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화르륵.
영혼 안에 잠들어있던 알타가 눈을 떴다.
순간 승현의 눈이 적색으로 물들며 변화가 시작되었다.
과거 증명의 장과 달리 이번엔 제대로 컨트롤이 된 알타의 힘은 고고히 승현의 몸을 돌아다녔다.
그와 함께 승현의 체모도 모두 붉은색으로 변하였다.
다음으로 룬을 전신갑옷으로 변형시키고 한 손에 마의 불꽃을 들었다.
아직 그 의식을 깨우지도 못한 마의 불꽃이다.
그러니 주인으로 인정받은 탐식이나 벨수록 체력을 회복하는 흡혈귀의 낙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미친 듯이 날뛰어야 할 때였다.
“그럼······!”
족히 수천 킬로미터 위에 떠 있는 드래곤을 향해 높이 도약했다.
콰득, 슈아악!
승현은 인간의 각력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하늘을 날았다.
단 한 번의 도약도 없이 음속으로 날아간 승현은 마치 은색 탄환 같았다.
몇 초만에 드래곤 앞에 도착한 승현은 마력을 대신해 알타의 힘을 마의 불꽃에 넣으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검은색으로 이글거리는 참격이 생겨나 드래곤을 때렸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사방을 때렸다.
그와 함께 드래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렸지만 폭음에 묻혔다.
날던 방향 그대로 드래곤의 목에 착지한 승현은 곧장 마의 불꽃을 놈의 목에 박았다.
당연한 거지만 워낙 크기가 거대해 손잡이까지 박혔음에도 비늘 하나 뚫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타올라라!”
후우웅―.
승현은 다시 알타의 힘을 마의 불꽃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며 드래곤의 비늘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알드리안이 준비한 마법이 드래곤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꽈아아앙!!
“케에에에에엑!”
드래곤은 비명을 지르며 더욱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빠르게 안으로 파고든 죽음의 불꽃이 놈의 두꺼운 비늘과 가죽을 뚫었음을 승현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신호로 여력이 있는 헌터들도 일제히 공격을 날렸다.
전사 계열은 공격을 할 수 없었지만 궁수나 마법사 쪽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공격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육중한 몸을 꺼내면서도 계속해서 승현을 공격했다.
우웅, 우웅, 웅, 웅웅, 웅웅웅!!
“대마법인가.”
목에 마의 불꽃을 꽂은 상태로 몸을 고정하던 승현은 자신의 주변에 떠오른 커다란 마법진에 가리지 않았던 머리까지 룬으로 감쌌다.
짧은 순간에 족히 만여 개는 넘어 보이는 마법진이 승현의 주변에 생겼다.
회귀 전 드래곤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알고 있는데 지금처럼 자아가 없는 드래곤이라 해도 본능적으로 마법을 구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폭주한 드래곤이라도 마법에 주의를 해야 했다.
콰앙! 콰가가가강!!
어마어마한 마법 세례가 승현에게 떨어졌다.
룬의 뛰어난 마력 저항력에도 워낙 많은 마법이 쏟아져 룬의 내구도가 쭉쭉 달았다.
자체 수복을 위해 룬은 끝없이 마력을 빨아들였다.
“알드리안! 놈은 억지로 게이트를 통과하는 거다! 게이트를 닫아버려!”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외치진 승현은 마의 불꽃에 마력을 최대로 흘려 폭발시켰다.
“어, 리석은 인간, 이여.”
“자아가 남아 있는 건가?!”
“명, 한다. 죽어, 라.”
“큭, 용언······!”
승현은 재빨리 드래곤에게서 멀어졌다.
드래곤의 무서운 점은 앞도적인 육체능력이나 대마법이 아니다.
바로 저들이 격으로 가진 용언의 힘이 그들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용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의 마력이 모두 승현에게 모였다.
운명에 간섭하는 용언 때문에 승현의 운명에 죽음이란 글자가 드리워졌다.
