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회의를 마치고 승현은 링첸과 둘이서 잡담을 나눴다.
다른 이들은 두 사람이 편히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먼저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로 증명의 장에 있었던 일을 공유했는데 그녀를 포함해 게일과 아이실도 승현과 같이 전승자에게 시련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승현과는 달리 입장과 동시에 시련을 받았다.
때문에 상당한 시간 시련에 매달렸어도 승현보다 먼저 증명의 장을 나왔다.
“첸, 너도 알겠지만 이 세계는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우리의 힘은 그런 법칙에서 벗어난 힘. 사식과 진실에 어긋나는 힘이야. 이런 힘이 왜 주어졌을까?”
“전대 검제는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어. 가령 그의 세계에도 과거에 지구와 같은 상황을 겪고 소멸했다는 것도.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배후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어.”
링첸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와 함께 힘을 모아 이 법칙을 만든 창조자를 죽이자.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승현. 정말 미안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경고를 해주는 것뿐이야.”
“······?”
“잘 들어. 게일 프리스는 창조자와 손을 잡았어.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어떤 조직과도 연결되어 있고. 아이실 트라이센은 다음을 위해 차원이동 마법을 준비 중이야.”
“······.”
승현은 다소 충격적인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제야 회귀 전 왜 그렇게 원과의 전투 양상이 그리 흘렀는지 이해됐다.
한 편의 꼭두각시 연극을 보는 것 같단 생각을 회귀 전 그는 늘 가지곤 했다.
원과 영웅왕 게일 프리스가 손을 잡았다면 뭐든 게 설명이 되었다.
그 사이에 있던 대마법사 아이실의 소극적 대처도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원은 왜 나와 같은 스파이를 만들어 냈을까.’
잠시 떠오른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인류를 속인 거다.
모든 정보는 스파이에게 얻었고 스파이가 얻지 못할 정보엔 적당히 피해를 입어준다.
당연히 인류는 스파이에게 모든 초점을 맞출 거고 그 중심엔 모든 영웅을 이끌던 게일이 있었다.
인류는 창조자와 원의 손아귀에서 철저히 놀아난 꼴이다.
링첸은 굳은 얼굴의 승현을 보며 조금 거리를 벌렸다.
“나도 창조자의 대변인에게 제안을 받았어. 나와 검림 길드는 자동적으로 다음 세계로 이동될 것을 약속받았어. 아이실 쪽은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는데 대항을 포기했지.”
“내가 왔으니······.”
“아니. 승현이 돌아와도 마찬가지야. 승현이 강하다는 건 잘 알아. 아마 불가해 등급의 무언가를 얻었겠지. 하지만 이 세계에 얽힌 법칙과 관여한 창조자의 수는 백이 넘어.”
링첸은 말했다.
그들을 물리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부디. 잘 지내길 빌게.”
링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공간이 접히기 시작했다.
공간이란 종이를 반으로 접는 것처럼 시야가 괴상하게 틀어졌다.
어떤 마력의 움직임도 없던 걸 감안하면 이건 원이 가진 권능일 가능성이 크다.
“쯧, 까다로운 상대로군.”
공간 계열의 권능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아무래도 증명의 장에서 만났던 공간 능력자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방심을 한 사이 이뤄진 공격이라 반격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공간이 접히기 시작했다.
우드득!
“그림자 자체를 격리시킨 건가.”
승현은 반으로 접힌 팔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보다가 바로 불꽃을 일으키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룬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으나 공간이 접히는 거라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주 작은 그림자만 있어도 이동이 가능했기에 승현은 잠시 생겨난 그림자로 몸을 피했다.
그림자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그림자로부터 얻는 시야 덕분에 울렁거릴 정도였다.
반경 수십 킬로미터 안 모든 그림자의 시야를 공유한 승현은 바로 적을 찾아냈다.
그림자 자체가 되어버린 승현이기에 이젠 시스템이 금지했던 기술을 다양하게 쓸 수 있었다.
가령 이렇게.
푸슈슉!!
검은색 로브를 쓴 원의 몸을 사방에서 솟아난 그림자 창이 꿰뚫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에 파고든 창이 다시 분열하며 신체 내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림자 안에서 이뤄낸 공격이기에 어디서 어떻게 공격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 반격도 할 수 없으니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선 무적이다.
