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고속재생으로 서서히 뿜어져 나오던 피가 줄어들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서서히 뚫린 어깨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자 랑아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내공에 당하고도 금방 지혈이 되다니. 그보다 몸이 아주 튼튼하군. 마치 철강시를 상대하는 것 같아. 네놈은 혈교에서 육체개조를 받은 무인인가?”
“그쪽과 관련 없다. 그저 내가 후천적으로 만든 몸이고 능력일 뿐이다.”
승현은 딱 잘라 혈교와의 거리를 뒀다.
혈교는 상당히 배척 받는 집단이다.
이름에 혈이 붙은 정도로 피에 미친놈들인데 북서 지방을 지배한 놈들이다.
토속신앙이 변질된 곳으로 그곳의 사는 이들은 다들 혈교를 교리로 믿는 광신도들뿐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 움직임에 방해가 안 될 정도로 치료가 된 승현은 바로 암검 타르샤를 소환했다.
손에서 갑자기 소검 두 자루가 생겨나자 랑아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사술을 쓰는군. 네 녀석, 어깨 위에 걸 때어버려야겠어.”
“이봐, 이건 신병이기라고.”
“그러냐? 하지만 내 눈엔 그저 사술로 보이는군!”
랑아군의 날카로운 반응에 승현은 침음을 삼켜야 했다.
사실 천기자가 이방인을 경계하는 것도 다 사특한 이능 때문이다.
그는 중원이 그런 것에 더럽혀지는 걸 경계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다시 승현의 안으로 파고든 랑아군은 단 1초란 시간에 총 47번이나 승현의 몸을 찍었다.
다행히 한 번 당한 공격이라 대비를 하고 있어서 온몸이 구멍투성이가 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날카로운 강기가 씌워진 손톱에 옷이 넝마가 되고 피부가 찢겨졌다.
찢어진 부위는 상처보다 과한 출혈이 걸렸다.
랑아군의 내공은 마치 강한 흑마법사의 저주처럼 진득하게 상처에 묻어났다.
그리고 상처 회복을 방해하고 그 주변으로 급격히 피가 몰리도록 했다.
단순히 무술이 아닌 하나의 주술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이것이 그저 심법으로 인해 변화한 마력일 뿐이라니. 믿기지 않아.'
승현도 가만히 앉아서 랑아군의 공격을 받진 않았다.
타르샤를 쥔 양손을 기술로 등록된 무극신공의 묘리에 따라 움직였다.
기술은 늘 해당 기술에 맞는 동작과 움직임을 알려주기에 승현의 검술은 퍽 유려하게 이어졌다.
캉, 카캉, 카가강!!
승현의 타르샤와 랑아군의 양손이 부딪치며 쇠뭉치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파편처럼 날카로운 마력들이 형태를 갖추며 사방으로 튀었다.
마력 파편에 부딪친 땅이며 무너진 담벼락에는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는데 한 호흡에 수십 번을 부딪치는 덕분에 랑아군과 승현 근처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
멀리서 보면 이미 피칠갑을 한 승현과 상처 하나 없는 랑아군은 일방적인 비무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을 놓고 보면 호각을 이루며 싸우는 중이었다.
랑아군은 별다른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고 알타의 힘은 랑아군이 낸 상처보다 빠르게 회복을 도왔다.
“놈! 내공이 괴물같이도 많구나! 어디 요괴라도 되느냐?!”
“그러는 넌 왜 지치지 않는 거지?!”
무려 10여분에 달할 동안 공수를 주고받았지만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눈 수만 해도 수천 번이 넘어갔고 둘 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둘 모두 지친 기색이 하나 없었다.
승현에겐 체력을 대신해줄 정도인 알타의 힘이 있었고.
랑아군 고뱅태에겐 내공의 수발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괜히 무협지에서 사흘밤낮을 싸웠다는 묘사가 나오는 게 아니다.
이들에게 마력은 공기만큼 친숙한 것이었고 그것을 타격을 줄 때에만 강맹하게 만들었다가 줄이는 것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숨게 할 수 있는 기교일 뿐이었다.
