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무언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그의 말.
승현은 아마도 그 무언가가 지금 탈리아스가 말한 재창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마법사가 말하길 아직 법칙은 충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그 마법사가 과연 신인 나보다 더 정확히 볼 수 있을까?”
“······.”
승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백번 맞았기 때문이다.
“재창조가 시작되면 모든 차원과 창조자와 신까지 모두 사라져. 그리곤 다시 모든 게 시작되지. 거기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어. 아, 모든 것에서 벗어난 세계라면 사라지지 않겠군.”
“창조자들을 죽이면 해결되는 거겠죠?”
승현은 조심히 물었다.
모든 일의 원흉을 제거하면 재창조는 오지 않을 수 있다.
증명의 장의 경기장 주인이었던 파를은 이리 말했다.
수많은 미래 중 온전한 지구가 있는 미래가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자신이 더욱 강해져 창조자를 살해하고 법칙을 끊어낸다면 재창조는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탈리아스는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잘 모르겠군. 지금 상황을 살펴봐야 해. 난 오주 오랜 세월을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재창조가 다가왔는지 알지 못해.”
“결국은 제가 이 문을 열어주어야 답을 알 수 있다는 거군요.”
“끌끌끌. 그렇지. 내가 이 감옥에서 나와야지 비로소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네.”
“······.”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아. 나는 마신이고 생명에겐 그리 호의적이지 않지. 인류는 원래 마와 친숙해지기 어려운 법이야. 하지만 나는 마족이나 악마와는 격이 다른 존재네.”
끝말과 동시에 여태까지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탈리아스의 격이 느껴졌다.
승현은 태산같이 자신의 존재를 짓이기는 그녀의 존재감에 압도되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쳤다간 영원히 백치가 될 것만 같았다.
“자아, 이게 네가 상대한다고 한 창조자의 격이다. 나는 오랜 세월 이곳에 있으면서 나를 더욱 높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 정도 격을 만들어냈지.”
“이것이 창조자의 격인가.”
“창조자는 창조주에게 특혜를 받은 자들이야. 그렇기에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그들을 상대하려면 그들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해.”
“더 높은 곳을요? 하지만 하신 말을 보면 그 다음은······.”
“그래. 바로 창조주의 위치이지. 만물을 만들고 이 우주를 구성했으며 우리에겐 탄생, 죽음, 시간, 공간, 카르마로도 존재하는 태초의 존재.”
승현은 너무나 아득한 목표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탈리아스는 그런 승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짙은 미소를 그렸다.
“너는 암왕의 후인이구나. 암왕을 비롯한 몇몇 이레귤러들이 차원에 존재했지. 그들의 힘은 몹시도 강력해 자신들의 차원은 물론 타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쳤어.”
승현은 마신이 들려주는 비사에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검제라 불리던 이들 중엔 창조자를 베어 넘긴 이도 있어. 그러니 희망을 가지게.”
“정말로 검제가 창조자를 베었습니까?”
“놀라운 일이었지. 비록 창조자가 된 직후라고는 해도 창조자는 여타 차원신의 위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탈리아스가 들려준 비사는 승현의 꺼져가던 의욕을 되살리게 했다.
“더욱이 네겐 다차원 규모의 물건이 꽤나 많아. 한 사람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양이야.”
“불가해 등급 아이템을 말하는 거군요.”
“아마 네가 말하는 것과 일치할 게다. 그것들만 네 것으로 만들면 창조자를 물리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좋은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자. 나는 이곳을 나가고 싶고 너는 강한 힘을 얻어 창조자를 죽이고 싶다. 마침 창조자 살해는 나와도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지.”
“······?”
“계약을 하자. 네가 신이 된다고 해도 결국은 필멸자에 불과하다. 불멸의 영역은 오직 창조주에게 닿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영역 그렇다면 우리의 계약도 결국 끝이 생긴다.”
감방 안의 탈리아스의 목소리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네게 힘을 빌려주마. 이 정화의 불을 온전히 네게 주겠다. 대신 넌 이 문을 열거라.”
“중요한 게 빠졌습니다. 당신이 제가 사는 차원과 저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흐음, 의심 많은 아이로고. 좋다. 너를 포함한 네 차원을 공격하지 않으마. 어떠냐?”
