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가라한은 수십 배에 달하는 중력 속에서도 승현보다 약간 못 미치는 속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승현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중력을 절반 정도 덜어냈음에도 같았다.
가라한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랑아군보다는 못하다.’
이미 매운 맛을 본 승현에게 가라한의 움직임은 그리 대단할 것 없었다.
분명 깔끔한 동작이이었고 그가 봤을 땐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히려 랑아군의 특유의 버릇 같은 초식은 동작에 군살을 붙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런 불필요한 동작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냈다.
승현은 그것이 바로 무공의 이치라는 걸 지금 깨달았다.
‘꼭 모든 걸 절제하고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 깨달음을 얻고 나자 매번 스스로 잘라냈던 무극신공의 안내를 조금 더 참고하기 시작했다.
쾅! 콰앙, 쾅!
“무슨 일이지? 움직임이 둔해졌군.”
“둔해진 게 아니라. 힘을 가하는 거다!”
승현은 무조건 빠르기만 하던 검을 조금 느리게 했다.
탐식에게도 오히려 중력을 더욱 가해 무게를 늘리도록 주문했다.
속도에서 비등하거나 조금 더 우위를 점한 가라한은 승현을 더욱 압박해갔다.
수세에 몰린 승현이었지만 승현은 침착하게 무극신공의 묘리를 담기 시작했다.
쿠아앙! 콰아앙!
“······!”
가라한은 주춤하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에 승현은 작게 미소 지었다.
군더더기들이 모이며 하나의 형상을 이뤘을 때.
승현의 검은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선보이며 단 한방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승현의 탐식이 조금 더 가까이 가라한에게 다가갔다.
이는 견고한 그의 심검이 점점 밀리고 있단 증거였다.
한 번 상승세에 오른 무극신공은 승현의 검인 탐식에게 무한한 힘을 주기 시작했다.
파치이잉!
“커헉······!”
“끝이다!”
압도적인 힘에 결국 가라한이 가진 권능에 가까운 힘인 심검이 파괴되었다.
그러자 피를 한 바가지 토하며 속절없이 뒤로 물러나는 가라한이었으나 승현이 득달같이 쫓아 그대로 담식을 그의 몸에 박았다.
푸슉!
“부, 분하, 다······.”
“분할 거 없어. 여태까지 쌓은 업보라고 생각해.”
탐식에 찔린 가라한은 서서히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승현은 탐식의 성능 중 하나인 라이프 드레인으로 소진된 체력을 금세 채웠다.
정상적으로 체력이 돌아오자 탐식을 뽑은 승현은 미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주인, 주인! 저거. 저거 나 줘.’
갑작스럽게 자신을 멈춘 탐식에 승현은 가라한의 손에 쥐어진 검병을 바라봤다.
검이라기엔 손잡이만 있어서 검이라 부르기 애매했는데 저런 종류도 먹을 수 있나 보다.
승현은 가라한의 손에 쥐어진 검병과 검집을 회수하고서 미궁 안에 발을 들여놨다.
“어디, 이게 무슨 아이템인지 볼까?”
[아이템]
마력 응축의 검
-등급: 이미테이션
-먼 옛날 어느 차원에 존재하던 전설적인 검사의 검. 그는 검신 없이 바다를 갈랐다고 전해진다
-마력을 부여하면 그에 비례한 검신이 생긴다.
확실히 검이긴 하다.
그런데 등급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미테이션. 모방 혹은 모조품을 뜻하리라.
즉, 이 검은 실존하는 무구의 모조품이란 소리인데.
승현은 한 번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봤다.
그러자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푸른 검신이 생겨났는데 그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미약한 마력을 주입했음에도 이 정도면 분명 원래 아이템은 전설적인 등급 어쩌면 불가해 등급일 지도 모르겠다.
지금 티스푼 정도의 마력만으로 나무 정도는 두부 자르듯 가를 수 있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승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먹는 거야.’