랑아천문파의 문도들과 랑아군의 제자들은 마력 파편의 영향이 미약한 곳에 모여 합격진을 갖춰두었다.
그걸 확인한 승현은 이미 기호지세임을 깨달았다.
“왜 도망갈 구석이 없어서 초조하느냐?”
“솔직히 당신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어.”
:허! 백대고수에도 못 들 그런 형편없는 사술쟁이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군.“
“정정해주지. 이건 내 힘으로 만들어낸 무구이다. 사술이 아니야.”
“네가 심검의 경지라도 들었다고 말하고 싶나 본데 그건 이 몸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니 감히 입에 담지 마라!”
다시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랑아군이었다.
이번엔 그 기세가 사뭇 달랐다.
정말 한 마리의 늑대가 된 듯 아가리를 쩍 벌린 늑대의 모습이 언뜻 환영처럼 보일 정도로 그 기세가 남달랐다.
“어디 나의 오의인 랑아교혈권을 받아봐라!”
어찌나 빠른지 그의 음성은 그가 승현의 몸을 이미 수차례 때리고 나서야 얼핏 들렸다.
적어도 초음속에 달할 듯싶은 속도로 다가와 어깨로 명치를 찍고는 발을 쓰지 못하게 바짝 붙은 랑아군은 상체와 얼굴을 위주로 날카롭게 세운 손톱을 찍었다.
명치와 턱 등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시작한 승현은 순간 공격할 타이밍을 잃고 랑아군의 흐름에 말렸다.
‘데미지를 최대한······!’
어지러운 타격 속에서 승현은 몸을 띄워 랑아군의 타격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걸 즉시 알아차린 랑아군은 손톱으로 찍고 움켜쥐어 앞으로 당기면서 뒤로 물러나는 걸 최대한 막았다.
15여 초 정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한 승현은 가까스로 그의 흐름을 끊을 타이밍을 잡고 연계기를 끊고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승현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잡았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 승현을 보며 랑아군 고병태는 혀를 찼다.
“몸 하나는 더럽게 튼튼하구나. 그리 피를 흘리고도 버티다니. 네놈 이미 인간이 흘릴 수 있는 피를 다 흘렸다는 걸 자각하고 있긴 하냐?”
“후우, 후. 내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말이지.”
“야, 지금 그냥 물러나면 그 목은 치지 않으마.”
“······?”
랑아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승현은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승현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차였다.
탐식과 전화의 불꽃을 쓰고 룬으로 몸을 보호하며 서포트를 받는다.
그래도 밀린다면 관리자를 호출해 숨겨진 능력을 개방하고 성표로 법칙을 어그러트릴 각오까지 한 상태였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
그런데 상대인 랑아군은 뭔가 김이 빠진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활로가 열렸다는 기쁨보단 무시를 받고 패배했다는 굴욕감과 분노가 가슴에 쌓였다.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랑아군!!”
“어림없어. 너, 분명 내공도 많고 퍽 대단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더군. 하지만 내공을 다루는 기교가 형편없어. 또 그 좋은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지.”
“내 모든 걸 네게 아직 보여주지 않았어!”
“흥! 그러시겠지. 사술을 사용한다면 어쩌면 내가 맥없이 쓰러질 수도. 하지만 그런 건 너에게 진 게 아니야. 네 사술에 진 거지. 과연 그 사술이 온전히 네 힘이라 말할 수 있나?”
“······.”
승현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정화의 불꽃도 탐식도 룬도 그리고 성표의 힘까지 모두 승현 본연의 힘이 아니다.
마신 탈리아스와의 계약으로 정화의 불꽃을 쓰게 되었다.
아직 아우성치는 탐식에겐 아직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룬은 사용자로 등록되어 있을 뿐 관리자는 따로 있다.
성표는 소유한 모든 아이템과 맞바꾼 운의 산물이며 하나의 아이템에 지나지 않다.
저 넷은 모두 승현의 힘으로 이룩한 힘이 아니다.
