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승현이 자리에서 멈춘 건 순전히 느껴지는 마력이 대략 초절정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초일류를 넘어서 절정에 도달하면 다시 세 단계를 거쳐 초절정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런 초절정도 해와 달을 비유하여 일경과 월경이란 경계를 또 나누는데 자신을 불러 세운 이는 초경의 경지에 입문할 수 있는 초절정 월경에 해당했다.
즉, 백대고수 말석에 드는 인물이 자신을 불러 세운 거다.
“백걸개?”
“허허허, 이미 날 알고 있군. 반갑네. 소협.”
거지 치곤 여기저기 기우고 해지긴 했지만 백색에 가까운 옷을 입은 노인이 가볍게 포권을 해보였다.
“개방에서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개방을 대표해서 온 건 아니네. 그저 개인적인 흥미가 있어 소협을 불러 세운 것일 뿐.”
“그런가. 개인적인 흥미에 놀아줄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서 말이야.”
승현이 무심히 말을 하곤 다시 뒤를 돌자 백걸개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말석이라곤 해도 백대고수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자신이었다.
연배도 있고 배분도 높아 후학이나 후배들에겐 존경을 받기까지 하는 그를 무슨 목석을 보듯 보며 무시하다니.“허허허! 이거 한 방 먹었군. 기다리게, 소협. 우리 거래를 하지 않겠나?”
“그쪽에서 내게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이래봬도 호고성 개방 분타주라네. 개방의 장로이기도 하지.”
“흠, 좋아. 당신이 얻을 건?”
“둘 다 정보를 교환하지. 대신 본인이 먼저 질문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시오. 나의 뭐가 궁금하지?”
“소협의 생김새는 분명 중원과 비슷하지만 다르지. 그리고 중원 전체에 펼쳐진 어떤 진은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버젓이 있지. 어찌한 건가?”
“천기자가 이방인에 대해 예언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군. 자넨 이방인이었군. 그러면 설명이 되지.”
백걸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인인 천기자의 이방인에 대한 예언은 분명 몇 년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심지어 상당한 색목인들이 목격되기도 했고 그들이 사특하거나 기이한 술법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것도 알려졌다.
하지만 그 술법만 한 번 피하면 일류 무인이라도 가볍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무력은 형편없다고 한다.
백걸개도 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남자에게선 어떤 빈틈도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미약한 내공조차도 느껴지지 않으니 이 어찌나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심각하게 승현을 바라보는 백걸개였다.
승현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던지 상관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중원 최강은 누구지?”
흠칫.
“그거야 당연히 천외천의 이들 아니겠나. 그들이야말로 인세를 초월해 선계에서 노니는 이들이니 말이야.”
“그런 두루뭉술한 대답을 원한 게 아니야. 백걸개가 생각하는 최강자를 말하는 거다.”
“흐음, 내가 생각하는 최강이라. 어렵구만 어려워.”
백걸개는 승현의 물음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천외천이라 불리는 이들은 알려지기로 다섯 명이 있다.
소림을 수호한다는 신승, 무당을 굽어 살핀다는 천외선인, 천기를 읽는다는 천기자, 혈교의 선대 교주이며 생존이 명확하지 않은 선대 혈교주인 혈마라, 황궁을 지키는 대장군까지.
현재까진 이 다섯이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만 개방의 장로인 백걸개는 여기서 세 명을 더 알고 있다.
외세인 북해빙궁의 전대 궁주인 빙백냉마와 요즘 세력을 불린다는 외세의 교주인 천마교주, 가장 최근에 생사경에 올랐다 전해지는 패왕궁의 패도천성까지.
그 누구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백걸개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자 승현은 질문을 바꿨다.
“질문이 어려우면 가장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인물은 누가 있나?”
“당연히 온화하다는 천기자이지만 천기자는 이방인을 경계하니 신승님이 가장 대화가 잘 통할 거네. 활불이라고도 불리시니 말이야.”
