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룬에 걸린 락을 풀어낸 조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제 저걸 다시 불러들여. 그럼 사용자 자격을 얻게 될 거야.”
“사용자? 관리자나 마스터가 아닌?”
“흐음, 말해줄까나?”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글쎄? 다음 건 우리의 약속이 이행되고 난 후에 말해줄게.”
“후우, 좋아. 그럼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이 행성을 쳐부수고 지구로 가자.”
“그런데 어떻게 부술 생각?”
“이걸 이용할 거야.”
승현은 실로 오랜만에 팔찌 하나를 그림자에서 꺼냈다.
룬이 자신의 내부 마력을 갈취한다면 이건 외부 마력을 갈취하는 원인이다.
바로 ‘마력을 먹는 팔찌’가 그 주인공이다.
이젠 최상급 마력석 수백 개에 달하는 마력을 품고 있는 괴물이 되었다.
이 팔찌의 마력을 개방하는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벌어질 거다.
그걸 조금 더 조작하면 말 그대로 행성계 전체를 뒤덮을 위력.
이 행성이 아무리 커도 이 팔찌 해방이면 끝이다.
“여기다 이걸 개방하고 도망칠 거야.”“그거 느껴지는 에너지 수치가 굉장한데? 태양의 수천 배는 되는 것 같아.”
“그래. 이런 걸 여기서 터트리면 모르긴 몰라도 대기권 밖에 있는 마더 브레인까지 깔끔하게 날려버릴 거야.”
“그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쉽네.”
“시스템 상으로 보상을 받지 않으면 게이트는 영구적으로 열려 있어. 파괴된 이후에 확인을 해도 늦지 않아.”
“그럼 수습하고 바로 시작하자!”
고개를 끄덕인 승현은 룬에게 의지를 보냈다.
-사용자 최승현. 인식 완료. 임시 마스터 설정. 환영합니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승현은 확실히 룬이 깨어났음을 인지했다.
-사용자의 성향 분석. 열에너지 계열, 비물질 계열 감지. 정신 및 에너지 계열 감지. 코드를 부여합니다.
룬은 그대로 승현의 전신에 씌워졌다.
그냥 전신에 씌워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얇음 막으로 모든 곳이 덮어졌다.
마치 입술에 립밤을 바른 그런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이내 사라졌다.
-적립된 마력을 측정합니다. 92,700%.
-조건을 초과 달성하였으므로 모든 기능이 오픈됩니다. 미공개 기능은 관리자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순식간에 룬의 성능과 기능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역시 불가해 등급이라 이건가. 능력이 미쳐 날뛰는군.’
한 번 혀를 내두른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룬에 자신을 등록한 후 마력을 먹는 팔찌를 개방했다.
그리고 그걸 그림자로 잔뜩 감싸며 최대한 폭발을 지연했다.
“간다!”
그 즉시 천장을 부수며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몇 초가 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림자로 봉인한 마력을 버틸 수가 없었다.
“내 목에 팔을 잘 두르고 있으라고. 한 방에 갈 테니까.”
승현은 저 멀리 대기권 쪽에 있는 게이트 입구를 확인하고 그대로 점프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도착할 수 없기 때문에 몇몇 기술을 응용해 허공을 밟으며 높이, 더 높이 뛰었다.
그렇게 총알같이 날아간 승현은 그대로 게이트 안을 통과했다.
다행히도 천 레벨이 넘어가는 마력을 가진 조커는 반발력을 얻으면서도 무사히 통과했다.
두 사람이 팔찌의 봉인을 풀고 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 4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통과한 순간 주인을 잃은 그림자가 물리력을 상실하면서 모였던 마력이 방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땅을 뒤덮었다.
모든 문명의 흔적이 지워졌다.
바다가 증발했다.
생명에 필요조건이 모두 소실되었다.
우주로 피신했던 마더 브레인의 우주선들이 모조리 폭발에 휘말려 터졌다.
행성 전체를 감싼 막은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음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는 동안 안에선 팔찌를 제외한 모든 게 분자, 원자 단위로 쪼개졌다.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서로의 반응이 강렬해졌고 온도가 상승했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영화지옥이 될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것이 마력과 원자들은 손쉽게 막을 통과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마력을 토한 팔찌는 그대로 압력과 열을 버티지 못하고 분해되었다.
