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승현은 골목을 걷는 내내 길안내를 맡은 하오문도의 노골적인 유혹을 받아야 했다.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이 썩 마음을 녹였지만 승현은 꿋꿋이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길을 걸었다.
여인은 자신의 몸을 통한 유혹보단 뛰어난 언변으로 승현을 공략했다.
그렇지만 승현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그 수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여러 범죄자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결성된 단체가 하오문인 만큼 눈치 또한 빨랐다.
혹여나 이런 유혹을 싫어하는 부류를 위해 빠르게 정중한 태도를 하는 하오문도였다.
꽤 빙빙 돌고 돈 끝에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다.
‘진법인가. 이게 또 아주 골치 아픈 기술이지.’
승현은 여태까지 돌아다녀도 발견할 수 없던 하오문 입구를 보며 생각했다.
진법 같은 술법은 직접적인 마법과 달리 모두 간접적으로 작용해서 대처가 아주 까다롭다.
막대한 내공으로 조율된 마력의 흐름을 깨트리거나 진법의 축을 무너트려야 작동이 멈춘다.
그건 여타 술법도 마찬가지라 아주 귀찮았다.
“자, 여기입니다.”
“안내비다.”
승현은 창고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던져주고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승현은 창고 안에 있는 아이템을 분류했다.
창고 안에 있는 아이템은 대부분 잡템이었는데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승현이 쓸 것들은 거의 없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넘쳐나는 금화와.
“무언가의 결정.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
어느 설산 게이트에서 만난 얼음 그 자체였던 여인인 도화.
그녀가 하늘로 승천하고 남긴 하나의 아이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자 그림자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물건.
과연 이것이 어디에 쓰일 지는 승현도 잘 모른다.
다만 아이템에 쓰인 설명대로 신중을 기해야 할 거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찾으시는 정보가 있으신지요?”
“현 중원의 세력과 백대 고수 명단. 그리고 현 정세를 세세히 담은 하오문의 보고서.”
“으음, 요즘 정세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
“내가 원하는 정보를 구하면 날 찾아오도록. 나는 현 안에 있는 객잔에 머무를 테니.”
“대협. 모든 정보에 대한 값이 상당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승현은 대답 대신 창고에서 수천 개의 금화를 꺼냈다.
촤르르.
탁자에 쏟아지는 금화에 하오문의 분타주는 입을 벌렸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금화의 비에 너무 놀라 입이 절로 벌어진 거다.
“정확히 천 금화. 순수한 금이니 선금은 될 거다. 정보가 만족스러우면 추가 금액을 지불하지.”
“예, 그렇군요. 혹여 이방인이십니까?”
“그렇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
말을 마친 승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하오문의 진법은 들어올 때에만 적용되는지 나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골목에서 나온 승현은 기세를 갈무리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백채현은 현 단위의 마을이다 보니 확실히 시장 등이 컸다.
돈은 넘쳐나게 있는 승현인지라 여유롭게 쇼핑을 즐겼다.
드워프가 만들었을 법한 정교한 장식품이라거나 신기한 과일 등 별 능력은 없으나 눈요기가 되는 것들을 샀다.
특히 큰 포목점에 들렀을 땐 유명한 장인에게 무복을 맞추기도 했다.
수를 놓아 문양을 내기로 해서 삼일 뒤에 찾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시장을 둘러보고 난 후 승현은 가장 큰 객잔에 특실을 잡았다.
현대 과학으로 만들어진 고급 침대보단 못하지만 상당히 푹신한 침대가 있는 객실에서 먹고 자며 쉬던 승현은 멋들어진 무복을 맞추고 며칠이 지나서야 하오문도와 마주할 수 있었다.
“따로 종이에 적어오진 않았군.”
“저희 하오문은 정보를 팔 때 절대 서류로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도 좋은 수지. 그래, 내가 원한 정보를 말해 봐.”
하오문도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세세한 것까지 승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파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파의 삼파와 육대 세가부터.
혈교의 수상쩍은 움직임과 백대 고수 중 하위권 고수들의 의문사 및 실종 사건까지.
“현 정세는 말 그대로 횃불 앞에 놓인 짚단과 같습니다. 조금만 불똥이 튀면 활활 타오를 형세입니다. 때문에 하오문은 정보를 차단하고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 중입니다.”