“신승은 소림을 수호해서 이동할 수 없지 않나. 거동을 할 수 있는 자 중에서.”
“끄응, 천외천의 이들은 다들 자신들만의 세력이 있네. 그나마 소속이 없는 게 천기자인데 그는 자넬 만나면 공격부터 할 걸세.”
“후, 그런가. 역시 어렵군.”
“충분히 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내가 질문하지.”
백걸개는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방인이 중원에 오는 이유는 다양하다고 하지. 천기자는 20가지 이유가 있으며 어느 입구를 통해 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네. 그럼 자네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 질문엔 답이 두 개가 있다. 무엇을 원하지?”
“이왕이면 둘 다 듣고 싶네.”
백걸개의 당연한 대답에 승현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쉽게도 난 하나의 질문만 남아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듣고 싶네.”
“역시 그건가. 네게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난 천외천을 포섭하고자 이곳에 왔다.”
“······이방인인 자네가 어째서?”
“질문은 내 차례. 그리고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아. 현재 파악된 천외천은 총 몇 명이며 별호가 무엇이지?”
“후우, 익히 알려진 사인을 제외하면 개방이 파악한 건 셋이네. 북해빙궁의 전대 궁주와 외세교인 마교의 교주 그리고 최근 소식이 전해진 패왕궁의 숨은 패인 패도천성이네.”
“잘 들었다. 그럼 헤어질 시간이군.”
승현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 승현을 보며 백걸개를 나직이 혀를 찼다.
“강함을 안다고 해도 저리 오만하게 굴다간 큰코다칠 텐데 말이야. 어쩌면 저 오만으로 인해 파멸하는 게 중원의 평화가 될 수도 있겠어. 부디 한 번의 파문으로 그치길.”
백걸개와 정보를 거래한 승현은 호고성으로 향했다.
과연 성이란 명칭이 붙은 만큼 백채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대했다.
높고 웅장한 성벽 너머로 팔 층짜리 전각들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고풍스러운 문양이 들어간 성문과 기와들은 품위를 더했다.
남쪽 변두리에서 출발한 승현인지라 중원의 기준인 강남에서도 남부 부근의 성도에 도착한 거다.
수도인 중경에는 자금성과 같은 황금색 궁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성세는 중국 북경의 자금성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하다고 한다.
일 년에 딱 한 번 외부에 개방을 하는데 당시 입장한 헌터들의 말로는 말도 안 되는 진법이 펼쳐져 있어 절대 마력 운용이 안 된다고 한다.
그건 무공 쪽도 마찬가지라는데 경지가 고강한 자신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다.
승현의 현재 목표는 실력 향상과 무극신공의 완전한 깨달음과 통제가 첫 목표였다.
그를 위해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황궁에서 펼쳐지는 천하제일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 대회는 천외천과 2성 5제 7왕 12군을 제외한 백대고수 대부부분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는 진짜배기 비무 대회다.
‘그 전에 호고성에 있는 랑아군 고병태와 결투를 벌인다.’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12군인데 호고성은 랑아군이란 별호를 가진 고병태가 있다.
그는 조권의 대가로 그의 손톱은 늑대의 이빨과 같다 하여 랑아군이라 불린다.
고병태의 조권에 한 번 당하면 타격 부위의 살점이 뭉텅이로 썰려가 그와 비무를 나눈 이들 중 십중팔구는 사망한다고 한다.
당연히 사파인이고 때문에 호고성에서 정파의 힘이 약하다.
사실 12군 중 9명이 사파인이라 중원 외곽은 거의 사파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랑아군의 경지는 초경 중반 정도라 평이 지배적이다. 적당한 상대가 되겠어.”
하오문에서 받은 책자 중 랑아군에 대한 정보가 적힌 부분을 확인한 후 덮은 승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은 어느 정도 성취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승현의 전투 스타일은 막싸움에 가깝다.
