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중원 게이트는 거의 유일하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하루가 지구에선 삼일 정도로 기존의 빠르게 흐르던 게이트의 시간 왜곡 현상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승현이 머문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지구에선 거의 다섯 달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은 다시 한 번 많은 게 바뀌고 있던 중이었다.
“로봇인가. 벌써 저런 게 돌아다닐 수 있나?”
“조커의 지식은 과연 대단하더군. 이곳에 오고 둘째 날부터 무언가를 만들더니 이젠 그녀의 발명품으로 한국이 도배가 되었어.”
확실히 지금 한국의 풍경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스마트폰의 시대를 넘어서 홀로그램 영상기를 보기도 하고 거리에 교통경찰이 교통로봇으로 바뀌었고 움직이는 청소 로봇이 거리를 치우고 있었다.
드론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은 보는 것만 해도 놀라움을 선사했다.
건물 외벽에 쏘아 틀어진 광고에는 트럼프 컴퍼니의 젊어지는 약이나 치료용 나로 로봇을 홍보하기도 했다.
“그 녀석은 하라는 일은 안 하고······.”“그녀는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네.”
“한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원의 움직임을 감시 중이란 소리야?”
“그러하네. 과연 놀랍더군. 사실 그녀가 저렇게 문명을 혁신적으로 진화시킨 것도 더 수월하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라네.”
“설마 빅 브라더라도 되겠다는 건가.”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정보를 수집하려면 모든 정보를 발아래 두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 자칭해서 흑막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난 그 흑막 세력의 간부이라네. 하하!”
“알드리안도 넘어가지 마.”
“걱정 말게. 자네도 간부니까.”
“······.”
“하하하하!”
진심은 건지 기분 좋게 웃던 알드리안은 승현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보다 그녀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던데······.”
“옷만 갈아입고 바로 만나봐야겠어.”
“그렇게 하게. 그럼 나는 타국으로 출장을 가보겠네.”
헌터 협회의 상징이 된 알드리안인지라 불안정한 국제 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매일 같이 불려가는 중이었다.
승현은 없는 거나 다름없는 상의와 넝마가 된 바지를 쓰레기통에 넣고 몸을 씻어 새 옷을 입었다.
검정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까지 쓴 승현은 그의 집에서 나와 자동차를 타고 특수 대응 부대의 본부로 향했다.
부르응.
삐빅.
“······?”
“현재 당신은 원행 금지 차량에 탑승하고 계십니다. 일 회에 한해 벌금이 붙으며 이 회 적발 시 차량 압류에 들어갑니다.”
“가지가지 하는 구나······.”
앞을 가로막은 경찰 로봇에 한숨을 잠시 내쉰 승현이었다.
그렇게 벌금 100만 원을 물고 본부에 도착하자 여기저기에 로봇이 잔뜩 보였다.
안내데스크에서부터 경비와 청소 로봇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승현은 묵묵히 발길을 옮겨 조커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녀의 공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이번엔 출입 통제가 이루어졌다.
대장으로 있는 승현이기에 카드를 찍고 안으로 쭉 들어가자 삼중 사중으로 된 문이 하나씩 열렸다.
그렇게 문을 통과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끝에 드디어 조커와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라, 친애하는 나의 동지여!”
“그런 설정놀음은 나중에. 뭔가 알아냈다고?”
“흥, 재미없긴. 알은 다 받아준단 말이야.”
“······그래서. 알아낸 건?”
“미궁에 이상 반응 포착. 아무래도 기록상 뭔가 등장할 예정인 듯. 미국 남부의 미궁으로 엠페러 길드가 이동 중. 중국 국경도 검림이 공략 선언. 둘 다 휘하에 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포진해 있어.”
“심각한 일이군. 둘 중 어느 쪽이 전력이 강하지?”
승현은 일전에 클리어한 미궁의 난이도를 떠올렸다.
600에서 700레벨 단위의 몬스터가 득실득실한 외길 던전 형태였다.
다른 던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상황은 비슷할 거다.
“전력이 더 강한 건 역시 엠페러 길드야. 그쪽 길마 능력도 있고 좀 복잡해. 또 낀 원의 인물도 다들 공격형보단 서포터에 가깝고.”
“그 자료 확실한 거야?”
“날 뭐로 보는 거야? 당연히 모두 테스트한 결과지. 99.98% 확실해. 물론 너처럼 이단 변신을 하면 확률은 12%로 내려가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확신이 있단 소리군.”
“검림 쪽은 혼란을 주기 위한 것 같아. 아마 널 견제한 거겠지. 검림 길마에게 도움 요청이 오기도 했고 여러모로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잘 알았어. 그럼 엠페러 길드는 지금 공략 상황이 어떤지 알아?”
“절반? 응, 미궁은 내가 만든 첨단 위성으로도 관측이 어렵더라고.”
“바로 가봐야겠군.”
“그럼 잘 갔다 와. 난 밥이나 먹어야지.”
조커와 헤어진 승현은 옷을 벗어 그림자에 넣어두고 룬으로 전신을 감쌌다.
오랜만에 은빛 기사가 된 승현은 잠시 몸을 풀었다.
“전보다 확실히 가벼워졌군. 마력을 갈취하지도 않고 말이야.”
사용자가 되어 쓰는 룬은 더 이상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의 훌륭한 무구가 된 룬은 더 없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본부에 있는 공간이동 장치를 통해 미국 남부에 미궁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촤아아.
드래곤의 자폭으로 인해 토지 자체가 날아간 상태라 그런지 남부에 위치했던 미궁은 외딴 섬으로 변했다.
그 주변은 모두 바다로 변했는데 얼마나 폭발이 심했는지 그로 인해 폭발 중심부엔 지금도 화산활동이 일어나는 중이다.