“본인을 걸고 하시는 약속이 맞으시겠죠?”
“그렇다. 인간이란 의심이 많은 존재이지. 그렇기에 나는 약속이 아닌 계약으로 이 사항을 네게 남겨줄 생각이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좋습니다. 그럼 계약을 맺죠.”
“창살 안으로 손을 넣어라.”
아직까지 탈리아스를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승현으로선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이곳은 용언으로 인해 넘어온 곳이라 빠져나갈 방법이 그에겐 없었고 그 열쇠는 마신인 탈리아스가 쥐고 있었다.
또 그녀가 제안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기도 했다.
꺼지지 않는 마의 불꽃의 자아를 담당하는 그녀가 직접 마의 불꽃을 자신에게 넘겨주겠다고 했으니 알타의 힘이나 암왕의 힘처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거다.
창살 안에 손을 넣자 그녀가 손을 잡아왔다.
그러자 중지 손가락에 검은색 반지가 생겨났다.
“계약은 끝났다. 그 반지는 계약의 증표. 우리의 계약이 모두 이행되어도 우리를 이어줄 인연의 끈. 작은 기념품이라 할 수 있겠구나.”
“좋습니다. 그럼 이제 문을 열어드리죠.”
계약을 마친 승현은 감방의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끼기긱.
감방의 문이 열리는 순간.
시야가 확 밝아지며 승현은 자신의 몸에서 깨어났다.
“돌아온 건가.”
“드디어 깨어났군. 드래곤이 곧 완전히 빠져 나올 거야. 그전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행성은 종말을 맞이한다.”
정신을 차린 승현에게 알드리안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목과 어깨만 나와있던 드래곤은 이제 몸통의 반 이상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때마침 어디선가 날아온 미사일 수백 발이 드래곤에게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눈을 멀게 할 굉장한 빛과 함께 작렬하는 열기와 이어서 충격파가 덮쳤다.
알드리안이 펼쳐둔 건지 반투명한 베리어가 덮어졌지만 상당한 열기가 베리어를 뚫고 전해졌다.
승현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광범위한 베리어를 펼쳤지만 생존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만 하면 대략 1,000여 명 남짓.
나머진 모두 사망했다.
승현이 기억하기에 이곳에 모인 헌터만 수만 명이 넘어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남은 숫자는 천 명이 겨우 넘는다.
이게 아직 완전히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드래곤이 만들어낸 참상이었다.
“방금 폭발은 아무래도 핵병기 같군.”
“그래, 지금 핵을 보유한 모든 국가가 이리로 핵을 날리는 중이다. 상황 보고에 따르면 이미 보유한 핵병기의 87%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효과는?”
“그나마 좀 있는 편이지.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어. 그마저도 놈이 용언으로 완전 회복을 하는 바람에 그냥 마력만 좀 뺀 수준이야.”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린 승현은 드래곤을 바라봤다.
인류는 현 시점 최강병기를 모두 동원했지만 드래곤의 무한한 마력의 일부를 소모시키는데 그쳤다.
‘탈리아스. 계약을 이행하세요.’
승현은 중지에 껴진 반지에 대고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손에 들려 있던 꺼지지 않는 마의 불꽃에서 변화가 찾아왔다.
화르르.
검의 형태를 가졌던 마의 불꽃이 점차 형태를 잃어가며 한 줄기 불꽃으로 변하였다.
“쯧쯧, 부디 필살기는 뜸 들이지 말고 쓰게나.”
“나도 방금 얻은 거라서 말이야.”
알드리안의 핀잔에 승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로서 승현은 총 세 개의 법칙을 깨부수는 힘을 얻었다.
그림자를 지배하는 암왕의 힘과 신수 그 자체가 되는 알타의 힘.
그리고 지금 얻은 모든 것을 정화하는 정화의 불꽃.
정화의 불꽃은 불임에도 알타의 힘과 분리된 특별한 힘이다.
승현은 알타의 힘을 무극신공을 통해 몸 안에 정제했다.
“지금 당장 남은 모든 핵병기를 발사하라고 해. 1초의 오차가 있어도 되니 최대한 동시에 폭발하도록 해서.”
“그러지. 행운을 비네. 시간을 버느라 상당히 지쳤거든.”
