외관에 있는 수련장으로 데리고 갔다.
가던 길에 제자 중 한 명을 호출한 그는 짧게 설명했다.
“네놈을 돕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랑아천문을 위해서다. 은혜를 알면 말을 지키도록 해라.”
“제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다. 너랑 싸울 녀석은 내 제자 중 한 놈인데 애가 좀 똑똑해. 이제 초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아끼는 놈이지.”
“절정 끝자락이라. 그렇군요. 지금의 저는 그 정도입니까?”
“모르지. 하지만 그때 싸운 너의 내공이나 기도를 보는데 딱 초절정 입문 정도야. 아직도 기도가 정리되지 않았어. 그냥 내공으로 밀어붙여서 초절정인 거지.”
모든 능력을 전개하면 생사경의 고수와도 견주던 승현은 중원 게이트의 제약과 법칙의 저주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젠 초절정 입문자로 평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지금도 성표나 여러 무구를 쓰고 조금만 무리하면 랑아군 정도의 고수는 제압은 불가능해도 큰 피해 없이 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시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알타의 힘이나 룬을 사용해야 한다는 변수까지 있어 쉽게 장담을 할 정도도 아니었다.
즉, 지금 승현이 무극신공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초절정 입문에서 절정 끝자락.
랑아군은 그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상대를 붙여준 것이다.
“넌 천재라고 보기엔 어려우니 여기 지내면서 몇 번 더 싸워라. 제자 놈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겠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됐어. 배려는 얼어 죽을 배려.”
수련장에 도착하자 1대 제자들과 2대 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수련장 중앙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사부님. 그 자가 이번에 제게 깨질 자입니까?”
“어린놈아. 주둥이는 잘 놀리거라. 이놈이 약해 보이긴 해도 3할은 숨긴 거니 실전이면 네 텅 빈 모가지가 날아갔다.”
“하하하! 저리 설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승현은 잠시 청년을 바라보다가 랑아군을 바라봤다.
“제자분이 상당히 오만하군요. 마치 절 보는 것 같습니다.”
“애가 똑똑해서 그런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면서 강자한텐 납작 엎드리니 아주 버릇을 잘못 들인 거지. 네가 흠씬 패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냐?”
“사지만 멀쩡하면 되는 거겠죠?”
“대가리도 멀쩡히 달아 놔라.”
랑아군의 허락이 끝나고 승현은 수련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만한 눈빛을 하고 있는 청년에게 말했다.
“그럼 실전 같은 비무를 청하겠습니다. 암왕 최승현입니다.”
“으하하!! 언제 중원에 8왕이 생겼지? 아교권 배도욱이다. 이제 아교왕이 되는 건가? 하하하!”
조롱이 섞인 자기소개에 승현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부류에게 존중은 사치였다.
승현은 적대적인 기세를 피어 올리기 시작했다.
“대충 규칙은 사지 안 자르는 거랑 대가리는 노리지 말고. 병신만 안 만들면 모든 공격이 허용된다. 여차하면 내가 끼어들거니 헛지랄하면 내 손에 반 죽는 거다.”
랑아군의 규칙 설명이 이어지고 바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호기롭게 아교권 배도욱이 시작했다.
랑아군의 제자라 그런지 랑아군의 독문무공인 랑아권을 사용했는데 랑아군이 호랑이도 물어죽일 늑대라면 아교권은 그런 늑대 밑에서 자란 새끼 늑대 같았다.
승현은 타르샤를 소환하기 보단 주먹을 쥐었다.
파바바박!
“······!”
“······."
쾌속하게 승현의 몸 곳곳을 물어뜯으려던 배도욱은 승현이 거짓말 같은 속도로 자신의 공격을 쳐내자 놀란 얼굴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승현은 붉은 머리를 안 했다 뿐이지 반신에 근접한 몸이다.
그런 몸의 근력과 순발력은 뇌가 내리는 전기신호보다 빠르게 몸이 반응하게 되어있다.
허공에서 난잡하게 섞이기 시작하는 손은 두 사람의 공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승현의 쪽이 더 단단하고 빨라 한수 혹은 두수 정도 승현이 앞섰다.
“크아아압!”
기합을 불어넣은 배도욱은 다리로 승현의 하체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랑아군의 독문무공인 랑아권은 권법인 만큼 상체 공격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거의 모든 무공의 신법에는 하체 공격기가 존재한다.
특히 보법을 밟으며 상대를 교란시키고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하체 공격은 아주 적절하게 먹혀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파앗.
순간 무릎 옆쪽을 가격당한 승현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수세였던 상황을 반전시키기엔 충분했다.
“나의 랑아권을 받아라!”
이를 악물며 최대한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배도욱이었다.
그 이유야 당연히 다시 장기전으로 가면 내구력과 속도에서 밀리는 그가 수세로 변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