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검은 불꽃에 달려든 곤충들은 대군주의 가호를 받았음에도 재도 남기지 못하고 타버렸다.
평범한 곤충이 아니었지만 이쪽도 평범한 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일처럼 덮친 곤충들이 일제히 불타올랐지만 공영은 끝없이 곤충을 소환했다.
하지만 불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의 권능이 된 정화의 불꽃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승현은 오히려 정화의 불꽃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템의 범주를 벗어난 덕분에 한 개체에만 불이 붙는 게 아니기에 정화의 불꽃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공영은 침음을 삼켰다.
“완전히 상성이로군. 그대가 나서라. 나로선 방도가 없군. 대신 술법을 이행하겠다.”
“후우, 결국은.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건가.”
게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일의 손짓에 엠페러 길드에 잔존한 정예 200명이 열을 맞춰 앞에 섰다.
승현은 가볍게 발 빝에 그림자를 만들어내 허공에 섰다.
그리고는 알타의 힘을 뿜으며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륵.
“마치 북유럽 불의 수르트를 상대하는 프레이가 된 기분이군.”
“수르트라 그거 영광스러운 칭호네.”
승현은 게일의 비유에 픽하니 웃었다.
하지만 북유럽신화의 결말을 승현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건 게일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이는 끝내 수르트에 의해 불타 죽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술법이 이어질 때까지. 승현 당신은 한 발도 못 움직일 겁니다! 군주로서 명한다, 영혼을 결속한다!”
게일이 검을 뽑으며 명하자 엠페러 길드의 이들의 몸에 일제히 황금빛이 폭사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사람의 형체를 한 금색 가루들이 각 길드원과 게일에게 흡수되었다.
“영온흔 대가로 한 결속은 모두가 죽기 전까지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희생해 우리의 가족을 지키는 거다! 모두 준비는 되었나!”
“예스, 마이 마스터!”
결연한 외침에 엠페러 길드원들이 일제히 외쳤다.
승현은 잠시 게일이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비록 잘못된 길이지만 죽음을 각오한 영웅의 마지막 길을 보고 싶었다.
“흠, 이러니까 내가 악당처럼 비춰지는군.”
하나 악당의 역할이 되었다면 철저히 악이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승현은 대충 영혼의 결속이 어떤 기술인지 알아차렸다.
답은 게일의 외침에 있었으니 그걸 염두에 두면 답은 쉽다.
“그럼 전투를 시작하자.”
“으와아아아!!!”
“와아아!!!”
게일의 선창에 길드원들이 일제히 따라 외치며 달려들었다.
승현은 과거 자신을 시험했던 전대 암왕의 기술을 모방해보았다.
슈슈슉!!
승현의 뒤로 넓게 수천 개에 달하는 검 형상을 한 그림자가 생겨나 엠페러 길드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마치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하는 소수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같았고.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세례를 뚫고 고지를 점령하려는 결연한 의지의 특수부대와 닮았다.
그러나 그들의 용맹이 스파르타의 전사와 같다 하여도 자연재해 앞에선 무의미하다.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단일의 검들이 쏟아졌다.
검이 몸에 박힌 엠페러의 전사들은 검에 실린 강한 힘에 뒤로 밀렸다.
심장이 관통당하고 머리가 꿰뚫려도 그들은 꿋꿋이 일어서 다시 달려들었으나.
그칠 줄 모르는 검의 비의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바람이여!”
후열에 있는 마법사 계통의 전사들도 고군분투했지만 그들의 마법은 승현을 향해 날아들다가도 갑자기 생겨난 검은색 막에 의해 막혔다.
“크아아아!! 최승현!! 나와 같이 지옥으로 가자!”
게일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여기서 최고 강자인 게일만이 전사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승현의 앞에 도착했다.
승현은 그런 게일의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500레벨도 아니고 고작 300레벨 중후반인 길드원들은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도 없었고 그나마 500레벨을 넘긴 게일 프리스만이 남았지만······.
