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한때 향락의 도시라 불렸던 라스베이거스.
대재앙 이후로 많은 건물이 붕괴되며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잃긴 했지만 꾸준히 복원 작업을 지속하며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국제 헌터 협회가 주관하는 대책 회의는 그 권위에 맞지 않게 라스베이거스에서도 꽤나 떨어진 황량한 벌판에서 열렸다.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접이식 의자가 둥글게 자리하고 있었다.
군위 높은 국제 헌터 협회의 회의장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미 몇몇 자리엔 사람들이 앉아있었는데 다들 한국 대표로 온 승현과 일행을 주시했다.
“원래 이런 곳에서 하나?”
“이보다는 좀 더 격식을 갖춥니다만 이번에는 작정한 것 같네요.”
“대책 회의는 이미 안중에도 없단 소리군.”
이번 회의의 주제는 대책 회의였으나 승현의 힘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헌터의 정보는 극비 사항이긴 하지만 알 사람은 알게 되는 정보이고 그에 대한 신빙성을 얻고자 증명을 하는 자리를 만든다.
일각에선 헌터에게 등급을 붙이자는 의견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미 게이트와 던전에는 등급이 붙어 있으니 그걸 헌터에게도 적용하자는 의견.
‘나중에 결국 헌터도 등급이 붙었지. 그때 아마 어떤 명칭으로 등급을 나누느냐로 말이 많았지?’
결론은 가장 많이 통용되는 알파벳으로 단어를 맞췄다.
아무래도 당시 대마법사라 불리던 아이실이나 대군주 게일이 미국에 속해 있어 힘의 논리로 그리 정해진 것 같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동안 각국의 대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직접 의자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다들 은연중 마력을 끌어올리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승현을 보며 다들 의아하게 바라봤다.
과연 각국의 최고라 불리는 이들이라 그런지 마력이 상당하다.
‘최소 500레벨 후반에서 600레벨 중반인가. 성장 속도가 상당하군.’
그들이 가진 마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100레벨이나 차이가 난다.
알드리안이라는 뛰어난 마법사 한 명의 존재로 인해 이렇게 차이가 난 거다.
곧 미국 대표자인 게일과 중국 대표인 링첸이 도착했다.
둘 다 승현을 발견하곤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모든 이들이 모이자 협회 측 진행자가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한국의 발표와 그에 대한 대처를 쭉 설명했다.
국제 헌터 협회가 한국에 있다고 해도 일단 국제적인 기구인지라 각국의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고 알드리안의 발언으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러 가정을 통해 대처법과 대응책을 논의했고 몇 가지 방안이 나왔다.
협회 진행자는 그것들을 빠르게 설명했다.
솔직히 이런 사항은 나중에 간단히 정리해서 각국에 보내면 그만인 일이다.
회의라고 할 것도 없이 학자들의 방안을 듣고 각국이 그를 유동적으로 적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 어디까지나 기어 당시 최강자였으며 대재앙 이후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승현의 힘을 평가하고자함이다.
승현은 가만히 게일과 링첸을 살폈다.
둘 다 미궁에서 새롭게 전직을 마친 이들이다.
또한 증명의 장에 들어갔던 이들이니 승현과 같이 법칙을 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다.
‘나야 워낙 불가해 아이템을 두르고 있다 보니 마력이 흘러나오지 않는 거지만.’
무극신공이나 알타의 힘 중 하나만 있어도 이들 모두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다.
애초에 게일과 링첸을 제외한다면 승리도 손쉽다.
‘그보다 저쪽이 조금 걸리네.’
유럽의 맹주라 불리는 독일 대표자인 더크 클라인.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법칙을 보면 아마도 기어 당시 밝혀지지 않은 다른 미궁의 주인이 그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드리안처럼 법칙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상입니다. 그럼.”
말을 마친 협회 진행자는 허리를 숙여보이곤 그대로 사라졌다.
헌터 협회 인사들이 싹 빠지고 나자 각국 대표자와 그들의 수행원들만이 남았다.
고오오!!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하는 농밀한 마력에 대기가 울렸다.
이마저도 아직 대표자들은 마력을 방출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그저 전초전일 뿐이다.
“자, 그러면 다들 알겠지만 오늘 모인 진짜 이유를 좀 볼까요? 주인공은 앞으로 나오시죠?”
영국 대표자는 승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승현에게 모였다.
자신에게 모인 시선에 승현은 가만히 말을 꺼낸 영국 대표를 바라봤다.
그에 링첸이 뭐라 말을 꺼내기 전이었다.
“절 평가하기엔 실력이 조금 떨어지시는군요.”
“하하, 아십니까? 회의가 벌어지는 일대엔 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인이 일어나도 처벌받지 않죠.”
“그렇습니까? 어쩌면 오늘 영국은 한 명의 유능한 헌터를 잃을 수도 있겠군요.”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하긴, 공개한 스텟만 보면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하니까요. 얼마나 강할지 아주 기대가 됩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영국 대표님 정도는 움직이지 않고 제압이 가능합니다.”
“오만한 것도 정도껏 해라. 네가 3년 동안 증명의 장에 처박혀 있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증명의 장에선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것도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대신에 능력이나 기술 혹은 아이템을 얻죠.”
누군가 첨언을 하자 일갈을 한 영국 대표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3년. 어쩌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치를 얻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서? 레벨은 격의 차이다. 제아무리 스텟이 높아도 레벨이 낮으면 아이템의 효과도, 기술의 위력도, 마력의 질도 차이가 난다.”
