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승현은 저 멀리서 불타고 있는 폐허를 바라봤다.
하나의 마더 브레인과의 전투는 상당히 거칠었다.
승현은 이번 전투에서 오랜만에 탐식을 꺼내들었다.
수많은 검을 먹어치운 탐식의 힘은 대단했다.
승현의 격이 상승하면서 탐식은 더 많은 힘을 보여주었는데 이젠 찰나지만 공간을 일그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중력을 사용했다.
그밖에도 수백 개가 넘는 버프와 그에 버금가는 디버프를 전력으로 쓸 수 있으면서 800레벨에서 900레벨에 가까운 클론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하지만 워낙 전투가 거칠어지다 보니 도시의 중심부 대부분을 파괴했다.
높게 솟은 구조물이 중력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고 다른 것들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졌다.
이어서 남은 생상 공장이나 주요 시설을 파괴한 승현은 임무 창에서 처리할 마더 브레인의 숫자가 하나 줄어든 걸 확인했다.
자폭 장치조차 터지지 않은 걸 보면 탐식을 꺼내 중력을 가했을 때 너무 큰 데미지를 입었나 보다.
지금만 해도 저 멀리 중력 작용으로 인해 움푹 들어간 부분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주인. 이제 좀 먹음직스러워졌어?’
“하아, 너는 그냥 검이나 먹어.”
승현은 그림자에서 여태 넘기지 않았던 전설적인 등급의 검인 흡혈귀의 낙인을 넘겨주었다.
더 이상 그 검을 쓸 일이 없을 거란 사실을 요즘에 확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탐식은 검이 가진 고유 능력을 몇 배로 높이기에 흡혈귀의 낙인이 가진 체력 흡수 능력이 배가 될 거다.
‘일전의 드래곤 같은 대형 레이드 몹한테 좋겠지.’
신나게 전설적인 등급의 검을 섭취하던 탐식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뭔가 더 오는 것 같은데. 신경 안 써도 돼?’
탐식의 물음에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일 거다.
어느 시점에서 속도를 늦추고 다가오는 걸 보면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문명이 굉장하게 발달하긴 했어도 아직 어느 지점을 넘지 못한 이상 이 임무는 정보만 있으면 손쉬운 임무야.”
문명의 임계점.
이건 초월자와 같이 한 문명이 경계를 넘은 걸 말한다.
지구를 예로 든다면 마력석을 통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문명이 탄생하는 것 같은 상황을 두고 말한다.
이것도 회귀 전 들은 건데 지구와 연결된 게이트들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그 임계점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 임계점을 넘는 순간 차원 자체가 승격을 하면서 상위 차원이 되어 하위 차원에 더 이상의 간섭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는데.
‘뭐, 내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이들이 지척에 다가오길 기다렸다.
“반갑습니다. 우리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다. 행성의 원주민 맞지?”
“정보대로 말이 통하는군요. 당신의 강력한 무력은 익히 확인했습니다. 저희 행성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그 전에. 여기의 최고 권력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가온 사내는 통신기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이들은 무너진 마더 브레인의 본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 주위가 완전히 황폐해졌다.
아니, 역장을 통한 배리어 때문에 폭탄이나 운석 따위의 공격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데 용케 이런 꼴을 만들었다며 서로 승현은 괴물 보듯 바라봤다.
곧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통화를 마친 듯 승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목시계 같은 걸 내밀자 바로 앞에 한 노인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타 차원의 이여. 실례가 안 된다면 우리 행성을 방문한 이규가 있으신지요?”
“흠, 그렇습니다.”
“그 목적이 혹 마더 브레인의 소멸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전혀 다른 문제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여쭈어도 되는지요?”
“물론입니다. 전 이 행성에 있는 초월자. 즉, 인간의 한계를 벗은 인물과 접촉해 우호 관계를 맺고 제 행성으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만약 그 초월자란 인간이 거절한다면 어찌되는지요?”
“그 초월자를 제거할 뿐입니다.”
승현은 무미건조한 눈을 하며 말했다.
고성능 카메라를 통해 그 건조한 눈동자를 본 노인은 침음을 삼켰다.
그들이 알고 있는 초월자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쉽게 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회신이 어지러워지면서 노인의 홀로그램 옆에 예의 조커 문양이 떠올랐다.
“이봐, 당신. 당신 정도의 강함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행성을 지배한 마더 브레인을 분명 막을 수 있을 거야. 네가 남은 마더 브레인 중 셋을 처리하면 그땐 초월자와 만나게 해주지.”
“이쪽은 뭐지?”
승현은 갑자기 끼어든 조커를 보며 대장으로 보이던 남자가 답했다.
“그는 우리 인류 해방군의 참모이자 핵심 엔지니어입니다.”
“흐음, 그런 것치곤 건방지기 짝이 없네.”
“큼큼, 워낙 직설적인 분이시거든요.”
남자의 말을 들은 승현은 한 가지 조건을 더 걸었다.
“네 개를 파괴해주지. 그 초월자가 내가 가진 기기의 락을 해제하도록 해.”
“······기계? 너 정도 되는 사람이 기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나? 상관없지. 좋아. 그럼 이제 남은 여섯 개 중 네 개를 파괴해.”
“거래는 성사되었다. 참, 지도 한 장 줄 수 있나? 놈들을 찾기가 영 마땅치 않아서 말이야.”
승현의 말에 통화를 중재하던 남자가 통신을 끊고 자신이 찬 시계를 넘겼다.
“거기에 지도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파악한 행성의 모든 지형이 표시됩니다.”