심지어는 알타의 힘까지도 승현은 알타와의 계약으로 얻은 것.
승현의 진짜 힘은 스스로 깨우친 그림자의 힘과 무극신공이 전부다.
승현은 랑아군의 말에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큼 승현에게 지금 랑아군의 지적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여태까지 무엇을 했는가······.’
승현은 자신의 피로 미끄러운 타르샤를 바라봤다.
창조자를 죽이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리겠다던 그 의지와 다짐은 어디로 가고 타인의 힘에 의존하게 되었나.
“나는, 언제부터······.”
승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승현은 대놓고 무시했던 백걸개와 싸워야 막대한 마력으로 백중지세를 이룰 정도였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나자 자신이 너무나 창피하고 못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크응, 얘들아. 들어가자.”
랑아군은 충격은 받은 승현을 두고 문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파라고는 해도 법도를 모르는 무뢰배는 아니다.
그들은 사도와 패도의 길을 걷는 엄연한 무인이다.
그저 의와 협을 대표하며 정도이자 왕도를 걷는 정파와 뜻이 다를 뿐 두 파는 모두 무림인이었으니까.
문도들이 모두 물러가자 가만히 두 손을 바라보는 승현에게 고병태가 말했다.
“네게 도움을 줄 자라면 아마 오지랖 넓은 신승이나 무성이 있겠군. 둘 다 만나긴 하늘에 별 따기지만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 거다.”
“······.”
“정 못 만난다 싶으면 절정 무인과 비무를 해서 알아서 실력을 키워라. 그럼 내 문파에서 썩 꺼져!”
말을 마친 랑아군은 그대로 내관으로 들어갔다.
그후로 몇 분이나 더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승현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는 안 돼. 모든 걸 완벽히 나의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결코 창조자를 이길 수 없어. 아니, 만나지도 못하겠지.”
깨달음을 얻은 승현의 눈은 분노와 굴욕감 대신 이글거리는 열정과 의지가 자리했다.
넝마가 되다 못해 사라진 상의를 신경 쓰지 않고 급히 들어왔던 게이트로 달렸다.
몇날 며칠을 달려 게이트 앞에 선 승현은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천하제일인. 다음에 이 게이트로 들어올 땐 반드시 그 경지가 되어주마.”
각오를 다진 승현은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지구로 돌아온 승현은 바로 가벼워지는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제약되었던 그림자 권능과 각종 스킬 및 스텟이 다시 개방되었다.
게이트가 있는 곳이 러시아 안이라 한국까지 빠르게 이동하려면 필히 공간이동을 요청해야 했다.
승현은 핸드폰을 꺼내 공간이동 요청을 보내려던 찰나였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내 꼴에 놀라진 않는 건가?”
지금 승현은 전신에 피칠갑을 한 상태였다.
누가 본다면 놀라 까무러칠 그런 모습이지만 알드리안은 그저 나직이 웃었다.
“나는 자네가 조금 더 늦게 돌아올 줄 알았네. 왜냐하면 내가 봐왔던 최승현은 늘 겸양과 신중함을 가지고 있었거든. 마치 거북이 같이 말이야.”
“부끄럽네. 나는 사실 성질 급한 닭에 불과했나 봐.”
“아니야. 내가 본 자네의 본질은 분명 그랬어. 그렇지만 증명의 장이란 곳에 간 이후로 많이 조급함을 보이더군. 그 절정이 바로 드래곤 레이드 때였을 거야.”
알드리안은 심해처럼 깊은 눈으로 승현을 바라봤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승현은 그만 고개를 돌렸다.
“조급함을 버리게. 그리고 원래의 자네로 돌아오게. 겸양과 신중함을 갖춘, 원래의 자네로.”
“······.”
“아, 그래도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그대로 간직하게. 너무 신중하면 늘 때를 놓치고 말거든. 그럼 돌아가세.”
조언을 마친 알드리안은 마법을 이용해 승현의 몸의 피를 씻겨내곤 손을 내밀었다.
승현은 깊이 생각에 잠기며 그런 알드리안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