영국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가운데 서서 선언하듯 외쳤다.
그리고 그의 말은 맞는 말이다.
시스템에서 레벨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아이템의 능력을 완전히 활성화하는 데에도 필요하고 마력을 정교하게 사용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이처럼 레벨은 분명 강함을 나누는데 가장 중요한 척도다.
회귀 전에도 아무리 스텟이 높거나 기술이 좋아도 레벨을 통해서만 등급을 분류했으니.
하지만 그것도 다 시스템이란 법칙의 적용을 받았을 때 이야기다.
그리고 불가해 등급은 그런 법칙에서 제외된 특별한 것.
‘알타의 힘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까지 법칙에 얽힌 무극신공조차도 이미 일부는 시스템에 벗어났지.’
그러니 승현을 레벨로 판단할 수 없다.
그걸 전혀 모르는 영국 대표는 자신감에 차 외쳤다.
“그딴 허세는 기어에서나 통해. 지금 내 눈에 비친 넌 그냥 잔챙이일 뿐이야.”
“흠, 근거는 무엇입니까?”
“근거? 나는 정보 계통 중 유일함 등급의 기술을 초월시켰다. 이미 네놈의 마력을 간파했지. 네가 공개한 마력치보다 한참이 모자라다는 것도 알아냈다.”
“재미있군요. 영국 대표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
승현의 질문에 누구도 나서지 않았지만 대체로 승현을 보는 눈이 한층 싸늘해졌다.
이 반응을 보면 영국 대표가 가진 정보 계통의 유일 등급 기술은 상당한 신뢰를 받는 것 같았다.
“확실히 유일함 등급의 초월 기술은 대단하죠. 특히 정보 계통은 익히기도 힘들지만 초월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 부분은 칭찬해드립니다.”
느긋하게 말한 승현은 무극신공을 끌어올렸다.
순간 승현을 중심으로 대기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순도 높고 많은 마력이 한순간 움직이기 시작하자 자연이 반응했다.
쿠구구구구.
“무, 무슨······.”
“격의 차이라고 했나?”
무극신공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면서 모든 이들이 압도적인 마력 앞에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격이란. 이런 거야, 애송아.”
승현은 의지를 담아 영국 대표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무극신공으로 갈무리되었던 마력이 영국 대표를 짓눌렀다.
“커헉······!”
사방으로 뻗어가던 마력이 영국 대표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자 영국 대표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서히 모이는 마력에 의해 땅이 갈라지고 움푹 파였다.
영국 대표는 저항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했지만 승현의 지배에 놓인 압도적인 마력에 의해 제대로 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콰드득.
대표들이 앉아있던 의자는 압착기에 들어간 듯 찌그러진 지 오래다.
각 수행원들은 마력이 응집되는 과정에서 영국 대표와 비슷한 꼴을 명치 못했다.
다른 대표자들도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자, 내 몸에 쌓아둔 마력을 풀었다. 이제 다시 한 번 말해봐. 이제 들어줄 용의가 있다.”
이미 영국 대표는 실신 직전이다.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승현이 마력을 완전히 집중시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자리에서 그나마 운신의 폭이 자유로운 건 게일이 가진 기술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수행원들과 게일, 링첸과 그녀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중국 수행원들, 독일의 대표인 더크 클라인 정도.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승현을 바라봤다.
‘저 정도면 엠페러 길드 전원이 모여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겠어. 그리고 그의 진짜 힘은 그림자를 통한 기술. 대단하군.’
게일은 속으로 계산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의 비범함이야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생각을 링첸도 하고 있었는데.
‘과연 승현을 내 검으로 벨 수 있을까?’
링첸은 증명의 장에서 놀라운 힘을 얻었다.
그렇기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었는데 승현의 힘을 보곤 자신의 생각이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들 승현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고 있을 때.
순식간에 무극신공의 제어를 받던 마력이 풀어졌다.
“국제적인 다툼이 많다고 하더군요. 저희 한국은 자국에 얽힌 어떤 문제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외교적 문제를 떠나 무력을 동원할 예정입니다.”
“······미국은 국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양보를 할 겁니다.”
“프리스 님은 상당히 오랜만에 뵙네요. 엠페러 길드가 워낙 다국적 기업이라 대표자로 나오시기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다국적 길드이긴 해도 일단 저는 미국인입니다. 이번 대표자는 엠페러 길드의 길드장이 아닌 게일 프리스란 개인으로서 참석했습니다.”
승현은 풀었던 마력을 서서히 몸 안으로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이 은밀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웠지만 그걸 느끼지 못할 이들은 여기 없었다.
지금도 막대한 마력이 승현의 몸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일과 인사를 나눈 후 자연히 링첸과도 인사를 나눴다.
“첸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승현은 못 본 사이에 엄청 성장했네.”
“뭐, 그렇지.”
어깨를 으쓱인 승현은 자연스럽게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그와 친분이 있는 게일과 링첸은 그런 승현을 따랐다.
세 사람을 따라 수행원들도 이동을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다른 대표자들도 빠르게 흩어졌다.
특히 영국 수행원들은 기절을 해버린 대표를 챙기고 서둘러 이동했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은 독일 대표 더크 클라인은 묘한 시선으로 승현이 떠난 곳을 바라봤다.
“변수가 등장했군.”
말을 마친 그도 자리를 벗어났다.