;그게 결국은 내 전력 상승을 의미하지.‘
‘흥, 주인. 점점 맛있게 익어간다는 건 알겠는데 아직 탐스럽지도 않거든?’
잠시 탐식에게 뼈아픈 사실을 지적받은 승현이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검을 탐식에게 먹였다.
워낙 강력해져서 그런지 검병과 검집을 가져다 대기 무섭게 흡수했다.
이러면 나중에 검사와 싸울 때 탐식을 꺼내면 상대방의 검을 1분 안에 없앨 수도 있겠다.
‘나도 마력이나 의지가 깃든 건 흡수 못해. 물론 어느 정도 선이 넘어가는 것만.’
탐식의 대답에 잠시 아쉬움이 들었으나 인내 미궁 안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언데드가 아닌 슬라임이었는지 곳곳에 슬라임의 점액이 묻어 있었다.
쭉 아래로 걸어가자 드디어 미궁의 입구가 나타났다.
승현은 문지기가 있는지 살폈는데 저 구석에 쓰러진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히 노인에게 다가가자 치골 아래로 하반신이 사라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노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후후, 이거야 원. 문지기로서 문조차 지키지 못하는군.”
“당신이 이 미궁의 문지기입니까? 상처는?”
“무뢰한들에게 당한 거지. 이리 살아있는 것도 사실은 기적이야. 아니, 저주인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어째서 하체만 사라진 겁니까?”
승현은 조심히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노인의 상태는 심각했다.
“무뢰한들 중 능력자가 있었어. 그들의 합공에 당하고 말았네. 이 꼴이 된 건 그들의 능력 중 하나야. 그자가 다루는 곤충에 달했지.”
“아······!”
승현은 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떠올렸다.
가장 유명하고 또 그가 가장 잘 아는 원의 일원들 중 하나였다.
‘벌레술사, 공영.’
벌레를 다루는 능력인데 그 곤충의 크기와 모양 등이 각양각색이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음에도 그의 모든 곤충을 볼 수 없었다.
주로 수만 마리의 메뚜기를 닮은 곤충을 불러내 상대의 살점을 파먹는다.
가학적이면서 더러운 성질을 가졌다.
때문에 그에게 당한 이들은 대부분 노인처럼 살점이 좀먹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후후,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궁금한가 보군. 그 이유는 미궁 안에 보관된 그것 때문이네. 그 힘이 날 이곳에 붙들고 있는 거지.”
“도대체 미궁 안에 뭐가 있는 겁니까?”
승현은 치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죽었을 자의 목숨을 연명시키는 막대한 영향력.
수많은 차원을 돌며 진귀한 것들을 모았을 원이 탐내는 그 무언가는 승현에게 무한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노인은 승현의 질문에 씩 웃었다.
“나도 모르네. 그저 무언가일 뿐.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여길 들어간 이들의 규모가 어떻죠?”
“글쎄. 약 200명. 아, 실력이 한참 안 되는 자들까지 합치면 300명이야. 아마도 그들은 재물로 쓸 요량인 것 같더군.”
“재물······?”
노인은 옅게 웃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힌트를 주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승현은 굳게 닫힌 미궁의 문을 열었다.
이미 그들이 간 곳까진 모든 몬스터가 정리돼서 승현은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음속의 속도를 내는 그의 각력은 쾌속하게 엠페러 길드 일행과의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전력질주를 한 승현은 얼마 안 가 속도를 줄였다.
‘굳이 모든 몬스터가 남았을 때 달려들 필요는 없지. 재물이란 것도 걸리고.’
어쩌면.
그들이 준비한 재물을 이용해야 수도 있다.
그러니 저쪽에선 느낄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 게 좋았다.
승현은 일전에 돌파한 미궁의 거리를 떠올리며 천천히 텅 빈 미궁 안을 걸었다.
한참을 걷던 승현은 슬슬 엠페러 길드 측ㄹ 기척으로 거리를 가늠하던 승현은 그들이 던전의 끝에 다다를 것 같아 보이자 바로 전력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니 저쪽에서도 승현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일행 중 하나가 반대 방향인 승현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 명을 보내서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다.