마력 방출이 끝나자 공간은 빠르게 식었다.
잠시 게이트 밖에서 기다리던 승현과 이리저리 폐쇄된 연구실을 살피다가 혀를 차는 조커였다.
“이런 구닥다리 시설로 잘도 살고 있었군.”
“나름 첨단을 달리던 곳이었어.”
“알게 뭐야.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네. 내 팔자야.”
“네 팔자는 내 알바가 아니야. 넌 이제 인류를 위해 원과 싸우는 요원이 되었다. 소속은 대한민국이고 네가 할 일은 후방 지원 및 정보 파악이다.”
“이거 아주 고약한 보스를 두게 되었네. 네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자리는 제대로 만들어 줄 거지?”
너스레를 떠는 조커를 보며 승현은 픽하니 웃었다.
“너와 비슷한 인물이 있는데 그는 이미 지구에서 최고의 인기인이자 권력자야.”
“오우, 나도 그럼 왕이라도 될 수 있는 건가?”
“딱히 말리진 않지.”
“농담도 안 받아주는 팍팍한 상사라니. 하아.”
고개를 저은 조커는 게이트로 향하는 승현을 따라 걸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아직 열기가 남은 우주 공간이 펼쳐졌다.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떠오르는 알람에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든 마더 브레인이 처리가 되었나 보다.
“그냥 싹 사라졌네.”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지.”
“맞아. 그래도 이 정도로 흔적도 없을 줄은 몰랐어.”
“자, 그럼 다시 나가자. 이제 이 게이트를 닫을 차례야.”
승현은 보상 상자를 그림자에 넣고 조커를 먼저 내보냈다.
따라서 승현이 나오자 바로 게이트가 사라졌다.
“맞다. 보스한테 스마트 워치가 있지?”
“그 시계 닮은 거 이름이 그거야?”
“응. 그걸 내게 주겠어, 보스?”
승현은 그림자에서 일전에 받은 시계를 주었다.
그걸 건네받은 조커는 잠시 시계를 손에 쥐었다가 펼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마트 워치가 사라지는 마술이 벌어졌다.
“뭘 한 거지?”
“나노 로봇으로 교체했어. 즉석에서 한 거라 성능은 별로인데 나름 쓸 만은 해. 자, 이제 나의 새로운 고향으로 가자!”
“잠시만 이제 다시 룬에 대한 이야길 해야지.”
“빼놓질 않네. 알았어. 말해줄게.”
조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는데.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락을 풀던 중 어딘가의 관리자와 채팅을 했다고 한다.
관리자는 본인이 착용하는지 아니면 부탁이나 명령을 받은 건지를 물었다.
조커는 거래를 통한 대가라 말하자 관리자는 웃었다고 한다.
그 후 충분한 마력이 있으니 언제든 막히는 문제가 있으면 관리자를 호출할 것을 알리고 이제부터 정기 업데이트와 임시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게 끝?”
“응. 관리자가 아주 친절하더라고. 느껴지는 바론 범 우주적 존재가 아닐까.”
“그런 관리자를 호출한다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군.”
“그야 나도 모르지. 이젠 다 말해줬으니 출발, 출발!”
활달하게 외치는 조커에 승현이 공간이동을 조작하려고 할 때였다.
“이거야, 아주 씩씩한 아가씨를 동료로 데려왔군.”
“응? 꼬마는 누구니?”
“꼬마는 아니지만 행색이 이러하니 넘어가겠네. 알드리안 페더 드릭시오. 죽음을 극복한 위대한 마법사이지.”
“마법? 그 판타지의 마법인가?”
“그러하네. 자연을 다루고 섭리를 깨부수는 존재들이지.”
“휘익, 화끈하네. 그럼 공간이동 부탁해!”
“허허, 피곤한 아가씨가 되겠어. 승현, 바로 다음 장소로 가겠나?”
“그래야지. 여기 조커는 알드리안이 잘 맡아줘.”
“내가 잘 처리하겠네. 그럼 다음은 자네를 대신할 무력을 맡을 자가 있는 곳이네. 흔히들 무협지라고 하던가? 바로 앞으로 보내주지.”