그나마 멀리 떨어진 이곳만이 딸이 깎여나가 얕은 바다가 된 것.
“누구지? 여긴 엠페러 길드가 공략 중이다. 돌아가도록 해.”
“예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군. 얌전히는 못 비키겠지?”
“서, 설마. 전신?”
“전신이 누군진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부터 하지.”
승현은 순간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앞을 막던 헌터의 앞에 도착해 턱을 가격했다.
다들 레벨이 높아 어느 정도 힘을 실어 치자 그대로 상대의 몸이 붕 떠 허공을 갈랐다.
“젠장, 공격해!”
“으아아압!!”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승현에게 달려들었다.
승현은 무극신공의 묘리를 떠올리며 빠르게 주먹과 발을 놀렸다.
파바바박!
랑아군과 비교하면 초라하지만 깔끔한 연계기가 각 헌터들에게 적중하며 사방에서 달려들던 헌터들이 거의 일제히 뒤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순식간에 일곱 명이 쓰러지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흠칫 놀랐다.
“최승현! 우리의 미궁 탐사를 방해할 이유가 없잖아!”
“미안하지만 아주 큰 이유가 있어.”
“미친! 혼자서 미궁의 물건을 독차지할 셈인가?!”
“그건 부수적인 것. 정확힌 너희 길드 마스터를 저지하고자 찾아왔다.”
“욕심이 과하군. 필멸자.”
그때 묵직한 중저음이 들렸다.
그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거기엔 동양적인 옷차림에 일본도와 같은 도를 들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너는?”
“원의 일원. 달을 벤 남자, 가라한이다.”
“너도 원이군.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깊은 대화는 필요 없지.”
“성질도 급하군. 너는 무엇을 위해 그리 필사적이지?”
“말했을 텐데. 대화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흠, 너. 이 차원이 소멸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나?”
“······.”
“알고 있군. 그렇다. 이대로 가면 결국은 소멸이야. 그러면 너희 인류가 살 길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뿐이다. 우린 대가를 받고 그걸 해줄 뿐이야. 나름의 합리적 거래지.”
“너는 많은 걸 잘못 알고 있어. 과연 소멸하는 게 이 차원뿐일까?”
“글쎄. 여태까진 쭉 그래왔지. 난 결과만 놓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럼 이제 결과가 말해 줄 거야. 그리고 안타깝지만 넌 그 결과를 영원히 보지 못하겠지.”
승현은 그림자에서 탐식을 꺼냈다.
이젠 유일한 도검 무기인 탐식이 그림자에서 나오기 무섭게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커억!”
“켁······.”
원래 중력에 수십 배에 달하는 중력이 사방에 퍼졌다.
그밖에도 마력이 빨리고, 체력이 떨어지며, 오한이 들고, 우울과 무기력에 잠기며······.
수천 가지의 능력이 사방에 펼쳐진 헌터들에게 악영향을 뿌렸다.
그에 반면 승현은 멀쩡히 서서 원의 일원인 가라한을 바라봤다.
사실 이 아우성치는 탐식은 원의 누군가가 들고 있던 검이다.
어째서 기어에 있던 검을 소유했는지는 몰라도 탐식을 든 원은 무적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주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지금 드러났다.
“설마 진품이 나올 줄은 몰랐군.”
“진품?”
승현은 가라한의 말에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당시에 원이 쓰던 탐식은 가품. 즉, 모조품이란 소리였다.
그럼에도 그리 대단한 능력을 보이다니.
“일합에 널 베겠다.”
가라한은 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발도 자세를 취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의 공격일진 몰라도 이 탐식의 수많은 저주와 반대로 축복을 받고 룬을 두른 그를 벨 수 있을까?
승현은 당연히 벨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원의 존재들은 권능 혹은 법칙을 어느 정도 무시한 자들이다.
막말로 회귀 전 링첸처럼 모든 걸 베는 권능이라면 아무리 승현이라도 피를 안 볼 자신이 없었다.
“하압!”
승현은 대검인 탐식을 들고 그대로 돌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어느 시점에서 가라한이 검을 뽑았다.
코아아아아아!!!
탐식과 부딪친 가라한의 검에서 무형의 기운이 폭사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의 여파로 미궁 근처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미궁이란 특수한 설정 때문에 주변 지형이 바뀌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아니었다면 주변도 초토화가 됐을 거다.
승현도 폭발의 반발력으로 뒤로 밀려났다.
적절히 중력을 가해 착지한 승현은 상대의 검을 확인했다.
“보이지 않는 검. 그게 심검이라는 건가?”
“잘 아는군. 검신 대신에 나는 나의 심상을 마력으로 형상화해 휘두르지. 내 심상이 견고할수록 그 힘은 강해진다. 그리고 난 이제부터 널 죽이겠다!”
그의 선언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칼날에서 무지막지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평범한 사람이 노출된다면 그대로 죽을 정도의 농밀한 살기!
승현은 이번 전투가 그리 쉽게 만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저 심검의 길이며 공격 범위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마음의 검이니 가라한의 마음대로일 테다.
승현은 묵직한 느낌의 탐식을 들어올렸다.
‘널 가볍게 해. 단건 정도로.’
‘그러면 타격이 힘들 텐데?’
‘상관없어. 그대로 상대를 베어버린다.’
탐식에게 명령을 내린 승현은 바로 가벼워진 탐식을 들고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이번엔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음이 연이어 터졌다.
“흡! 검을 가볍게 한 건가. 좋은 전략이군.”
“크하압!”
승현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원래 근력으로도 충분히 가볍게 느껴졌지만 무게 자체가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더욱 자유롭게 탐식을 휘두를 수 있었다.
승현은 귀청을 때리는 폭음을 견디며 수 초만에 백여 합을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