푸욱.
“수고했다. 편히 잠들고. 인류는 내가 반드시 지켜내마.”
“······원을 조심해라. 최승현.”
타르샤를 소환한 승현이 게일이 미처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심장에 검을 박았다.
게일은 나직이 경고를 주고는 피를 토해냈다.
이미 엠페러의 모든 길드원들은 금색 가루가 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게일의 숨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그도 황금색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자, 공영. 이제 너와 나만 남았구나. 술법은 잘 됐냐?”
승현은 비웃음을 담아 이죽거렸다.
술법을 행하던 공영에게도 승현이 만든 암검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방해로 절반 정도 되었군. 계산 외의 전력이야. 아주 대단해.”
“나는 암왕의 힘을 이었다. 알고 있어? 어둠은 비단 그림자만 있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이······?!”
푸지지직!!
푸화악!
순간 공영의 몸 안에서 밖으로 빛 하나 반사되지 않는 검은색 창들이 몸을 찢고 튀어나왔다.
“어둠은 빛이 없는 모든 곳에 있고 빛이 있을지라도 상대적으로 어두운 곳이 존재하지. 암왕은 그런 모든 걸 조종하고 다룰 수 있는 자야.”
“끄륵, 이, 이게······.”
“네 몸 안엔 빛이 없잖아? 마침 몸을 보호하는 마력도 약해졌고. 막지 못하면 죽어야지. 안 그래?”
“네, 네 노, 옴.”
뿌드득.
승현은 그대로 공영의 머리를 관통하는 검은 뿔을 만들었다.
원래라면 불가능할 공격이었으나 술법이란 걸 하느라 대부분의 마력을 잃은 공영의 몸은 쉽게 어둠을 허용했다.
공영이 쓰러졌을 때 힘겹게 광장으로 또 다른 원이 도착했다.
“공영이 당한 건가. 최승현 네녀석은 대체······.”
“아아, 식물을 조종하는 능력인 것 같은데 우리 금방 끝내자?”
승현은 울쩍 허공에서 도약에 대포알처럼 그녀에게 날아갔다.
마법사 계열임에도 육체적 스펙은 뛰어난지 바로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승현에게 목이 잡히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커헉!”
“파워 대결을 해보자.”
승현은 그대로 여인의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정화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꺄아아아!!!”“이 불은 마력으로만 꺼진다. 네 마력을 써서 불을 꺼봐. 난 계속 마력을 주입할 테니.”
가볍게 힌트를 준 승현은 알타의 힘까지 끌어내 정화의 불꽃에 힘을 실었다.
고통에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던 원의 여인은 2, 3분 정도 저항하다가 이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기실 이런 마법사 계열은 근접한다면 이제 승현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공영은 간부로 불릴 정도로 높은 직급이지만 상성이 너무 나빴고 재가 된 여인도 상성이 나빴다.
그렇게 모두 정리를 마친 승현은 재물로 쓰이던 헌터들의 시신을 태워주곤 방치해둔 탐식을 회수하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과연 이게 뭐려나?”
승현은 조심히 빛의 구를 보며 감정을 시도했다.
[아이템]
창조의 큐브조각
-등급: 신화
-총 세 개의 조작을 모을 시 창조의 권능을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과연 원이 탐을 낼만한 아이템이었다.
창조란 신의 영역이다.
그런 권능을 얻으려면 아마 신이 되어야 할 거고 저 권능을 비틀고 어기려면 창조자쯤은 되어야 가능할 거다.
“어쩌면 창조의 권능을 얻은 자들을 창조자라 부르는 걸지도.”
승현은 창조의 큐브조각을 그림자 안에 넣어봤다.
다행히도 무언가의 결정과 달리 안에 잘 들어갔다.
승현은 다시 한 번 무언가의 결정을 꺼내 그림자에 넣어보려 했지만 아직도 넣는 것이 불가능했다.
“도대체 이 결정은 뭘까?”