“좋은 걸 가지고 있군.”
“위성은 남아있으니까요. 그럼 연락을 하고 싶으실 때 연락을 주십시오.”
대표로 말을 한 남자는 곧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동료들과 함께 사라졌다.
승현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남자는 한숨을 내수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승현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소대장님······.”
“그래, 그의 유전자를 통해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오리지널은 넘을 수 없나 보다.”
“마주한 순간부터 뱀 앞에 생쥐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저 사내라면 분명 우리 행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특수군 1소대는 승현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대화를 하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
한편 잠시 지도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 승현은 그대로 질주를 시작했다.
이미 한 개의 마더 브레인을 처리해본 결과 이곳의 수준은 상급 정도로 분류했다.
게이트는 최하급부터 최상급까지 존재하는데 최상급에 경우 레이드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게이트 중에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800레벨 정도의 클론 수천 명과 전투를 펼쳐야 하니 꽤나 힘들 거다.
적어도 대형 길드 하나가 주요 전력을 모두 쏟아야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
일개 국가 단위 정도란 소리다.
승현은 회귀 전 최상급을 넘어 특급 게이트까지도 돌아다녀본 사람이다.
이 정도 일은 시련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지도를 통해 고속으로 이동한 승현은 들르는 병기 생산 공장이나 자원 채집소 등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특정 목표의 마더 브레인이 아닌 가는 길 인근에 뭔가 있으면 바로 파괴했다.
종종 마더 브레인의 수하 같은 자들이 나타나 말을 걸었지만 그마저도 목을 꺾어주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게이트 안에서 승현을 막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각 마더 브레인들이 연합을 하게 되었다.
마더 브레인의 편에 선 인간들부터 모든 자원과 병기를 승현에게 고정시켰다.
몇 발 디딜 때마다 미사일이 날아오고 폭발이 일어났다.
어떨 땐 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했고 어떨 땐 살을 내주고 뼈를 격하는 공격도 감행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승현을 막을 순 없었다.
그렇게 세 개의 마더 브레인이 파괴되면서 결국 마더 브레인은 하나의 초월적 인공지능으로 합쳐졌다.
우주로의 진출을 위해 제작된 수많은 우주선이 최소한의 생산시설과 기타 핵심 시설을 싣고 대기권 근처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 개의 마더 브레인이 합쳐진 초월적 인공지능은 무언가를 준비했다.
승현은 조금 늦게 이륙하던 마더 브레인을 일격에 터트려버리는 걸로 약속을 이행했다.
“음, 전화.”
시계형 컴퓨터에 대고 전화를 외치자 곧 입력된 번호로 전화가 걸렸다.
곧 연합군의 대장인 노인과 조커가 거의 동시에 전화에 응했다.
“수고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행성 내에 마더 브레인이 사라졌습니다.”
“대단하더군. 과연 그게 인간이 낼 수 있는 것이 맞나 실험해보고 싶을 정도야.”
둘의 말에 승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의 약속은?”
“걱정하지 마. 약속은 분명 지켜져. 네가 있는 곳으로 드론이 갈 거야. 그 드론을 타면 네가 원하는 초월자에게 안내할 거야.”
“귀찮은 짓을. 내가 평상시에도 마음만 먹으면 아음속으로 달릴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어. 상대가 원치 않으니까.”
“뭐, 좋아. 상대방과 대화해면 알겠지.”
“그럼 맡길 기기도 함께 가지고 오도록 해.”
말을 마친 조커가 사라지고 노인만 남아 승현의 노고를 치하했다.
잠시 뒤 땅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리다가 이내 승현의 앞에 한 사람이 들어가기 충분한 인위적인 터널이 생겼다.
아무래도 이동은 지하로 하는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터널 안으로 뛰어들자 미끄러지듯 상당한 거리를 내려가 지하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왜인지 이 시대와 너무나 안 어울리는 철도와 가솔린 모터로 작동하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에 올라 모터를 켜자 서서히 수레가 움직였다.
“이런 건 또 옛날에 게임 할 때 본적은 있어도 타본 적은 처음이네.”
승현에게는 무척 느리게 느껴졌지만 시속 100킬로미터로 안전장치 없이 달리는 수레는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구불거리는 길이나 두 개, 세 개로 갈라진 선로를 통과하던 승현은 자신이 어느 지점을 네 번이나 빙빙 돌고 있음을 인지했다.
“이거 너무 빙빙 도는데.”
“조금만 참아. 슬슬 위성 방해 장치가 제대로 효과를 내고 있으니까.”
수레에 달린 무전기에서 조커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련히 알아서 할 거란 생각에 가만히 수레에 앉아있었다.
두 차례 더 같은 공간을 돌던 수레가 드디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릭끼릭.
“흠. 살짝 걱정되는 소리군,”
가만히 앉아서 위태롭게 비명을 지르는 수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지 만화에서처럼 롤러코스터와 같은 선로는 없었다.
장장 4시간을 이동한 끝에 어느 지하 깊은 곳에 도착한 승현은 합금으로 막힌 벽 앞에 섰다.
“문이 열리면 그대로 쭉 걸어와. 그럼 만날 수 있을 거야.”
말이 끝나고 문이 열리자 승현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는 얽히고설킨 전선들과 아무 곳에나 배치된 대형 컴퓨터가 난잡하게 지리했다.
그것들을 피해 앞으로 걸어가자 드디어 이 세계의 초월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쪽이 더 마더 브레인이라 불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인공지능과 비교하지 말아줄래?”
승현은 모든 전선이 연결된 눈앞의 유리관 안에 든 뇌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