“부탁해.”
알드리안과 말을 나눈 승현은 그대로 게이트 앞으로 전송되었다.
둘이 남게 된 알드리안과 조커는 서로를 멀뚱히 보다가 이내 한국으로 이동했다.
조커는 생각보다 수준 낮은 풍경에 실망과 흥미를 느꼈고 알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래도 그녀의 행동이 모두 민폐냐면 그건 아니다.
한국 행정부 컴퓨터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버리는가 하면 새로운 물질을 마구 발표하고 제조법까지 만들었다.
또 알드리안의 돈을 자본으로 삼아 회사를 차리고 그런 것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곳에만 있는 연금술과 마력석 그리고 마법까지 접목하여 최첨단 마도공학 전투 병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놀라 뒤집어질 행보를 불과 이주 사이에 속전속결로 처리해버렸다.
이걸 수습하고 옹호하는 게 다 알드리안의 몫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지구는 유래 없는 문명의 혁명을 겪기 시작했다.
한편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승현은 강제적으로 많은 힘들이 억눌리는 걸 느꼈다.
“과연 차원신이 직접 관여한다더니 이런 거였나.”
승현의 그림자는 법칙을 어긴 것이고 불의 힘은 신수와의 계약으로 얻은 거다.
그러나 그 둘 모두 강한 무언가에 의해 크게 억제되고 있었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림자에 작은 물건을 넣고 빼거나 그림자 검인 타르샤를 소환하는 것 정도였다.
알타의 힘은 형태가 변형되어 중단전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라면 전신에 퍼져야 할 게 하단전에 자리한 무극신공처럼 단전으로 이동한 거다.
그밖에도 거의 대부분의 기술이 잠겼고 직접 사용하는 것도 막혔다.
가장 잘 애용하는 물체 고정도 여기선 할 수 없다.
“아니, 마력을 이용하면 흉내는 낼 수 있겠어.”
잠시 암검, 타르샤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본 승현은 바로 임무를 확인했다.
[임무 : 천하제일
-천하제일인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세요. 단, 한 번만 게이트를 오갈 수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임무가 아주 괴상하단 말이지.”
이미 한 번 들어갔던 이들에게서 이곳의 정보를 확인하였다.
이곳은 중원 무림이며 아시아대륙의 두 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무림방파와 고수들이 모래알처럼 즐비하며 크게는 백도와 흑도가 작게는 정파와 사파, 혈교가 삼파전을 벌이는 중이다.
천하제일이라 논해지는 이들은 모두 천외천의 실력을 갖췄는데 추정 레벨만 2,000에 달한다고 하니 이 게이트의 난이도가 얼마나 어려울지 감이 오겠는가?
“특별히 특급으로 정해진 곳이기도 하고. 여기서 나온 무공과 전승인들의 무공 그리고 과학이 합쳐져 만들어진 게 바로 무극 시리즈 기술이지.”
전승인들은 지구에서 미약한 마력을 수련하던 이들이다.
그들이 마력이 충만해지면서 빠르게 헌터 못지않은 성장을 보였다.
지금도 쉽게 인터넷을 켜면 그들의 도장이나 위치를 알 수 있을 거다.
많은 전승인들이 아시아에 분포해 있어 아시아권 헌터들에겐 빠르게 무극심법이 보급되기도 했다.
뚜둑, 뚝.
“어디 그럼 천하제일이란 걸 해보러 갈까.”
“거기, 이상한 옷을 입은 놈! 멈춰라.”
“······?”
“우하하! 우리 강남녹림십팔채의 행보에 거슬리다니. 운도 없구나. 얼른 목을 내밀고······.”
서걱.
“······!!”
“무슨 일이?!”
순간 연신 입을 털던 털보 사내의 목이 잘려나갔다.
승현은 결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지만 녹림 채원의 목이 달아났다.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아무것도. 그저 살기를 비췄기에.”
“오만하군!”
승현의 말에 다른 채원들이 술렁이며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서걱, 서걱, 서걱!
극히 찰나에 순간 녹림십팔채 중 서열 7위인 적랑채의 채원 200명의 목과 사지가 깔끔하게 절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