“그런 것치곤 내게 정보를 파는군.”
“이 부분은 문주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오문주의 지시?”
“예. 아마 암왕 대협이 짚단에 튈 불똥이라고 하시며 이걸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승현은 하오문도가 건네는 책자를 받아 안에 내용물을 살폈다.
백대 고수의 신상과 용모파기가 들어 있었는데 그밖에도 천외천이라 불리는 절대고수들의 용모와 대략적인 활동 범위도 적혀 있었다.
‘제대로 판을 깔아준다는 건가.’
책자를 쭉 살핀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승현의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중원 게이트는 특급 중에서도 특별한 곳.
회귀 전 알려진 생사경의 고수만 해도 여섯이나 되던 괴물이 득실거리는 용담호혈과 같은 곳이다.
그런 괴물들은 룬을 온전히 사용해야 상대가 가능할 거다.
‘추정되기론 막 너머에 있는 자들까지 합해 열 명이 넘는 생사경의 고수가 있다고 했지.’
그런 승천한 용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건 순전히 천기자가 끝도 없이 돌아다니며 게이트를 파괴해서다.
만약 천기자나 그에 준하는 이들이 지구로 넘어왔다면.
‘전황이 뒤흔들렸겠지. 그들이라면 드래곤과도 일대일로 싸워서 승리를 거머쥐었겠지.’
실제로 몇 년이 더 흘러 링첸이나 게일과 같은 랭킹 5위권에 들던 이들은 혼자서도 레이드 몬스터를 썰어버리는 위용을 자랑했다.
그런 실력자가 이 중원 게이트에서만 열이 넘어간다니.
‘흐음, 몸을 적당히 사려가며 움직여야겠어.’
마음에 안 들지만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강자라면 잠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 현명하다.
“잘 들었다. 그럼 잔금을 치르도록 하지.”
승현은 이번에도 다량의 금화를 쏟아냈다.
알찬 정보를 준 대가로 오천 금화나 되는 돈을 지불했지만 창고에 표시된 금화의 첫자리 숫자는 변동이 없었다.
무게만 해도 10킬로그램이 넘어가는 금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자 정보원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정보원이 물러간 후 승현은 그림자에 선물 받은 책을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승현은 까맣게 잊고 있던 임무 보상이 떠올랐다.
조커를 데리러 올 때 얻은 임무 보상인데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곳인 만큼 아마 전설적인 등급의 아이템일 확률이 높다.
특급 게이트는 임무를 완수하면 무조건 전설적인 등급의 아이템을 준다.
그보다 하위인 최상급 게이트도 높은 확률로 전설적인 등급을 주지만 간혹 유일함 등급을 주기도 한다.
상자 같은 걸 얻었던 걸 기억해낸 승현은 그림자에서 예의 상자를 꺼냈다.
아슬아슬하게 꺼낼 수 있는 크기에 맞아서 무사히 보상 상자를 꺼낸 승현은 상자를 살폈다.
“이거 따로 오픈 버튼이 없는데? 무슨 아이템이지?”
승현은 몇 없는 허용된 기술 중 하나인 감정 기술을 사용했다.
[아이템]
아이템 합성기
-등급: 불가해
-아이템을 재료로 사용하여 새로운 아이템을 합성합니다. 최대 전설적인 등급까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각 아이템의 특성을 조합합니다. 한 번 사용하면 합성기는 소멸합니다.
-사용자의 상황에 맞춘 아이템이 나오나 원하는 모형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단, 상극의 특성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한 가지만 적용됩니다.
상당히 놀라운 아이템이 나와 버렸다.
승현은 두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설명을 읽었다.
“확실히 내게 필요한 아이템이긴 한데······.”
승현에게는 기어 당시 얻었던 많은 아이템이 존재한다.
그중 전설적인 등급의 아이템은 5개가 넘어간다.
그밖에도 유일함 등급이나 특별함 등급까지 합친다면 수십 개에 달하는 아이템이 있다.
그러나 알타와 이어지고 무극신공을 얻고 룬을 주력으로 쓰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특성과 위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무극신공의 내공과 알타의 힘을 받은 육체로 때리는 주먹이 더욱 강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템만 있으면 아우성치는 탐식이나 꺼지지 않는 마의 불꽃과 같은 주력 무기를 얻을 수 있다.