손에 들린 무언가의 결정을 살피며 승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사히 큐브조각을 회수한 승현은 자리를 벗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미궁을 벗어났다. 미궁 입구 구석에 쓰러져 있던 문지기는 싸늘한 시신이 된 상태였다.
완전히 미궁을 벗어나자.
우르르!!
미궁이 있던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깊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 구덩이를 주변에 있던 바닷물이 빠르게 채워지면서 마치 싱크 홀이 일어난 것 마냥 커다랗게 구멍이 생겼다.
미궁의 근본이 사라지자 미궁이 무너진 것이다.
세기의 천재이자 대영웅이라 불리던 게일 프리스와 그를 따르던 수많은 군웅들이 저 안에 잠들었다.
승현은 잠시 묵념을 하고는 곧 한국으로 이동했다.
본부에 돌아온 승현은 피곤한 얼굴로 다시 조커를 찾았다.
눈깔사탕을 입에 문 조커는 그런 승현은 웃으며 반겼다.
“어서 와. 미궁의 반응이 일제히 소거되었어. 그리고 네가 갔던 미궁은 붕괴가 폭착되었던데 뭘 가져온 거야?”
“이거.”
“응? 호오, 대단한 에너지 집약체로군. 또 나조차도 풀기 어려운 복잡한 코드가 깃들어 있어. 이거 참, 탐나는데?”
조커의 앞에 쭉 일어난 그림자에서 창조의 큐브조각을 꺼내 보이자 조커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간 큐브조각에 입맛을 다셨다.
“안 뺏어가. 그보다 일이 좀 복잡해지겠어.”
“무슨 일인데?”
“엘페러 길드의 몇몇 간부가 살아서 네가 비열한 습격을 했다고 떠드는 중. 속속 차단하고 왜곡해주고 있어서 백날 떠들어도 별 탈은 없겠지만 엠페러 길드와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반 현터 협회 연대가 생겼어.”
승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들의 구성원은?”
“다행이 고위급 인사는 별로 없어. 있는 이들도 우리 쪽 영향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지. 이미 나의 절친한 동료가 미국에 구두로 경고를 주었고.”
“그 절친한 동료는 덕분에 미국에서 애국자 취급 받으며 비난을 들었다네.”
때마침 도착한 알드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계의 영웅인 알드리안은 공명정대하고 중도적인 걸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거였고 말이다.
이번 일로 인해 미국 쪽 정부에 미운털이 좀 박혔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두 근간 중 하나인 엠페러 길드였으니 더더욱 당연할 테고.
그래도 엠페러의 기반이 사라졌으니 금세 수그러들 테다.
“자네가 알아봐달라던 이들의 소재를 찾았네. 과연 시스템이란 것 없이도 충분히 일가를 이룬 자들이더군. 과거 마력 그래프를 보면 정말 경이로운 일이야.”
“아, 그들을 찾았어?”
“나도 몇 명 찾아냈어. 베트남에 한 명과 러시아에 한 명.”
“중국에 셋을 찾았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도 한 명씩 있더군.”
“좋아. 그럼 각각 위치를 알려줘.”
승현은 희소식에 방긋 웃으며 두 사람이 찾은 인물의 위치를 받아냈다.
그가 찾은 건 다름 아닌 전승인들이었다.
순수하게 지구에 늘어난 마력만으로 강함을 이룩한 이들.
사실 전승인들이 외부에 노출되었을 때 원은 가장 먼저 전승인들을 죽였다.
그 이유가 나중이 되면 골치가 아파진다는 이유였는데 과거 승현은 그런 전승인들을 찾아 보호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중원 게이트를 갔다온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은 당장 전력화가 가능한 훌륭한 전투요원이었다.
여기에 승현의 무극신공의 하위판인 무극심법과 검법 등을 가르쳐준다면 분명 나중에 든든한 전력이 되어줄 거다.
“우선 한국에 있는 사람부터 찾아가보자.”
승현은 바로 본부에 있는 공간이동기를 통해 알드리안이 알려준 위치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