“어림없지!”
승현은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알타의 힘을 개방했다.
순식간에 발을 박차고 날아가는 거리가 족히 두 배는 늘어났다.
그림자에서 바로 탐식을 꺼내든 승현은 미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상대방이 저 멀리 보였다.
마법 계열인 듯 허공을 날아서 다가오고 있었는데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는 승현을 보고는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뿌드득, 뿌득!
사방에서 나무뿌리가 솟아나며 길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뿌리가 자라는 속도보다 승현이 더욱 발랐다.
그리고 근접한 순간.
쿠우웅!!!
“꺄으윽!”
탐식에 의해 순간 수백 배에 달하는 중력이 오직 그녀에게 가해졌다.
던전 특성상 파괴는 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승현은 탐식을 그 자리에 두고선 그대로 뿌리로 인해 좁아지는 통로를 통과했다.
빠지직.
“잘 있으라고!”
아슬아슬하게 수십 미터의 통로를 덮는 뿌리를 통과한 승현은 계속해서 달렸다.
어느덧 엠페러 길드가 던전 마지막에 도착한 게 느껴졌다.
1분여 정도 남짓한 시간만에 거리를 좁힌 승현은 앞을 막고 있는 황금색 방벽을 어깨로 박았다.
콰가가강!!
보호막으로 보이던 방벽을 뚫어버린 승현은 한 손을 땅에 짚으며 찾지했다.
“최승현! 당신이었군요.”
“반가워. 게일 씨.”
던전 중앙 쯤엣허 멈춘 승현은 엠페러 길드의 앞을 막는 격이 되었다.
승현을 본 게일은 침음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그에 승현은 미소를 그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세상은 멸망할 겁니다. 이건 변치 않습니다. 신이 정한 섭리를 당신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이리 움직이는 겁니까?”
“물론. 그 신이란 작자들도 결국 상관을 두고 있더라고.”
“무슨······.”
“무슨 말이긴, 창조자들 위에 한 명이 더 잇단 소리지. 과연 이게 그의 뜻이었을까?”
“필멸자여. 어리석군. 창조자를 방치한 건 창조주이다. 창조주의 묵인은 곧 승낙의 의미.”
“누가 알아? 창조자들이 몰래 일을 꾸몄거나 반란을 일으킨 걸지.”
“······말이 안 통하겠군.”
“창조자 밑에 빌붙어 빌빌대는 너희보단 말이 잘 통할 걸?”
우우웅.
원의 일원인 공영의 너른 소매에서 말벌 같은 곤충들이 끝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죽어라. 너 정도 재물이라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합류하겠습니다.”
게일이 의지를 발현하자 곤충들에게도 황금색 빛이 깃들었다.
아마 대군주의 능력이 곤충들에게도 발동한 것 같다.
서서히 거대한 공동의 하늘을 곤충들이 시꺼멓게 채워나갔다.
거기에 더해 공여의 하의로도 거미 종류의 곤충이 쏟아지며 서서히 공동을 채웠다.
승현은 잠시 자신의 뒤에 있는 빛나는 빛의 구를 살폈다.
“이봐, 공영. 이게 뭔지 아나?”
“내 이름을 알다니. 네놈. 설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내가 만든 게 불인 게 중요하지.”
승현은 손에서 검은색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정화의 불꽃을 보며 웃었다.
“자고로 벌레 퇴치엔 불만한 게 없다고들 하지.”
“회귀자! 과연, 전 차원신의 안배가 발동한 거였군. 매번 차원신들의 수작질이 무엇인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어. 네게서 느껴지는 그 기이한 얽힘까지도!”
“과연 간부다운 안목이군.”
흥분한 공영은 그대로 기세를 폭사시켰다.
그러자 울렁거리며 곤충들이 일제히 승현에게 달려들었다.
승현은 그대로 정화의 불꽃을 이용해 몸을 감싸는 불의 구체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