특히 무극신공으로 모든 무공이 통합되면서 그냥 걸어도 보법이 되었고 그냥 휘둘러도 검법이 되던 터라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하지만 무극심법과 검법 창시에 핵심적이던 전승인은 천 레벨에 달하는 헌터와 견주어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스킬이 아닌 체득으로 무공을 익혔고 그 오의를 제대로 깨달은 인물이다.
그가 말하길 헌터들의 움직임은 빠르기만 해서 예측하기 너무나 쉽다고 한다.
하물며 무극 시리즈와 각종 무공을 익힌 전사조차도 레벨이 낮으면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었으니 그의 장담은 옳은 말이다.
“초일류를 넘을 때부터 각 경지는 작은 차이임에도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고 하니 초경 중반인 랑아군 정도는 상대가 가능하겠지.”
승현은 과일장수에게서 사과와 비슷한 과일을 사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상큼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호고성 거리를 거닐던 승현은 랑아군의 문파인 랑아천문파의 외진 담벼락에 기대고는 기세를 피우기 시작했다.
서서히 승현의 진득한 마력이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랑아천문파의 외관에 있던 모든 하인들의 숨이 거칠어지며 과호흡을 시작했다.
무인들조차 강대한 마력이 짓눌리며 신음을 터트렸다.
서서히 범위를 넓히던 승현의 마력이 어느 순간 빠르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치 역으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승현의 마력을 빠르게 밀어내며 강한 마력원이 승현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
콰아아앙!!!
승현이 기대고 있던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지며 승현의 심장이 있는 부위로 랑아군의 손톱이 세워진 팔이 파고들었다.
승현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먹던 사과를 흉살악귀처럼 일그러진 랑아군에게 던졌다.
그에 랑아군은 흠칫 놀라며 사과를 피했는데 총알처럼 날아간 사과가 외관 돌바닥에 부딪치며 바닥을 깊게 파이게 하자 어이없다는 듯 승현을 바라봤다.
“어떤 미친놈이 이 랑아군에게 행패를 부리나 했더니 낯짝이 어린놈이군.”
“이봐, 내가 반로환동 같은 걸 했을 경우는 안 치는 건가?”
“반로환동의 고수면 그딴 허접한 기세를 피우지 않아. 너무 성겨서 절정 고수만 되어도 파훼할 수 있겠더군.”
무공이 경지에 들면 젊어진다더니 확실히 50대 후반인 랑아군은 30대 초반의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투박하게 생겨 조금만 인상을 지어도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잠시지만 순간 기척을 놓쳤었다.’
승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승현은 증명의 장에서 만났던 7인의 전사를 생각했었다.
그들 또한 정교한 기교를 가지고 있었고 또 자신들의 길을 개척한 위대한 전사였다.
하지만 기교나 마력 컨트롤을 따지면 이곳 중원 게이트의 무인을 따라올 수 없었다.
아마 마족이나 드래곤이 아니면 이들의 정교한 컨트롤을 따라올 이들은 별로 없을 거다.
그걸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승현이지만 방금 전 공격 때 두꺼운 담벼락이 없었다면 그대로 가슴이 뚫렸을 거다.
“비무를 청한다. 랑아군.”
“이거 단단히 미친 왈패였군, 줄기줄기 내공을 흘려보내는 내공만 높은 놈이 내게 비무라니 우습군. 좋다,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지! 비무를 받아주마!”
말을 마친 랑아군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승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승현은 분명 그의 동작이 한 수 정도 느리게 보임에도 그가 파고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랑아군의 잘 정돈된 손톱에 절정고수부터 할 수 있다는 기교인 강기를 씌워 어깨를 때렸다.
푹, 푸욱!
순간 짧게 박힌 랑아군의 손톱은 성표로 높아진 물리력 저항과 마력 저항 덕분에 살점을 앗아가진 못했다.
대신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인해 근육에 무리가 가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저 흘러내려야 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당황한 승현은 빠르게 중단전에 있던 알타의 힘을 돌려 고속재생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