승현은 그대로 꿰뚫린 원을 위로 올리고 그림자로 된 정육면체를 만들어 원을 가뒀다.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팔 한쪽에 부상을 입었었으니까.”
이미 반으로 잘려나갔던 팔이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회복 관련 기술이 없는 승현이지만 알타의 힘을 계승한 이후로 얻은 초회복력이다.
불꽃이나 열에너지가 있다면 피부 한 점만 남아도 부활할 수 있다.
마치 불사조가 된 듯이 말이다.
승현은 그림자로 된 상자를 보며 말했다.
“용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 그때 죽지 않았나 보군?”
“최승현. 오늘은 가볍게 인사나 나누고자 왔다.”
“인사치곤 거칠었어.”
“너의 강함은 무척 놀라운 것이군. 네게 적용된 법칙 중 상당수가 어긋나있어. 탐나는 인재야. 하지만 넌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지.”
“당연한 소릴. 너희는 창조자 밑에서 일하는 건가?”
“딱히. 우린 악어와 악어새 정도의 관계지. 그럼 간단한 선물을 주고 물러나도록 하지.”
원의 누군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흡입력이 발생하며 주변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승현은 그것이 블랙홀과 흡사하면서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건, 폭탄인가······.”
형태를 확인한 승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빨아들였다 그걸 에너지로 삼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에 승현이 손을 대면 오히려 폭발력만 키워줄 뿐이었다.
서서히 폭탄이 작동을 시작하자 승현은 그것의 그림자에 의식을 집중했다.
이대로 터지면 못해도 미국 서부는 불바다가 될 것이다.
상대의 그림자를 조종하여 사물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으로 이면지배와 물체 고정의 특성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술이다.
당연히 생명체에게 사용하려면 막대한 마력이 필요했지만.
“생명체가 아니면 크게 상관이 없단 말이지.”
쿠구구구―.
대기가 찢어질 듯 울리는 소음과 피부를 거칠게 쓸고 지나가는 마력은 이 폭발이 얼마나 클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승현은 그대로 폭발의 방향을 위로 향하도록 조종했다.
쿠와아아아―!!
조종이 끝나기 무섭게 검붉은 색의 마력이 광선처럼 위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대기권을 뚫은 마력은 우주 멀리로 날아갔다.
승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옆으로 마력이 튈 거고 그렇게 되면 그대로 이 일대가 마력에 휩쓸릴 거다.
최소한 수백 킬로미터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 거다.
부글부글.
폭발의 진원을 중심으로 막대한 에너지에 의해 땅이 녹았다.
이미 주변의 공기조차 빠르게 연소되며 기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어지간한 곳이라면 이 검붉은 기둥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승현은 어째서 마력의 색이 검붉은 것인지 생각했다.
마력의 색은 기본적으로 푸른색이고 특별한 힘이나 권능이 담기면 그 색이 바뀐다.
불길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검붉은 색은 결코 좋은 뜻이 담긴 것 같진 않았다.
그 성질도 무척 거칠어 컨트롤이 힘들었다.
십여 분 동안 이어진 폭발이 잦아들자 승현은 안도하기 보단 얼굴을 굳혔다.
“젠장, 선물은 이쪽이었나.”
높은 상공에 생겨난 검붉은 색의 거대한 게이트를 본 승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느껴지는 마력이나 크기로 봐선 아마 무지막지한 놈이 있을 거다.
특히 저렇게 마력을 풀풀 풍기는 게이트는 십중팔구 몬스터를 뱉어낸다.
얼른 핸드폰을 꺼낸 승현은 국제 헌터 협회에 연락을 취했다.
“당장 전투 가능한 헌터를 이번 회의장소로 소집하세요. 지금 당장!”
“혹시 방금 관측된 비정상적인 마력 방출이 관련이 있습니까?”
“예. 그러니 바로 소집하세요.”
“현재 협회도 확인 중에 있습······.”
“알드리안을 통해 말해야 말귀를 좀 알아들을 겁니까? 북미대륙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승현의 격양된 말투에 직통으로 연결된 간부는 재빨리 비상령을 내렸다.