알드리안은 승현의 뜻을 각국에 전했다.
이미 핵병기가 쓰이는 중이기에 승인은 3분도 안 되어 떨어졌다.
그동안 알타의 힘을 극한으로 응축시킨 승현은 곧 완전히 게이트에서 빠져나올 것 같은 드래곤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몸의 붕괴 직전까지 응집시킨 알타의 힘이 손가락 끝에 모였다.
하얗다 못해 영롱한 색을 가진 응축된 힘은 언제라도 쏘아질 기세였다.
그기에 넘겨받은 정화의 불꽃을 덮은 승현은 알타의 힘조차 야금야금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꽃이 가진 힘에 혀를 내둘렀다.
승현은 대략 드래곤의 심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가리켰다.
서서히 음속의 속도로 날아오는 수천 발의 핵병기를 포착한 승현은 드래곤이 대마법과 용언을 이용해 방어를 하는 걸 보고 응집된 힘을 개방했다.
피잉.
태양 세 개를 합쳐 놓아야 맞먹을 막대한 에너지를 담은 빛줄기가 드래곤의 몸을 꿰뚫었다.
핵폭발로 인해 약해진 방어는 손쉽게 드래곤의 방어막을 뚫고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는 시점에서 승현이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자 아주 조용히 발사되었던 것과 다르게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다.
“푸하아아악!!”
드래곤의 몸통이 잠시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리곤 입과 코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알타의 힘으로 모은 열에너지가 드래곤의 내부에서 폭발한 것이다.
애초에 드래곤은 일반 생명이 아닌 마력의 생물로 장기가 거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에도 여타 생물과 달리 큰 타격을 줄 수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타격이 없는 건 아니다.
몇 없는 장기 중 하나인 심장은 드래곤의 마력 원천.
그 심장에 타격을 주는 것.
아마 드래곤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을 거다.
그러나 진짜는 따로 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타오르기 시작하는군.”
빛줄기의 시작점엔 승현이 달아둔 정화의 불꽃이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만으로 마계란 하나의 차원을 소멸까지 몰고 간 물건.
그것이 지금 저 드래곤의 몸 안을 맹렬히 태우고 있었다.
그 고통에 몸부림치던 드래곤은 곧 완전히 몸을 빼냈다.
하지만 거대한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대신 맥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
그 광경은 위성이나 헌터의 능력을 통해 공유 받던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당연히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도 똑바로 목격했고 말이다.
재앙 혹은 종말을 알리는 괴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핵병기 수만 발을 맞고도 멀쩡하던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후우, 조절이 상당히 힘드네.”
승현은 지금 드래곤 내부를 태우고 있는 정화의 불꽃과 교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화의 불꽃을 얻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컨트롤하기엔 무척이나 어려웠다.
조금만 잘못 조종하면 드래곤뿐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 모조리 불태울 것 같았다.
서서히 드래곤의 거체에 구멍이 송송 뚫리며 검은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서서히 생존한 헌터들이 드래곤의 옆으로 모였다.
그럼에도 드래곤은 움직이지 않고 핏발이 인 눈으로 헌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이 어떻게 나온 거지?”
“원. 우리 차원을 망가트리려 하는 인류의 적. 여기 있는 자들 중에 그들을 모를 이들은 아마 없을 것 같군.”
승현은 북풍이 몰아칠 눈빛으로 생존한 이들을 쭉 살폈다.
링첸과 게일을 포함해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시선을 피했다.
이미 최승현이란 인간의 힘을 목도했다.
그 드래곤조차 지금 자신들 앞에 쓰러져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건. 모두 내 주변으로 모여라!”
순간 알드리안이 외쳤다.
그에 맞춰 모두가 느꼈다.
지금 드래곤이 무언가를 할 것임을 말이다.
황급히 알드리안 주위로 모인 헌터들은 알드리안이 사용한 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한국으로 이동했다.
전장에 남은 드래곤은 길게 포효했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슬픔과 분노가 느껴지는 긴 포효 끝에 드래곤은 자신의 심장에 모인 마력을 그대로 폭파시켰다.
그렇게 미국 서부를 비롯해 멕시코 북부, 캐나다 남부가 거대한 폭발로 바다로 변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