“한 번 시도해볼까.”
승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템 합성기를 바라봤다.
무려 불가해 등급을 받은 만큼 그 가치를 톡톡하게 해낼 거다.
나중에 동료들에게 맞는 아이템을 주려고 했던 승현이었는데 게일과 링첸 등 믿었던 이들이 이미 원과 창조자의 편에 선 걸 알게 되곤 그 생각을 접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승현은 바로 결심했다.
“합치자.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이 나올지 한 번 보자고.”
승현은 그림자에 보관 중이거나 창고에 쌓아둔 아이템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늘의 방패 기어스, 빛을 쏘는 활 헤이리아, 악마를 꿰뚫는 창, 심판하는 자 팔콘, 마탄의 사수.
다섯 개의 전설적인 등급의 무구가 그림자에서 나왔다.
이쯤 되니 행성 파괴 때 썼던 마력을 먹는 팔찌도 아까웠다.
“쩝, 내 힘으로 파괴해버릴 걸 그랬네. 조금만 과하게 힘을 썼다면 충분히 행성 자체 분열을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토로한 승현은 다음으로 선인 호리병도 꺼냈다.
능력치를 올려주고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키는 지금도 꾸준히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이건 넣지 말자.”
소모형 아이템이라 아마 다른 것들과 절대 어울리지 못할 거다.
그러면 괜히 아까운 특성만 날아가는 꼴이니 재료에 포함시키는 짓은 안 했다.
그 다음으로 승현은 각종 유일함 등급의 아이템을 꺼냈다.
검이나 도는 모두 탐식의 먹이가 되었지만 그밖에 것들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기어 당시 방칼 대전에서 얻은 것 중 유일함이나 특별한 등급 중에서 용도가 썩 괜찮은 건 따로 창고에 보관을 해뒀다.
이 역시 뛰어난 실력의 헌터에게 줄 요량이었지만 혼자 다 해먹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는 아이템을 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소혜와 다연이 그리고 지원이는 잘 지내려나.”
대재앙 이후 자신이 한국에 뿌린 씨앗.
아마 그들도 드래곤 레이드 당시 소환되었을 거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죽었을 수 있다.
셋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전투 중 사망했다면 어쩔 수 없다.
“나중에 한 번 알아봐야겠어.”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파티를 결성해 돌아다녔으니 살아만 있다면 아마도 고레벨 헌터가 됐을 거다.
상념을 지운 승현은 마저 아이템을 꺼냈다.
총 31개의 유일함 등급 아이템이 나왔다.
다음으로 특별함과 희귀함 중 능력이 독특해 남겨둔 것들을 꺼냈다.
그들 중 발군은 역시 시작의 팔찌와 시작의 목걸이였다.
둘 다 모든 디버프 해제와 치명상 방어가 달린 밸런스 붕괴 혹은 GM템이라 불릴 사기적인 능력의 아이템이었다.
물론 이 아이템이 특별한 등급이기에 법칙을 깬 공격은 막을 수 없을 거다.
이 아이템 또한 결국은 법칙을 적용받아 탄생한 것이니 말이다.
“내구도가 별로 없긴 하지만 재료로는 쓸 수 있지.”
그밖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능력의 아이템 57종이 나왔다.
총 93개의 아이템이 객잔 특실 바닥에 쫙 깔렸다.
승현은 마력을 일으켜 아이템 합성기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상자 위가 열리며 시꺼먼 공간이 나타났다.
승현은 그 안으로 아이템을 하나씩 넣었다.
종종 특성을 선택하라는 알람이 떠올랐는데 상극의 특성이 있나 보다.
그도 그럴 게 빛을 쏘는 활 헤이리아는 신성 계열 특성인데 유일함 등급의 마귀의 갈퀴란 아이템은 악마 계열 특성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설정을 하며 아이템을 넣을 때마다 마력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과연 무슨 아이템이 나올지 승현도 알 수 없었다.
워낙 많은 특성이 있어 무구로 나오거나 소모성 아이템으로 나올 수도 있다.
전혀 감도 안 잡히는 완성품을 떠올리며 승현은 오랜만에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