드래곤에게 가까울수록 용언의 효력이 강해지기에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드래곤에게 집중되어 날아가는 수많은 공격을 피하며 아래로 착지했다.
콰가각.
착지한 승현은 그대로 허공에 마의 불꽃을 휘둘렀다.
화르륵, 화륵!
용언으로 인해 그에게 모이는 마력을 마의 불꽃으로 태우는 승현은 빠르게 알드리안에게 향했다.
“알드리안, 이 용언 좀 어떻게 해줘!”
“용언은 신성을 이룬 자들의 언령이나 같은 급의 용언으로만 상쇄할 수 있어. 효과를 약화시킬 테니 몸으로 버텨보게.”
“젠장.”
고속으로 휘두르는 마의 불꽃에 마력이 타올랐지만 전 범위를 한 번에 막을 수 없어서 서서히 용언이 완성되고 있었다.
알드리안은 승현에게 걸린 용언을 약화시켜주었는데 그럼에도 정말 막대한 마력이 몰렸다.
어느 시점이 되어 완성된 용언에 의해 승현은 죽음을 직감했다.
승현의 주변으로 막대한 마력이 몰렸다 사라지자 승현의 주위로 검은색 불기둥이 솟아났다.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불기둥이지만 누구도 가까이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는 한편 가장 거슬리던 승현이 침묵하자 드래곤은 본격적으로 게이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 좋군. 승현은 죽은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알드리안은 주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승현여기서 그나마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킨 건 승현뿐이다.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승현이 만든 검은 불꽃은 드래곤의 막대한 방어를 뚫고 타격을 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피해를 주고 있었다.
주문을 완성한 알드리안은 입을 열었다.
“문이여, 닫혀라.”
게이트를 닫는 방법.
그것 역시 법칙에 간섭하여 비트는 것이다.
마법이란 것이 기존의 법칙에 간섭하는 것이다 보니 마법처럼 정해진 건 아니더라도 게이트를 닫을 순 있었다.
알드리안의 주문이 완성되자 균열이 일어나던 게이트가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드래곤의 몸은 차춴의 틈에 껴 토막이 날 거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차원의 틈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문, 이여. 열려라.”
쩌적, 쩌억!
알드리안이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복원되던 게이트에 다시 균열이 생겼다.
알드리안이 죽음을 극복했다고 해서 신성을 얻어 권능을 가진 건 아니다.
당연히 용언에 비하면 그 힘이 모자라기에 잠시 주춤하게 만든 것 이외엔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
“허허, 승현이 시간을 벌어준다면 가능은 하겠는데.”
알드리안은 잠시 검은 불기둥을 바라봤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얼굴을 굳힌 알드리안은 주문을 외우며 지시했다..
“모두 모든 힘을 다해 방어하라! 큰 게 온다!”
알드리안의 목소리는 폭음과 고함이 가득한 전장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임을 깨달은 모두가 바로 방어를 준비했다.
알드리안을 시작으로 하늘에 수만 개의 방어 마법이 펼쳐졌다.
푸른색 막이 실시간으로 하늘을 덮었는데 퍽 투명한 실드가 그저 푸른색으로 변할 정도로 마법이 겹쳐졌다.
알드리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력 동결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사는 뭘 하나?! 그대들도 가진 기술을 사용해 충격에 대비하게!”
운석이 떨어져도 우습게 막을 정도로 많은 방어 마법이 허공에 펼쳐졌다.
그럼에도 충격에 대비하라는 알드리안의 말에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흐아아압!”
곧 주문을 완성하자 주변의 마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알드리안 마저도 마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온다!”
그리고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코앞에서 수만 톤의 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울렸다.
그와 함께 하늘을 막은 방어 마법이 빠른 속도로 부서졌다.
헌터들은 그제야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최강 공격기인 브레스가 지금 자신들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음을.