각국을 대표하는 헌터는 자국 헌터 소집령을 가지고 있었고 알드리안의 경우 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전 세계 헌터를 소집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니 승현이 알드리안에게 말한다면 금방 이뤄질 일이다.
“알드리안 님의 이름으로 소집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대한 사항도 알드리안 님께 보고하였으니 곧 그곳으로 헌터들이 모일 겁니다.”
“으음, 이거 참 대단한 놈이 나올 모양이네.”
간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서 알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현은 핸드폰을 끄고는 하늘을 주시하며 물었다.
“알드리안. 아무래도 대단한 놈이 올 것 같아. 어쩌면 너도 전력을 다해야 할 거다.”
“후후후. 재미있군. 나 정도 되는 이가 전력을 다할 적수라니. 어쩌면 내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죽음이란 법칙에 벗어난 알드리안임에도 이번에 나올 놈은 충분히 그걸 가능하게 만들 거다.
원래라면 상당히 뒤에야 나와야 할 몬스터들이다.
적어도 몇몇 헌터들이 천레벨을 찍고 인류는 더없는 과학문명을 이룩했을 때에야 겨우 상대가 가능했던 최악의 몬스터들.
레이드를 넘어서 그 강함만으로 법칙에 유리된 생물체들.
속속 헌터들이 넘어오며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거기엔 게일과 오랜만에 보는 아이실도 있었고 아까 전 해어졌던 링첸과 각국의 대표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헌터들이 모였는데 다들 대기에 뿌려지는 압도적인 마력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협회 설립 이후 처음으로 총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릉, 쿠르릉.
“슬슬 나오려는 건가.”
이미 포지션을 완성한 헌터 군단은 가만히 하늘을 주시했다.
족히 수십 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게이트에서 불규칙적인 마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곧 무언가가 올 것임을 감지했다.
후우웅―!
“버프 기술을 가진 이는 모두 아군에게 버프를 시전해라!”
순간 전장에 모인 이들에게 황금색 물결이 퍼졌다.
그와 동시에 승현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힘이 넘쳐나는 걸 느꼈다.
이것이 바로 게일 프리스를 영웅의 왕이라 불리게 만든 대군주의 버프 기술이다.
쩌저적!!
“호오, 확실히 저런 거라면 내게 없던 죽음을 줄 수도 있겠어.”
“크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을 찢는 괴성과 함께 뇌를 곤죽으로 만들 날카로운 마력이 퍼졌다.
단지 목청껏 우는 것만으로 모인 헌터들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준 몬스터가 게이트를 부수며 얼굴을 내밀었다.
“저게 뭐야······?”
“드래곤?”
그 커다란 게이트조차 비좁다는 듯 게이트를 부수며 나오는 건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다.
긴 주둥이의 머리만 해도 이미 초고층 빌딩에 맞먹는 크기를 가졌다.
검붉은 비늘을 가진 놈은 서서히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놈이 뿌리는 압도적인 기세에 대부분의 헌터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것이 바로 격의 차이였다.
결코 500레벨도 되지 않은 헌터가 버틸 수 있는 격차가 아니다.
일전에 승현은 특수대응부대의 팀장들에게 격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때 보여준 건 승현이 사정을 봐주었기에 그들이 멀쩡했던 것이고 이렇게 숨김없이 격을 뿜어내며 적의를 비추는 건 여기 모인 대부분의 헌터가 피를 토하며 쓰러질 정도다.
이들이 버티는 이유는 오직 하나.
게일의 대군주가 가진 의식연결 때문이다.
회귀 전엔 정신계 공격을 주로 하는 몬스터가 나왔는데 그때도 게일 때문에 겨우 토벌에 성공했었다.
하지만.
“아, 아아······.”
“저건. 못 이겨. 세상은 끝났어.”
거의 모든 헌터들이 드래곤이 목만 빼놓았음에도 절망에 빠져 전의를 상실했다.
승현은 그런 그들을 결코 한심하게 보지 않았다.
저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감히 격의 차이를 가진 존재 앞에서 자신감을 보인다면 그건 만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알들리안. 내가 먼저 한 방 먹일 테니 바로 후속타를 준비해.”
“그러도록 하지.”
말을 마친 승현은 오랜만에 알타의 힘을 전력으로 일깨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