브레스가 방어 마법을 뚫으면서 들리는 소음은 초인이 된 헌터들의 고막을 찢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어떤 이들은 그 소리가 내는 파동에 내장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방어 마법이 모두 깨져나가고 브레스의 찌꺼기가 지상을 강타했다.
콰과가가강, 쿠우우웅!
브레스의 여파만으로 헌터들이 딛고 있던 땅이 갈라지고 터져나갔다.
그와 함께 일어나는 돌풍과 충격파로 거의 모든 헌터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래도 전멸이란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진 않았다.
주변 마력을 동결시킨 알드리안의 임기응변이 이들을 살렸다.
동결 마법도 브레스의 여파로 깨졌지만 누구도 바로 공격을 시도할 수 없었다.
“으으······.”
“누, 눈이 안 보여.”
“살려, 줘······.”
상황은 처참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헌터들만 수만 명이 모였지만 지금 두 발로 서 있는 이들은 백 명이 안 되었다.
상황을 살핀 알드리안은 드레곤을 바라봤다.
한 차례 브레스를 쏜 덕분에 드래곤은 오직 게이트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했다.
“승현. 빨리 용언을 떨쳐내고 나와라. 네가 아니면 저 놈을 막을 자가 없구나.”
승현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마치 지하 감옥처럼 생겼다.
좌우로 쇠창살이 달린 감방이 늘어서 있었는데 한기가 느껴지는 것 말고는 그리 특별한 건 없었다.
“여긴 어디지? 내면세계 같은 곳인가.”
느낌으로 보면 고유결계와도 비슷했지만 마치 누군가의 내면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워낙 급박한 상황에서 온 터라 승현은 빠르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뒤로는 길이 없기에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가끔 놓인 횃불만이 길을 밝혔다.
전력으로 달리는 덕에 주위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한참을 달렸을까.
승현은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처음에 있던 곳과 달리 그곳엔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철문 위쪽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쇠창살이 있었다.
섣불리 안을 들여다보기 보단 우선 안에 있을 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안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오? 오오! 탐스러운 영혼이로군.”
안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현은 인기척을 내었음에도 느낄 수 없는 존재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그 안에 있는 게 맞습니까?”
“호호, 아이야. 너는 아직 산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럼에도 어찌 그리 탐스럽게 영글었누.”
“······당신은 누구십니까?”
“잊힌 마의 근원. 모든 마의 어머니. 마신, 탈리아스. 그것이 내 이름이지.”
“마신? 그러면 이곳은 마의 불꽃이 만든 공간이로군.”
“잘 보았네. 여긴 내가 만든 봉인의 공간이야. 말도 안 되는 불을 잠재우기 위한 곳이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간단해. 그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면 되지.”
승현은 잠시 문에 달린 문고리를 바라봤다.
“이 문을 연 순간 전 그 행동을 후회할 것 같군요.”
“호호호,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렇다면 나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련?”
“좋습니다.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마의 불꽃은 신이 마계 끝에 붙였다고 들었는데 마신인 당신이 왜 전력을 다하고서야 불을 봉인할 수 있었던 거죠?”
“그건 그 불 자체가 신이었기 때문이란다. 불을 지핀 신은 자신을 촉매로 삼았고 덕분에 나도 이 불을 막기 위해 날 봉인해야 했지.”
“그래서 마의 불꽃이 법칙에 어긋난 힘을 가지게 되었군.”
“그러고 보면 너 같은 아이가 내게 왔다는 건 그들의 내기가 아직도 진행 중이란 말이겠지?”
“그들의 내기? 설마 창조자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내 세계에 불을 지핀 것도 같은 창조자였지. 그들은 흥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자들이거든.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내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거야.”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법칙을 새롭게 만들려고 했어. 순리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법칙은 아무리 완벽해도 파열을 일으키지. 그 파열의 끝은 결국 모든 것의 재창조란다.”
“재창조······.”
승현은 순간 알드리안이 말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